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102
“원장님!”
알비온이 힐 로즈먼트와 함께 조용히 입장하고 있었다. 내 부름에 두 사람의 시선이 모두 내게 향했다.
사실 두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내게 시선을 두고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쏟아졌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누군진 모르겠지만 오늘 일이 끝나면 아빠한테 말해야겠어.’
저 불쾌한 남자가 무언가 일을 칠 것 같았다.
“…에이린?”
“원장님, 여긴 어쩐 일이에요?”
“일전에 말했던 조카가 혼자 가기 무서우니 함께 와 달라고 해서 왔다.”
힐 로즈먼트가?
‘혼자 가기 무섭다고?’
무슨 사기를 뻔뻔하게 친 거야?
황당한 표정으로 알비온의 옆에 선 소년을 바라보았다. 제복을 차려입은 힐 로즈먼트가 나를 보며 가증스럽게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빙긋 웃어 보였다.
“여기서 만나게 되다니 너무 반가워요, 아가씨!”
힐 로즈먼트가 활짝 웃으며 다가와 내 손을 잡고 흔들었다.
‘반갑기는 개뿔이…….’
그러나 내가 누군가, 비즈니스의 민족이 아니던가. 나도 해사하게 웃으며 힐 로즈먼트의 손을 맞잡았다.
“네, 선생님! 오랜만에 봬요!”
힐긋 힐 로즈먼트의 어깨 너머를 보니 어느새 그 불쾌한 남자는 모습을 감춘 뒤였다.
“뭘 그렇게 봐요?”
힐 로즈먼트가 불쑥 내 얼굴 앞에 제 얼굴을 들이밀며 웃었다.
“아니에요.”
“에이린, 왜 혼자 있지? 보호자는?”
알비온이 미간을 설핏 찡그리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동학대를 싫어하는 사람이 여기도 있었지.
“일이 좀 생겼다고 해서 혼자 구경하고 있었어요! 원장님은 따님이 있는 곳 잘 다녀왔어요?”
“……그래, 다녀왔다. 편지도 받았고…….”
알비온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 아이는, 날 원망하지 않았더구나.”
알비온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무겁게 가라앉는 눈을 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죄송해요, 조금 더 빨리 전달했어야 했는데…….”
“네가 아니었으면 평생 몰랐을 텐데, 내가 고마워해야할 일이지.”
“그래도, 죄송해요.”
내가 제때 말만 했어도 조금 더 빨리 만날 수 있었을 텐데. 5년 전의 약속을 너무 늦게 지켜 버렸다.
미안함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자 머리 위로 알비온의 목소리가 들렸다.
“떨어졌던 가족을 만났고 죽을 뻔한 친구도 살렸다고 들었다. 그 대가로 긴 잠에 빠졌었다고도 들었고. 눈을 뜨곤 한동안 정신도 없었겠지.”
네 탓이 아니다.
그 한마디를 해 주기 위해 말수 적은 이 남자가 긴 대화를 이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우면서도 고마웠다.
“아이에겐 그럴 자격이 있지.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죽은 사람보단 살아 있는 사람이 중요한 거니까.”
알비온이 내 머리를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머리가 망가질까 봐 헝클어뜨리지 않는 것도 그의 배려일 것이다.
그때 힐 로즈먼트가 불쑥 끼어들었다.
“삼촌은 공녀님이랑 아주 친하신가 봐요.”
“예전에 잠깐 알았던 사이일 뿐이다.”
“그래요? 저보다 더 친해 보여서. 우리는 피를 나눈 가족이잖아요, 물론 오랜 시간 몰랐지만요.”
“…….”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아무도 저흴 도와주지 않아서 얼마나 힘들었는데…….”
힐 로즈먼트의 말에 알비온의 눈이 잘게 떨렸다.
그의 우울감과 죄책감을 자극하는 행동에 내가 힐 로즈먼트를 노려보았다.
“……삼촌이 있었다면, 그런 일도 없었겠죠.”
“…미안하다.”
알비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힐 로즈먼트가 보이지 않게 웃었다.
‘저, 저 싹수 노란, 성질 더러운 것.’
성격 더러운 건 알고 있었지만, 제국의 영웅까지 이용하려고 하네.
알비온이 누군진 어렵지 않게 알았을 거면서.
‘그나저나…….’
힐 로즈먼트의 뒤에서 서성이고 있는 저 애는 대체 뭐야?
아까부터 손가락을 꼼질거리며 눈치를 살피는 것이 보였다.
힐 로즈먼트가 내 시선이 닿은 곳을 깨달았는지 뒤에 있던 아이의 손목을 잡아당겨 내 앞에 세웠다.
“아가씨, 기회가 되어 소개드릴게요. 제 동생인 필 로즈먼트예요.”
“아, 아, 안녕하세요……. 필 로즈먼트라고 합니다.”
순박하고 동글동글하게 생긴 눈망울, 힐 로즈먼트와 같은 연갈색 머리카락과 힐 로즈먼트보다 옅은 연두색 눈동자.
또렷한 이목구비에 비해 동글동글한 인상은 그야말로 사슴 그 자체였다.
“에이린 에탐이에요.”
“네, 에, 에탐 영애! 혀, 형님에게 얘기는 많이 드, 들었는데요…….”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것이 연기라고 보기가 어려웠다.
‘힐 로즈먼트가 그런 허당 캐릭터를 어디서 만들었나 했더니…….’
제 동생을 보고 기출 변형한 것이었을까?
“필.”
힐 로즈먼트가 필 로즈먼트에게 어깨동무를 하는 듯하더니 필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말 질질 끌지 말라고 형이 말했잖아. 날 무시하는 거니?”
“아, 아니에요. 형님.”
알비온 눈치 봐서 작게 중얼거린다고 중얼거린 모양이지만 내겐 다 들린다.
“말했잖아, 그렇게 말해 봐야 아무도 널 좋아하지 않는다고.”
얘가 또 가스라이팅을 하네.
“원장님, 새싹의 시간은요?”
바깥에서 고아원이라고 말하긴 조금 그래서 이름을 말하자 알비온이 입을 열었다.
“딸도 만났으니 이제 곧 돌아가야지.”
“……돌아간다고요?”
내가 막 대답하려는데, 힐 로즈먼트가 말을 가로챘다.
“그래야지, 그 아이들도 날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럼 저랑 필은요?”
힐 로즈먼트의 말에 알비온의 입이 다물어졌다.
하긴, 그의 입장에선 작위도, 돈도, 명예도 있는 성인식을 치른 귀족 조카보단 아무것도 없는 고아원의 아이들에게 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러나 죄책감이 있어서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고.
사실 그가 죄책감을 느낄 필요 없는 부분이었다. 그는 귀족가에서 버려져 평민으로 자라 영웅으로 추앙받아 전쟁에 참여하느라 몰랐을 테니까.
‘힐 로즈먼트는……, 늘 사람을 바랐지.’
에서도 그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원했다.
그래서 항상 누군가를 시험했고 동생을 제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고 여주인공의 ‘각인’을 한 와이번을 원했으며, ‘널 믿는다.’라고 말했던 여주인공을 원했다.
그러나 사실 힐 로즈먼트가 소설 속에서 얻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 꽈배기처럼 배배 꼬인 인간도 이렇게 비뚤어진 이유가 있겠지.’
침묵하던 알비온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구나.”
“그럼 둘이 얘기하세요, 전 여기 로즈먼트 영식과 춤이라도 출 테니까요.”
물론, 개뻥이다.
왜냐하면 힐 로즈먼트는 나에게 댄스 수업을 제대로 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필 로즈먼트의 손을 잡고 몸을 돌려 곧장 테라스로 향했다.
“여, 여, 영애…….”
당황한 필 로즈먼트가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졸졸 쫓아오는데 곧 울 것 같은 얼굴이다.
‘이 애 진짜 유약하네…….’
새빨갛게 변한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솔직히 조금 괴롭혀 주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맨날 힐 로즈먼트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을 테니 조금 안쓰러운 마음이 더 생겼다.
“에이린이라고 편하게 불러 줄래요?”
“아, 아! 네네. 저, 저도 필이면 돼요! 말씀도 편하게 하세요.”
“그러면 사양 안 할게. 선생님이 나에 대해서 무슨 얘기를 했어?”
“아……, 멍청한 줄 알았는데 꽤 똑똑하다는 칭찬이었어요!”
그건 욕 아니야?
“그리고 사기에 재능이 있다거나…….”
그것도 욕이잖아.
“아, 목줄 채워서 키우고 싶다고도 하셨어요!”
그건 심지어 욕도 아니고 모욕이야.
내가 황당한 표정으로 필 로즈먼트를 보자 이 사슴 같은 소년은 말간 눈을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래, 저게 칭찬이라고 알고 자랐겠지…….’
누가 저런 말을 했을지 짐작이 됐다.
“말 제대로 하네? 너도 말 편하게 해.”
“아, 으응. 말은, 혀… 형님 앞에서는 조금 그래. 형님이 무서워서…….”
“음, 집을 확 나가 버리는 건 어때?”
“안 돼…. 형한텐 빚이 많으니까. 키워 준 값은 해야 하거든.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형이 아주 힘들었으니까.”
축 처진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건 이 사슴이 힐 로즈먼트에게 꽉 붙잡혀 있다는 것 정도였다.
“그래?”
“응, 우리 부모님은 아주 무섭고 또 엄하신 분들이었거든. 나는 형이 구해 주지 않을 때까진 늘 방에만 있었어. 내가 밖에 나와서 하늘을 볼 수 있었던 것도 전부 형 덕분이야.”
“…….”
깊은 사연이 느껴지는 그 말에 내가 입을 다물자 필 로즈먼트가 흠칫 놀라 내 눈치를 살피더니 뺨을 긁적이며 배시시 웃었다.
“미안해, 형이 이런 얘기는 하지 말랬는데. 비밀로 해 줄 수 있어?”
사냥꾼에게 붙잡혀 있는 순박한 사슴이 웃으며 말했다.
서툰 위로를 건네기엔 내가 아는 게 없어서 그저 고개만 끄덕이는 때였다.
뒤에서 바람이 훅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과 함께 오싹한 훈기가 스며들었다.
“……드디어 찾았다.”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나와 필 로즈먼트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순간, 몸에서 피가 싹 빠져나가는 듯했다. 어제부터 날 쫓아다니던 그 불쾌한 남자였다.
한 손에 와인잔을 든 그는 나를 보며 히죽 웃었다.
가까이서 보니 눈 밑은 한층 더 퀭하게 보였고 살짝 눈이 충혈된 것도 같았다.
내가 놀라서 바짝 굳어 있는 때였다.
“누구십니까?”
필 로즈먼트가 급히 내 앞을 가로막았다.
“뭐야? 머리에 피도 안 마르게 어린놈이 감히 어딜 막아? 내가 누군지 알아?”
“모릅니다.”
필 로즈먼트가 제법 강단 있게 대답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손끝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레이디에게 외간 남자가 함부로 접근하게 해선 안 된다고 배웠습니다.”
“허! 나는 그 애 아빠다! 당장 비켜 봐. 아빠가 자식도 만나지 못한다는 거냐?”
“아빠?”
필 로즈먼트가 반문했다.
‘아빠?’
그게 누군데? 나한테 아빠가 또 있었나?
“정말 그렇습니까, 영애?”
필 로즈먼트가 손을 떨며 물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붙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저 사람 몰라.”
나는 그를 물끄러미 보았다.
분명히 낯익은 느낌은 나지만,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불쾌한 남자가 한 걸음 다가왔다.
‘드래곤의 능력이라도 써서 빠져나가야겠다.’
또 긴 잠에 빠질까 봐 두려워서 함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빈틈을 살피며 필 로즈먼트와 한 걸음 물러났을 때였다.
콰앙-!
불쾌한 남자의 얼굴이 테라스 바닥과 거하게 부딪혔다.
“커흑!”
비참하게 엎어진 남자의 등 위로 단정한 구두 굽이 사납게 내려앉았다.
“내 장난감이 제법 많이 커서…… 이제 겁도 없이 내 딸을 노리는군.”
아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