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103
“아빠!”
“따님, 여기에서 뭐 하고 있는 거지? 다른 놈들은.”
“다들 저 도와주느라고 사람들 상대하고 있을 거예요.”
“도움이라곤 안 되는군.”
내가 어색하게 웃자 아빠의 시선이 느리게 아래로 내려갔다.
아빠의 시선을 따라 나도 고개를 돌리니 나와 필 로즈먼트가 꽉 잡고 있는 손이 보였다.
물끄러미 쏘아보는 시선에 필 로즈먼트가 슬금슬금 손을 빼고 내 뒤로 살짝 몸을 숨겼다.
“필…?”
“저 사람, 무서워…….”
“내, 아빠야.”
“……에이린 아빠는 무섭구나.”
필이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그 솔직한 평가에 절로 말문이 막혔다.
방금까지 벌벌 떨면서도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있던 소년은 사라지고 지금은 다시 유약한 필 로즈먼트만 남았다.
“도와줘서 고마워, 필.”
“아냐, 예전에 선생님이 레이디가 위험할 땐 피하면 안 된댔어.”
아마 많은 용기를 쏟았을 것이다. 그래서 더 고마웠다.
처음 만난 누군가를 지켜 주겠다고 앞장서서 위험한 상대를 막아서기란 쉽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까 고마운 거야, 필. 넌 용기 있는 사람이구나.”
내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필 로즈먼트의 눈이 새빨갛게 물들더니 이내 잘 익은 벼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내, 내, 내가 용기… 있어……?”
긴장한 듯 필 로즈먼트의 말끝이 떨렸다.
“응.”
“형님은 내가 혼자선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했는데…….”
“아냐.”
내 단호한 말에 필 로즈먼트가 뺨을 붉게 물들이곤 고개를 끄덕였다.
“형에게 자랑해야…….”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에르노 에탐, 이 망할 자식이!”
소란스러움이 한층 더 커졌다.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흩어졌던 에탐들도 하나둘 테라스 근처로 모여들다가 이내 상황을 발견하곤 동시에 이마를 짚었다.
“끄아아아악!”
불쾌한 남자의 등을 짓누르는 아빠의 발길이 한층 더 무거워진 듯 그는 뒤집힌 거북이처럼 팔다리만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내, 내가 누군지 알기나 해?!”
“알지, 내 장난감.”
에르노 에탐이 대답했다.
‘아빠 장난감?’
설마 작년에 아빠가 가지고 놀았다던 그 남색가인 척 연기한 사람인가?
“장난감?! 내가 왜 장난감이냐! 이 어린놈의 자식이, 하여튼 옛날부터 되바라진 곳이 있어서는……!”
아빠의 평가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달라져도 장소가 달라져도 똑같구나.
이쯤이면 과거의 아빠가 보고 싶다. 소설로 나왔다면 ‘공작가의 망나니 사이코패스입니다만.’ 정도가 아니었을까.
‘……근데, 저 얼굴로 아빠의 놀이 상대?’
못생긴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빠가 옆에 끼고 다닐 정도로 잘생기지도 않았는데.
‘아빠 취향이 저런 걸까?’
팔짱을 낀 내가 고심하고 있는 때였다.
“에이린.”
“네?”
“무슨 생각을 하든 그건 아니니까 그 표정은 관두렴.”
아빠의 말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내가 무슨 표정을 하고 있었지?’
흠흠.
나는 고개를 힘껏 내저으며 아빠를 보았다.
“그 사람 어제부터 절 따라다녔어요……, 누군지 아세요?”
“알지, 네…….”
“소란스럽군.”
아빠가 막 입을 열려고 할 때, 누군가 아빠의 말을 가로챘다.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테라스엔 이미 수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설마 또 사고를 친 건 아닐 테지, 에탐 공작.”
황제였다.
테라스로 들어온 황제가 바닥에 바르작거리는 바퀴벌레 같은 남자를 한 차례 내려다보더니 아빠를 보았다.
“내 귀한 따님에게 벌레가 붙었기에.”
황제의 눈이 가늘어졌다.
표정을 보아하니 그도 이 불쾌한 남자를 아는 것이 분명했다.
“가문 내의 일이니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내 연회에서 일어난 일인데 어떻게 가문의 일이 될 수 있겠나.”
“폐, 폐하! 저는 억울합니다!”
바닥에 있던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쉼 없이 버둥거리며 황제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저는 빼앗긴 제 딸을 다시 찾으러 온 것뿐입니다! 에탐 가문이 제 딸을 제게서 강제로 빼앗아 갔단 말입니다!”
그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이내 서러운 듯 눈물을 주룩주룩 흘려대기 시작했다.
한순간에 돌변한 표정에 절로 말문이 막혔다. 세상에서 가장 가련한 표정으로 불쾌한 남자가 울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는 주춤 물러나며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이 아이는…… 없이…… 자라야만…… 운명……. 드래곤은…… 죽는 일도 흔했다.”
“그래야만…… 미래가 평탄하고 행복해진다고 하니…….”
“……아픈 일이지.”
“그러니 기억해라, 이 아이는 네 아이다.”
문득 갑작스럽게 머릿속에 떠오른 목소리에 순간 가슴이 아릿했다.
머릿속에 갑작스럽게 떠오른, 또렷하지 않은 기억에 나타난 것은…….
‘저 남자잖아?’
저 남자가 어린 나를 품에 안고 있었다. 누군가가 함께 있었던 것 같은데 그건 기억이 나지 않았다.
‘설마 저 사람…….’
그 개망나니인지 뭔지 하는 내 친아빠라는 건가?
에서도 혈육 검사를 했으나 나는 그 결과를 듣지 못하고 쫓겨났었다.
에서는 마일라와 함께 유물을 도둑질하다가 쫓겨났었고 지금은 저 개망나니가 계속 도망을 다닌 터라 아예 혈육 검사를 해 보지도 못했다.
나는 내가 도마뱀 수인이라고 생각해서 이 가문의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나는 드래곤이었잖아?’
그렇다면, 나 역시 이 에탐 가문의 진짜 일원일 확률도 분명히 있었다.
드래곤의 피가 흐르는 건 이 가문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들었으니까.
‘그럼 저게 진짜 내 친아빠라고?’
나는 물끄러미 불쾌한 남자를 보았다.
왜 낯익은 느낌이 났는지는 알겠다. 내 기억에는 없지만, 내가 어릴 때 만났던 사람이었기 때문일 거다.
“그 말이 정말인가, 에탐 공작?”
“모릅니다.”
아빠가 대답했다.
나는 한참이나 바닥에서 버둥거리는 한심한 남자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아빠는 나를 보고 있었다. 표정은 언제나와 같은데, 왜 초조하게만 보이는 걸까?
“에탐 공작, 나는 그대가 아이를 입양하겠다고 해서 그렇게 하라고 했지. 하지만 친부가 있었다면…….”
“저는, 지금 이 개망나니가 내 딸의 친부인지 아닌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아빠의 대답에 사방에서 웅성거림이 심해졌다.
“아닙니다! 저 아이는 분명히 제 아이입니다! 힘들게 낳은 아이란 말입니다!”
설령 네가 내 아빠라고 한들 네가 날 낳았겠냐?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가 날 낳았겠지.
말하는 것부터 정이 안 가는 남자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럼 잘되었군. 여기에 마침 새로 취임한 대신관이 있지 않나? 혈육 검사의 권한은 대신관에게 있지. 어떤가? 여기서 판가름을 해 보는 것은.”
“저는 상관없습니다.”
황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루실리온이 인파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며 말했다.
“저도! 저도 상관없습니다! 폐하!”
여전히 아빠 발밑에 깔린 개망나니가 급히 손을 들며 말했다. 황제의 시선이 아빠에게 돌아갔다.
아빠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에탐 공작은 어떻게 생각하지?”
“…….”
아빠는 드물게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고는 곧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빠가 짧은 한숨과 함께 개망나니의 등에서 발을 내리며 말했다.
“……저도 괜찮습니다.”
“그럼 바로 진행해 보도록 하지.”
루실리온이 웃는 낯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는 아주 작은 바늘로 내 검지 끝을 살짝 찔렀다.
동그란 피가 몽글몽글 솟아났다.
그러고는 곧장 아빠에게 다가가더니 아빠 앞에서 손을 내밀었다.
‘아빠는 왜?’
개망나니랑 나랑 하는 거 아니었어? 아빠도 이상하게 생각했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아니라 이것과 하는 거다.”
아빠가 개망나니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알고 있습니다. 혹시 모르니 세 사람을 동시에 진행해 보려고 합니다.”
“혹시 모르다니…….”
아빠는 말을 끝까지 잇지 않았지만,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진 알 것 같았다.
내가 아빠에게 입양되었다고 한들 내가 친자식이 될 순 없었다. 아빠의 친자식은 칼란 에탐과 실리안 에탐뿐이니까.
그러니까 아마, 내가 이 검사에서 친딸로 나올 확률은 없다는 걸 말하려고 했겠지.
“신께서…….”
멍하니 중얼거리며 하늘을 잠깐 올려다본 루실리온이 이내 눈꼬리를 예쁘게 접으며 웃었다.
“그러라고 하시는군요.”
세상에 제 호기심과 욕심에 신을 팔아먹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야, 루실리온.
“미쳤군.”
아빠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 주더니 손을 내밀었다. 루실리온이 아빠의 중지에 바늘을 푹 찔렀다.
피가 몽글몽글 솟다 못해 살짝 흘러내릴 지경이었다. 아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저런, 바늘이 효용을 다했나 보네요.”
아빠의 손가락에 상처를 낸 루실리온이 몸을 빙글 돌렸다. 그러더니 빙긋 웃으며 방금까지 멀쩡했으나 어느새 부식된 바늘을 보여 주었다.
“하는 수 없군요.”
여상하게 말한 루실리온은 어디서 났는지 단검 하나를 꺼내 보였다.
“뭐, 뭐 하는 거야! 다른 바늘을 가져오면 되잖…… 커흑!”
아빠가 눈치 빠르게 개망나니의 등을 짓밟아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호흡이 착착 맞는데…….’
나는 황당한 얼굴로 두 사람을 보았다.
“다 신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신 그렇게 팔아먹지 말라고.
루실리온은 해사한 얼굴로 개망나니의 손 하나를 힘주어 누르더니 단검을 움직였다.
서걱거리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개망나니의 손바닥에 긴 줄이 생겼다.
“끄아아악!”
“그거 아십니까? 저는 제 시간과 능력을 쓸데없이 낭비하는 걸, 아주 싫어합니다.”
루실리온이 생긋 웃으며 개망나니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놀랍게도 내 귀에는 전부 들렸지만.
“그럼 시작해 보겠습니다.”
루실리온이 단검을 던져 버리고 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 허공으로 날아간 단검이 순식간에 빛무리와 함께 사라졌다.
루실리온이 무언가 알 수 없는 언어를 중얼거리기 시작하자, 내 손끝에 난 피와 아빠 손끝에 난 피, 그리고 개망나니의 콸콸 쏟아지는 피가 허공에 솟았다.
‘이건 정말 조작도 불가능하겠네.’
숨길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그의 새하얀 신력과 내 피가 반으로 쪼개져 뒤섞였다.
피와 신력이 완전히 섞이게 되자 새빨갰던 피가 무색투명하게 반짝였다.
그러자 곧 두 개로 나뉜 덩어리 중 하나가 이내 개망나니의 피에 뒤섞였다.
아니, 정확히는 뒤섞이려고 했다.
파지직-!
그러나 개망나니의 피에 뒤섞인 내 피는 스파크를 일으키더니 이윽고 퍽 하고 터져 버렸다.
개망나니의 얼굴이 제 피로 범벅이 되었다.
“어……?”
“이건 거부반응입니다. 혈육일 경우 피가 아주 잘 섞이면서 황금빛으로 빛나거든요.”
루실리온이 설명했다.
“그러니 일단 이쪽은 주인… 아니, 공녀님의 진짜 아버지가 아닌 모양입니다.”
그 순간이었다.
개망나니가 이를 악물고 몸을 버둥거리다 아빠의 발밑에서 간신히 벗어나 벌떡 일어났다.
“개소리하지 마! 나는 뭐라고 해도 저 애의 아빠라고! 네놈들이 다 짜고 치는 거야! 짜고 치는 거라고!”
개망나니가 희번덕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아가, 아빠가 당하고 있잖아! 당장 아빠를 도와줘야지! 아빠 죽는 꼴 보고 싶어? 당장 저것들을 전부 죽이라고!”
그가 내게 소리치며 말했다.
사위가 고요해진 순간이었다. 거대한 바위만큼 커다란 물방울이 개망나니의 머리 위로 툭 떨어졌다.
촤아악-!
철푸덕-!
내가 만들어 낸 물이 쏟아져 개망나니를 바닥에 엎어지게 했다.
“뭐래, 이 사기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