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100
“…….”
“…….”
“…….”
사위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데도 숨소리조차 들리질 않는다.
설마 연회 한복판에 소환될 줄은 몰랐던 터라 나 역시 민망함에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황제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나를 황당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고 그 옆에 선 에노쉬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주인공은 용케 등장했군.”
심지어 황제는 그 이상의 이야기는 듣고 싶지도 않다는 듯 이 말문이 막히는 상황을 아주 구렁이처럼 자연스럽게 흘려 넘기려 하고 있었다.
“네……. 아빠가, 늦지 말라고 했어요.”
“이미 늦었다.”
“……죄송합니다.”
내가 푹 고개를 숙이자 차르니엘 에탐이 내 옆으로 다가와 함께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분명 제때 도착했으나 아마 사정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리라 믿겠네.”
그러니 자세한 얘기는 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이 연회는 내 아들의 불치병을 치료해 준 에탐 가문의 공녀가 무사히 성장하고 쾌차한 것을 기념하는 연회이네.”
‘날 위해서?’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황제가 픽, 가볍게 김빠진 웃음을 흘렸다.
“마지막까지 초대장에 답신이 오지 않아서 짐이 걱정을 좀 했지.”
이 연회의 참석이 결정된 것은 겨우 2주 전 회의에서였으니까 말이다.
애초에 거절도 할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황제의 초대를 그렇게까지 무시해도 되는 걸까?
“이 자리를 빌려서 정식으로 말하지. 에이린 에탐.”
“아, 네!”
“짐의 아들을 살려 주어, 정말로 고맙네.”
황제가 고개를 숙였다.
아주 잠깐, 겨우 고개만 까딱이듯 숙인 것뿐이지만, 황제로서는 무척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또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주변이 한층 숙연해졌다.
나도 당황해서 굳어 있는데 차르니엘 에탐이 내 어깨를 톡 쳤다.
그제야 아차 싶었던 나는 급히 허리를 푹 숙였다.
“아! 저는 그저 친구를 도와준 것뿐이에요.”
욕심 같은 건 없었다. 그때는 그저 어떻게든 에노쉬를 살려 보고자는 마음뿐이었다.
내가 오만으로 헛된 기대를 품게 한 게 아니길 바랐다.
“고개를 들게.”
황제의 말에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친구를 위해서 했다……, 별것 아닌 것처럼 들리는 그 말을 행동으로 보여 주는 것은 사실 가장 어려운 일이지.”
“네?”
내 반문에 황제는 그저 빙긋 웃으며 시선을 2황자에게 옮겼다.
“황자는 좋은 친우를 두어 좋겠구나.”
“예, 아바마마.”
안하무인 에노쉬 답지 않은 퍽 순순한 대답에 고개를 기울이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뒤통수가 살짝 얼얼했다.
‘이거, 관계가 건재하다는 걸 알리려는 거구나.’
나는 드래곤이고 아직 밝혀지진 않았지만 에탐 가문의 차기 가주가 될 예정이니까.
‘…얄밉네.’
물론 고맙다는 말은 진심이겠지만, 그 감사 퍼포먼스와 함께 이득도 두둑하게 챙기겠다는 심산이 분명했다.
“그대에게도 에탐들에게도 이 연회가 부디 즐거운 연회가 되기를 바라네.”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모두 즐기게.”
황제가 허공을 손으로 가볍게 휘젓자 악단이 연주를 시작했다.
“조카님.”
“네?”
“에르노는 어디에 있지?”
“아, 콜린 공작…….”
…저택에 있었던 것 같다고 대답하며 혹시나 해 주변을 둘러보는 순간이었다.
아빠는 어느새 에탐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존재하고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사람처럼.
“…뒤에요.”
“뭐?”
“삼촌 뒤에 있어요.”
차르니엘이 뒤를 돌자 에르노 에탐이 멀끔한 낯으로 빙긋 웃으며 성큼성큼 내게 다가왔다.
“에이린.”
그가 내게 팔을 뻗는 순간, 차르니엘 에탐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너, 나 좀 보자.”
차르니엘이 아빠에게 낮게 읊조렸다. 차르니엘의 서슬 퍼런 눈빛을 보던 아빠가 여상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나 바쁜데.”
“어디에 다녀온 거지?”
“잠깐 일이 있어서.”
“이 이상 날 화나게 해서 네 딸의 연회를 망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따라와라.”
차르니엘 에탐은 몹시 화난 얼굴로 몸을 홱 돌렸다.
아빠는 나를 보고 차르니엘의 뒷모습을 보다가 낮게 혀를 차며 그를 따라나섰다.
“막냉이 혼나겠네.”
넬리아 자르단이 끌끌 혀를 찼다.
“혼나요? 아빠가요?”
“그래, 잘못하면 항상 혼이 나긴 했거든. 물론 그래 봐야 막냉이 성격상 큰오빠 속이 더 뒤집히기는 하겠지만.”
“저기…….”
머리 위로 그늘이 지는가 싶더니 누군가가 내게 다가왔다. 귀족 중 한 명인 듯했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가 인자하게 웃으며 내 시야에 맞게 몸을 낮추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어머, 바튼 남작님이시군요.”
넬리아 자르단이 부채를 착 펼치며 내 앞을 가로막았다.
“아, 오랜만에 뵙습니다. 자르단 부인, 근데 저는 공녀님께…….”
“시간이 이렇게 많은데 뭐가 그렇게 급하세요.”
넬리아 자르단이 몸을 낮춘 그의 어깨를 톡 두드렸다.
“이번에 저희 남편이 사업 건에 대해서 다시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했는데…….”
빙긋 웃은 그녀가 정말 훌륭한 말솜씨로 나를 바라보는 귀족을 낚아채 멀찍이 떨어뜨렸다.
찡긋, 슬쩍 나를 보며 윙크를 한 그녀가 아쉬움 가득한 바튼 남작과 함께 멀어졌다.
하지만, 그건 시작일 뿐이었다.
그 뒤로도 이름 모를 귀족들이 내게 성큼성큼 다가와 자기소개를 건네는 것이 아니던가.
그리고 그때마다 에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서서 순서대로 그들을 한 명씩 낚아챘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내게서 멀찍이 떨어뜨려 두기 시작했다.
‘왜…, 방계와 직계가 전원 참석했는지 알 것 같아.’
그리고 어째서 마차가 무려 열 대도 넘게 움직였는지도 말이다.
무슨 1:1 매칭 미팅도 아니고 다들 어찌나 자연스럽게 날 대신해서 귀족들을 낚아채 가는지 솔직히 놀라울 정도였다.
‘다들 나한테 오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구나…….’
이미 멸종했다고 알려진 환상의 생물 드래곤이라고 하니 다들 흥미를 보일 법도 했다.
아마 눈치만 보다가 첫 귀족이 스타트를 끊어서 다들 용기를 낸 것이 분명하다.
‘고맙네.’
나 혼자였다면 분명히 버거웠을 텐데.
누군가에게 지켜진다는 건,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있다는 건 이런 기분이었구나.
‘그러면 내가 살짝 숨어 있는 게 나으려나?’
그렇게 생각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때였다.
어딘가에서 진득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저 피부에 닿는 것만으로도 무척 불쾌해지는 시선이다.
‘…누구지?’
시선의 근원지를 찾아 두리번거리자 웬 남자 하나가 귀부인 한 명과 함께 연회장 입구 근처에서 나를 보고 있었다.
제법 말쑥하게 생긴 남자였는데, 멀어서 잘 보이진 않지만 눈 밑이 약간 퀭한 것이 어두워 보였다.
나와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았다. 그러자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손을 들어 내게 손짓했다.
마치 가까이 오라는 것처럼.
그 이유 모를 행동에 불쾌감과 의아함이 들어 미간을 막 찌푸릴 때였다.
“주인님.”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시야가 차단됐다.
새하얀 옷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고 새파란 눈동자가 그 뒤를 이었다.
“루실리온……?”
“네, 오랜만에 봬요. 주인님.”
내 시야를 가린 루실리온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연회장에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아무렇지도 않게. 아니나 다를까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애는 이번에 대신관이 됐다고 했던 그 애 아닙니까?”
“무슨 사기를 쳐서 대신관이 됐다던 그 후보생 말인가요……?”
“전 대신관이 난리였잖습니까. 게다가 수인을 전부 해방하고 겨우 2주 만에 기존 신관들의 30%를 숙청했다고 하던데…….”
“근데 왜 에탐 가문의 공녀에게 무릎을…….”
웅성거리는 소리가 푹푹 귓가에 꽂혔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민망함에 급히 루실리온의 어깨를 붙잡았다.
“일어나, 루시.”
“네.”
활짝 웃은 루실리온이 냉큼 일어나 내 옆에 섰다.
그러자 이번에는 루실리온의 뒤에서 리하르트가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뱀뱀아.”
“리하르트?”
리하르트는 조금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그대로 보내서 미안해……. 그 인형 정말 힘들게 만들었던 건데 팔다리가 소멸하면 아직 내 실력으론 되돌릴 수가 없어서.”
리하르트는 자신이 한 짓이 퍽 민망한 듯 웅얼거리며 말했다.
“인형보단 네가 더 소중한데.”
리하르트가 조심스럽게 내게 멀쩡해진 인형을 내밀었다.
“너한테 주고 싶어서 만들어 뒀던 거야.”
나는 얼떨결에 나도 본 적 없는 내 해츨링 모습을 본 딴 듯한 인형을 받아들었다.
그러자 리하르트가 나를 보며 웃었다.
“고마워, 근데 집은 괜찮아……?”
“……음.”
차마 아니라곤 못 하는 것을 보아하니 엉망이긴 한 모양이다.
그래도 아마 대부분은 마법으로 원상복구가 되긴 하겠지.
그렇다고 한들 내 입장도 민망한 건 매한가지다.
“내가 아빠보고 다 갚으라고 할게…….”
“괜찮아, 사돈 관계에 그런 게 무슨 필요가 있겠어.”
리하르트가 능구렁이처럼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내가 인상을 팍 구기며 이상한 소리를 하지 말라고 하려는 때였다.
“사돈?”
루실리온이 내게 바짝 붙으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요, 주인님.”
몸을 낮추고 서운한 표정으로 묻는 모습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너도 이상한 말 하지 말고.”
어딜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아쉽네.”
리하르트가 어깨를 으쓱이며 설핏 웃으며 입맛을 다셨다.
“어이, 네놈들은 이 몸만 빼고 재밌게도 노는군. 루실리온, 너는 이 몸이 초대했는데 나한테 인사도 안 오고 뭐 하는 거야?”
“저런, 계신 줄 몰라서.”
“……배은망덕한 놈.”
내가 으름장을 놓고 있는 도중 이번엔 2황자까지 대화에 끼어들었다.
왁자지껄 곁으로 모여든 친구들을 보고 있노라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역시 다들 저 드래곤을…….”
“현 에탐 가주도 저 드래곤에게 껌뻑 죽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저희도 빨리 줄을 대놓지 않으면…….”
“근데 드래곤의 피와 비늘을 먹으면 영생을 살 수 있다는데 정말일까요……?”
연이어 들려오는 불쾌한 말에 반사적으로 흠칫 몸이 떨렸다.
청력이 좋아진 뒤론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얘기까지 자꾸 듣게 됐다.
“굳이 우리가 여기 있을 필욘 없어 보이는데, 어때? 잠시 차나 한잔하러 가는 건.”
내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기라도 했는지 에노쉬가 정확히 나를 보며 권유했다.
아마 저 속삭임을 들은 게 아닌가 싶었다.
“좋아.”
“저도 가도 됩니까, 주인님?”
“뱀뱀아, 나도.”
“전하께서 가시면 저도 가야죠.”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루실리온과 리하르트, 그리고 어느새 합류한 릴리안이 연이어 대답했다.
“…뭔가 이상한 모임이 만들어진 것 같긴 하지만.”
에노쉬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그렇다고 한들, 사실 모두 미래에 한몫할 유력한 후보들이었다.
늘 원 바깥에 있었던 내가 지금은 이 중심에 있다는 것이 조금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랬을까?
문득, 아까 나를 지켜보며, 내게 손짓까지 했던 누군지 모를 불쾌한 시선이 떠올랐다.
불쾌하면서도 그렇게까지 낯설지만 않은 이상한 느낌의 남자가 망막에 새겨진 듯 꽤 오랜 시간 아른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