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107
“그렇구나.”
아빠는 이미 예상한 사람처럼 담담하게 내게 입을 열었다. 도리어 그 반응에 더 입이 꾹 닫힌 건 내 쪽이었다.
그는 담담한 낯으로 내 뺨을 가볍게 쓰다듬더니 이내 다시 입을 열어 왔다.
“솔직하게 대답해 줘서 고맙구나.”
“……화나지 않아요?”
“누구나 숨기는 건 있는 법이잖니.”
“…아빠는,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믿어 주실 건가요?”
“부모가 자식을 믿지 않으면, 누구를 믿겠니.”
그 다정하면서도 평생 듣지 못했던, 그리고 늘 듣고 싶었던 말에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목구멍이 벌어지는 듯, 빠듯하게 아픈 기분에 나는 억지로 눈꼬리를 휘어 가며 웃어야 했다.
“사실 저…….”
나는 주먹을 몇 차례 쥐었다 폈다.
“전생의 기억이 있어요…….”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나도 모르게 옷자락을 쥐고 있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전생의 기억……?”
아빠 역시 그답지 않게 조금 당황한 표정이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여 보였다.
믿기 어려운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믿어 주기를 바라며 나는 마저 입을 열었다.
“거짓말이 아니에요. 제가 사실은 이곳과 다른 세계에서 어른이 됐었는데……, 어쩌다 보니 여기에 있었어요.”
차마 소설을 읽다가 들어왔던 것 같다고 말하진 못했다. 이 세계가 사실 소설일지도 모른다는 것도 말할 수 없었다.
‘기억으론 소설을 읽다가 들어온 것 같은데 그게 확실하진 않으니.’
어떻게 이 세계에 오게 됐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제가 만약에 거기서 죽지 않고 여기서 다시 태어난 거라서…… 그래서 검사 결과가 이상하게 나온 게 아닐까요……?”
말을 끝맺을수록 내 목소리는 점차 작아졌다.
아빠가 놀란 듯 굳어 있기도 했거니와 나도 이런 기이한 현상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이 정상처럼 느껴지지 않았던 탓이다.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네가 거짓말을 하지 않은 건 안다.”
나를 보던 아빠가 단호하게 말했다.
“조금 놀라서 그래. 그런 일이 있다곤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그는 나를 품에 안은 채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벤치 의자에 앉아 나를 무릎에 앉혔다.
“그랬구나.”
아빠가 내 머리카락을 슥슥 쓰다듬었다.
“그래서 그렇게 똑똑했구나.”
아빠가 설핏 웃으며 내 머리카락을 슥슥 쓰다듬었다.
“이제야 조금 너에 대해 알게 된 것 같구나.”
아빠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한참이나 내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토닥이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없었다.
“꿈을 꾼 적은 없니?”
“꿈이요?”
“그래, 네가 전생에 살았던 저 세계의 꿈.”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곤 고개를 내저었다. 무언가 꿈을 꾸지만, 눈을 뜨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잘 모르겠어요, 꿈을 꾸긴 꾸는데 기억이 나진 않아요.”
그러니 그게 내가 푸딩 속을 헤엄치는 꿈인지, 전에 살던 세계의 꿈을 꾸는 건지도 불확실했다.
“에이린.”
“네?”
“네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네가 그 꿈을 감당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거겠지.”
예상치도 못한 아빠의 말에 눈이 절로 동그래졌다.
“그러니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 거라. 언젠가 네가 감당할 때가 올 거야.”
다정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뺨을 비비고 있으니 기분이 좋았다.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너는 내 딸이니까.”
감당하기 싫어도 감당할 때는 반드시 오게 될 테니, 벌써부터 초조해하지 말라고 덧붙인 아빠가 나를 안고 일어났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내게도 꼭 말해 주렴.”
“……네.”
아빠가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곤 느긋하게 식당으로 향했다.
연회는 막 3일 차를 맞이한 후였다.
* * *
결과만 말하자면, 나는 3일 차 연회에 참석하고 4일 차 연회엔 불참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마지막 연회 날이었다.
그동안 나는 에탐들의 도움을 받아서 꽤 많은 귀족의 얼굴을 익힐 수 있었다.
그리고…….
‘지쳐, 돌아가고 싶어.’
한동안은 연회엔 얼굴도 들이밀고 싶지 않았다. 아빠는 이번이 특수한 경우라고 했으니까 다행인 일이지만.
칼란과 실리안을 비롯해 몇몇 에탐들은 3일 차부턴 참석하지 않았다. 듣자 하니 하타르 쪽에 뭔가 유의미한 성과가 생긴 모양이었다.
넓게 쳐 둔 거미줄이 살짝 흔들린 것이 분명했다.
‘5일 차가 되니까 그래도 그 바글바글한 귀족들도 많이 없어졌네.’
게다가 에탐들이 워낙 철벽을 치고 내게 다가오지 못하게 해서 그런지 3일 차부턴 내게 접근하는 귀족도 거의 없었다.
“다 좋은데 심심하네.”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에탐 영애?”
테라스에나 갈까 고민하고 있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고개를 돌리자 필 로즈먼트였다.
“……필?”
“네, 호… 혹시 시간이 될까?”
필 로즈먼트가 뺨을 붉히며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수줍게 물었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소년이 저렇게 있으니 어쩐지 귀엽게 보였다.
‘이 세상에도 정상이 아직 남아 있구나.’
괜스레 흐뭇함과 뿌듯함이 느껴졌다.
“물론이야.”
심심했는데 마침 잘됐다!
“어제는 나오지 않았던데…….”
“응, 너무 피곤해서 못 가겠다고 했어.”
3일 연속 피곤함에 절어 있었던 터라 4일 차엔 신물이 올라올 것 같았다.
“그렇구나…….”
“왜? 나 찾았어?”
“응, 너랑 얘기해 보고 싶었거든.”
“어떤 걸?”
“그……, 너도 내 삼촌 봤지?”
필 로즈먼트가 환하게 웃으며 조금은 부끄럽다는 듯 물었다.
“응.”
나는 알비온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삼촌이 좋아. 나… 어릴 때부터 가족이 없었거든.”
필 로즈먼트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부모님이 일찍 죽고 형이랑 나 둘이서 살았으니까 어른인 보호자가 없었거든. 우리 주변에 온 사람들은 다 돈을 노리는 사람뿐이었어.”
그래서 형이 아주 싫어했다고 필 로즈먼트가 작게 웅얼거렸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뺨을 발갛게 붉힌 필 로즈먼트가 마저 입을 열었다.
“형도 말은 안 하지만 조금 기쁜 것 같아…….”
힐 로즈먼트가?
설마,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던데.
‘아닌가?’
알비온이 돌아간다고 했을 때 가스라이팅을 했던 걸 생각하면 은연중에 그걸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삼촌을 어떻게 하면 떠나보내지 않을 수 있을지 궁금해……. 너는 가족이 많아 보여서…….”
그래서 도움을 청하러 왔다고 속삭이는 필 로즈먼트의 얼굴은 아주 조금 기대감이 섞여 있었다.
“원장님은 돌아갈 곳이 있어서 돌아가는 거라서……. 보육원에 원장님을 기다리는 아이들이 아주 많아.”
“……하지만, 우리는 정말 피가 섞였잖아.”
그건 그렇긴 한데…….
“어떻게 안 되는 걸까? 이러다가 형이 삼촌을 죽일 수도 있어.”
“아마 쉽게 죽지 않을…….”
……거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약간 의구심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알비온은 늘 아이들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왔다.
‘설령 딸의 무덤을 찾았더라도 쉽게 성격이 바뀌진 않았겠지.’
그 말은 힐 로즈먼트의 속셈을 알면서도 죽어 줄 확률이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안 될 말이다.
살려야 한다.
나는 급히 머리를 굴렸다.
“어… 돌아갈 이유를 없애면 되지 않을까?”
내 말에 필 로즈먼트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손뼉을 쳤다.
“그렇구나.”
“아예 없애라는 게 아니라 그 보육원을 수도로 옮겨 주거나… 아이들에게 좋은 집안으로 입양 갈 수 있게 해 주거나 그런 것들 있잖아.”
어쩐지 이대로 필 로즈먼트가 이 말을 힐 로즈먼트에게 전달하면 그 순간, 그 고아원이 의문의 폭발 사고에 휩쓸릴 것만 같았다.
“원장님은 고아원 아이들을 중요하게 생각하니까…….”
혹시 모를 위험성을 없애기 위해 급히 말도 덧붙였다.
“응, 조언해 줘서 고마워! 형님께 말씀을…….”
“엥? 뭐야, 말 병X 고아 새끼가 여기에 있네?”
뒤쪽에서 들린 저급하고 상스러운 말에 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필 로즈먼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야, 여기 봐. 시골 촌놈 왔다. 으, 어디서 냄새나는 거 같지 않냐?”
세상에 어디를 가든 저열하고 비겁한 사람은 존재하는구나.
“영애, 그런 놈이랑 있으면 병 옮을걸요?”
“맞아요, 저희와 노시는 건 어떠세요? 최신 유행이나 재밌는 놀이도 많이 알거든요.”
얘네는 알까.
이 멘트가 구식 중에서도 곰팡이가 피다 못해 썩어 버린 구식이라는 것을.
적어도 내게는 말이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나는 걸어 오는 시비를 딱히 피하는 편은 아니었다.
남동생들이 얽히면, 입을 다물고 몸을 사려야 했지만 그게 아니라면…….
“필, 어디서 생선 썩은 내 안 나?”
구태여 참을 필요는 없지.
“어? 아, 안 나는 거 같은데…….”
순진한 필의 말에 나는 도리어 활짝 웃었다. 그러자 날 보고 있던 영식 무리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멍청하긴, 레이디가 하는 말은 다 맞는 거야.”
“그래, 그리고 실제로도 나잖아? 네 몸뚱어리에서.”
킥킥 웃어 대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청소년들을 보고 있으려니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영애, 저희는 영애가 아주 마음에 들었어요. 함께하지 않으시겠어요?”
부모님이 시켰다는 건 알겠다. 어떻게든 나와 연을 터 보라고 했겠지.
“야.”
“네…? 저, 저희요?”
“응.”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영식들이 의아한 낯으로 나를 보았다.
“너희 입에서 나잖아. 생선 썩은 내. 나한테 말 걸지 마, 멍청이들아.”
나는 예전부터 정말로 학교폭력이 싫었다. 사교계 폭력도 좋아하진 않고.
“난 나보다 멍청한 애들이랑 대화 안 해.”
나는 필 로즈먼트의 손을 잡고 테라스를 나섰다.
“문 잠그는 것 좀 도와줄래?”
“어? 물론이지.”
필 로즈먼트가 테라스 문을 꽉 잠갔다.
“여, 영애?!”
“나 마음에 든댔지?”
“네? 네…….”
“그럼 그것도 맘에 들겠네.”
나는 활짝 웃으며 상상했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는 허공 위에 먹구름 같은 것이 생겨나는 듯하더니 이내 무언가가 후두두둑 떨어졌다.
“흐, 흐아아악!”
“끄아아악! 지, 징그러워!!”
“이, 이게 뭐야. 비켜! 다 비…… 엌! 이베 드러……!”
수백 마리의 도마뱀이 비처럼 내려와 놈들의 몸에 들러붙으며 테라스 바닥에 산처럼 쌓이기 시작했다.
“에이린, 너 용사님 같았어!”
필 로즈먼트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했다. 필의 뺨이 한층 더 붉어져 있었다.
즐거운 연회의 피날레였다.
* * *
그리고 다음 날, 우리가 만든 가짜 하타르가 진짜처럼 본격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