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108
하타르.
칼란 에탐이 밝혀낸 사실에 따르면, 이 액체는 생각보다도 훨씬 더 질이 좋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마시면 각종 신경계를 천천히 자극해서 자꾸 액체가 생각나게 하고 결국은 중독시키며 더 많은 양을 요구하게 해서 결국은 금단증상이 심각해져 죽게 만드는 액체.
뿐만 아니라, 장기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줘서 산 채로 사람을 내장부터 썩게 한다고 했다.
“어쨌든 네가 미리 알아내서 다행이야, 이게 나라에 퍼졌으면 어떻게 됐을지.”
칼란이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씩 웃으며 쿠키를 오독오독 씹어먹는 칼란은 여전히 어린애 같은 면모가 있었다.
‘하긴 아직 열여섯 살이긴 하지.’
나는 대체 언제 자라려나.
곱씹어 보니 어쩐지 조금 까마득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도 옛날보다는 훨씬 낫다.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드니까.’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히죽히죽 웃고 있으려니 칼란이 조용히 내 이마에 손을 얹었다.
“……뭐 해?”
“어? 아니, 어디 아픈가 해서. 갑자기 이상하게 웃기에…….”
그가 내 눈치를 살피며 혀가 아릴 것처럼 진하게 탄 핫초코를 홀짝홀짝 마셨다.
‘저런 걸 어떻게 먹는지 모르겠어.’
단 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는데 저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기는커녕 하늘로 솟아오를 것 같았다.
“너는 그 이상한 걸 어떻게 먹는지 항상 궁금해.”
나는 야금야금 떠먹던 푸딩이 담긴 수저를 입에 와앙, 물며 고개를 기울였다.
“……넌 좀, 그렇게 안 하면 안 돼?”
“뭘?”
뜬금없는 말에 슬쩍 수저를 내리자 어느새 벌겋게 물든 낯의 칼란 에탐이 내게 삿대질을 했다.
“그 표정! 그 눈! 그 살짝 기울어진 애매한 고개 각도!”
“……어?”
“지금도 소파를 부수고 싶었다고!”
“…….”
주접도 이런 주접이 없다.
최근 여러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이 있다면…….
아주 민망하고 아주 부끄럽고 솔직히 입 밖으로 꺼내기 약간 괴로운 면이 있지만…….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사랑받고 있었다. 칼란 에탐의 저 서툴고 어색한 말도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왜냐면…….
“진짜 어떻게 아버지한테서 이런 솜털 같은 애가 나왔지?”
“솜털 같다니…….”
“너! 내 방에 네 인형이 몇 개인지 알아? 내가 나이가 몇인데!”
예전에 내가 이런 식으로 여주인공을 좋아했던 것도 같기 때문이다.
칼란 에탐은 인형을 모으는 스스로가 퍽 억울하다는 듯 소파 쿠션을 끌어안고 툴툴거렸다.
그러나 나를 보는 시선엔 분명히 애정이 있었다. 전생의 남매 같지도 않던 그놈들과는 다르게 말이다.
“근데 나 궁금했는데 에이린, 너는 그 하타르를 퍼뜨린 범인을 잡으면 어떻게 할 생각이야?”
나는 팔짱을 끼곤 고개를 기울였다.
어쩌기는,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아득바득 뜯어내야지. 그걸 실행할 사람은 내가 아니겠지만 말이다.
이 범인 잡기는 딱히 어떤 생각이 있어서 시작한 일은 아니다. 그냥, 내 일상이 편안했으면 좋겠고 내 주변 사람들이 평화로웠으면 했을 뿐이니까.
‘그러게 대체 왜 하타르를 퍼뜨렸지? 대체 왜 기억이 안 나는지 모르겠네.’
어떤 나라에서 이 하타르를 풀었는지 명확히 떠오르진 않았다.
‘하타르를 풀어서 이득을 보는 사람이 있어야 할 텐데.’
내가 푸딩을 오물오물 퍼먹으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칼란 에탐이 자리를 옮기더니 내 옆자리에 턱 앉았다.
“맛있냐?”
“웅.”
“한 입만 줘 봐.”
칼란 에탐이 입을 떡 벌렸다. 그의 뻔뻔함에 눈을 가늘게 뜨자 칼란 에탐이 시선을 슬쩍 피했다.
내가 푸딩을 한 스푼 떠서 내밀자 칼란 에탐이 냉큼 입에 넣더니 대번에 얼굴을 구겼다.
“으, 식감이 기분 나빠.”
푸딩도 싫어하면서 왜 뺏어 먹는지 모르겠네. 나는 불만스러운 낯으로 그를 흘겨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까 내 친아빠…인 줄 알았던 사람은 어디에 있어?”
“아아…, 그 개망나니?”
“응.”
“왜?”
“생각해 보니까 뭔가 독특한 냄새가 났던 것 같아서.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묵직한 우드향이 나면서도 묘하게 달콤한 냄새가 섞여 있는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냄새였다. 설핏 풀 냄새도 섞여 있었던 것도 같고.
“보고서 가져다줄까?”
“있어?”
“뭐, 개망나니가 방계이긴 해도 어쨌든 에탐 가문의 사람이니까 보고서 정도는 올라왔지.”
“오라버니한테?”
“아니, 아버지 책상에서 봤어.”
칼란 에탐이 짓궂은 악동처럼 씩 웃었다. 그가 뭔가를 작게 읊조리자 허공에서 종이가 생겨나더니 팔랑팔랑 내 손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훔쳐 온 거야?”
“설마, 베껴 온 거지.”
칼란이 당당하게 말했다.
훔치나 베끼나 무슨 차이가 그렇게 큰가 싶기는 하지만…….
“잘했지?”
소년이 눈을 반짝이며 상체를 살짝 숙였다. 부쩍 낮아진 머리를 보던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고마워, 오라버니.”
“천만에.”
칼란 에탐이 만족스레 웃으며 물러났다.
나는 천천히 보고서를 읽어 내려갔다. 횡설수설 말을 더듬는다든지, 나를 보고 싶어 한다든지 이야기는 여럿 있었다.
하지만, 따지자면 그건 솔직히 내 알 바는 아니었다.
‘도대체 날 이 개망나니한테 준 사람은 누굴까?’
어렴풋이 떠오른 기억에서 갓난아기였던 나를 개망나니에게 넘긴 사람이 보였다.
그러나 그때 상황이 어땠는지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선명하게 생각나지 않았다.
천천히 보고서를 읽어 내려가는데 문득 눈에 들어오는 내용이 몇 줄인가 있었다.
소지품과 특이사항에 관한 내용이었다. 내 눈이 한결 가느다래졌다.
‘시가……. 그리고 중독 증상?’
묘하게 꺼림칙한 연관성이다. 따로따로 두고 보면 사실 개망나니라는 인물에게 아주 어울리는 내용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나는 이 두 가지가 모호하게 얽혀 있는 사건을 하나 알고 있었다.
[앳되어 보이는 남자로 왼쪽 눈 위에 상처가 있다는 외형 정보를 제외하면 자세한 건 저도 몰라요. 특이한 시가를 좋아한다곤 하는데, 직접 제작하는 건지 시중에 유통되는 건 아니었고요.]문득 떠오르는 힐 로즈먼트의 말에 나는 천천히 종이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오라버니.”
“응?”
“혹시 이 사람이 중독됐다는 거 하타르가 아닌지 알아봐 줄 수 있어?”
“물론이지.”
칼란 에탐이 씩 웃으며 핫초코를 단숨에 마시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가 도와달라고 하면 나는 얼마든지 도와줄 거야. 그러니까 참지 말고 생각하지 말고 언제든 말해 줘.”
다정한 말에 절로 입가에 힘이 풀렸다. 나도 모르게 눈꼬리를 휘었다.
늘 생각하지만, 이 사람들은 너무 다정하다. 그래서 더 지켜 주고 싶고 더 잃고 싶지 않았다.
“응, 오라버니도 사고 치지 말고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말해.”
“그럴게.”
칼란 에탐이 손을 흔들며 냉큼 응접실에서 나갔다. 나는 찌뿌둥한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려던 일도 다 마쳤으니…….
“오늘은 외출이다!”
나는 도도도 달려 쫄래쫄래 방으로 돌아갔다. 방에는 언제나처럼 로랑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아가씨!”
“로랑! 나 이제 나가려고.”
“공자님과는 잘 대화하셨나요?”
“응, 내가 도와달라고 했더니 도와준대.”
그 사실이 조금 기뻐서 신이나 말하자 로랑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이 로랑도 있다는 걸 잊지 말아 주세요! 그럼 저도 있는 힘껏 준비 도와드리겠습니다!”
“응, 잘 부탁해!”
“수도 시장의 상점가에 가신다고 하셨죠?”
“응.”
내가 의자에서 달랑거리는 다리를 흔들며 대답하자 로랑이 내 머리를 조심스럽게 만지며 입을 열었다.
“근데 상점가는 왜 가시려고요?”
“선물 사러!”
내 말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선물이요?”
“응.”
내가 히죽 웃자 머리 정돈을 마친 로랑이 내 뺨을 가볍게 쓸어 주더니 마주 웃었다.
로랑은 내 옷을 열심히 만져 주고는 기운찬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저도 얼른 채비하고 올게요. 호위 기사분도 데리고 올게요. 이오나 경과 아담 경이면 될까요?”
“응.”
이오나와 아담은 아예 내 전담 호위를 맡고 있었다.
저택은 안전하니까 호위하진 않지만, 이 저택 건물을 나가는 순간부터는 설령 에탐 가문 부지 내라고 할지라도 두 기사가 나를 따랐다.
“돈도 챙겼고.”
나는 두둑한 지갑을 내려다보며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가 준 검은 호랑이 모양의 동전 주머니였다. 금화를 가득 채웠더니 호랑이 얼굴이 울룩불룩했다.
고개를 돌리자 침대 위에 잘 앉아 있는 호랑이 인형이 보였다. 최근엔 영 신경 써 주지 못한 것 같아서 미안할 따름이다.
“음. 너도 나갈래?”
슬쩍 다가가 물었다. 당연히 인형에게 한 물음이니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지만.
“흠흠.”
약간 민망해져서 헛기침을 몇 번 하다가 슬쩍 인형을 품에 안았다.
“그거 알아? 네가 내 첫 장난감이야.”
처음 선물 받은, 소중한 인형.
물론 진짜로 처음 받은 건 중간에 가출하면서 잃어버린 터라 이건 새로 받은 것이었다.
“그래도 이제 안 잃어버릴게.”
품에 꽉 끌어안으며 침대에 앉아 발을 구르고 있으니 이내 로랑이 도착했다.
그녀와 함께 계단을 내려가니 아담과 처음 보는 기사가 내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아가씨, 외출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응.”
“일전에 함께했던 이오나 경은 오늘 다른 일이 있어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다른 기사를 데리고 왔습니다.”
아담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고 고개를 돌리자 뺨에 상처가 난 무뚝뚝해 보이는 표정의 잘생긴 남자가 서 있었다.
이 남자도 꽤 무뚝뚝해 보인다.
‘기사들은 다 무뚝뚝한 걸까?’
막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와아, 처음 뵙겠습니다! 아가씨. 이스터라고 합니다. 오늘은 제가 모시겠습니다.”
기사가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동시에 내가 생각했던 이미지가 와장창 깨졌다.
노란 머리카락의 기사, 이스터는 허리를 낮춰 내 손등에 입을 맞추곤 씩 웃었다.
“오, 아름다운 시녀분도 함께이시군요. 어떤 위험에서든 지켜드리겠습니다, 레이디.”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주 자연스럽게 로랑에게 추파를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