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114
“…….”
“…….”
내려앉은 적막 사이로 누구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범인이 이런 꼴로 왔는데…….’
대체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아빠?”
“왜, 따님.”
어딘가 상쾌한 얼굴의 아빠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속옷만 입고 로브를 얼기설기 상체에 두른 채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람의 형상을 한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머리 위로 쫑긋 솟아난 귀는 축 늘어져 잘게 떨리고 있었고 바닥에 늘어진 세 개의 꼬리는 바짝 움츠러들어 있었다.
남자의 얼굴은 푸르딩딩하게 물들어 두 배로 커져 있었다.
“수인…이네요……?”
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 나는 시장을 돌아다니다가 문득 코끝에서 냄새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행히 다시 인간화를 할 수 있었다.
“그렇더구나.”
“아…….”
수인이었구나.
다 좋은데 이 사람, 대화는 가능한 걸까?
죽지는 않은 것 같긴 한데 잔뜩 부푼 얼굴에선 표정조차 알 수가 없었다.
“간히 내가 누궁 줄 아르구……!”
탁-
아빠의 검집이 가볍게 탁자를 두드리는 순간 남자의 몸이 애처로울 정도로 파드득 떨렸다.
발음이 줄줄 새던 것도 냉큼 조용해졌다.
‘여우…인가?’
푸른빛이 도는 여우 꼬리가 세 개, 그리고 쫑긋 솟은 귀도 물빛의 털을 가지고 있었다.
퉁퉁 부은 눈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는 녹갈색이었다.
“사과, 안 하나?”
부드러운 목소리가 내려앉는 것과 동시에 귀가 바짝 죽어버렸다.
“……죄, 죄송합니다.”
“아니…….”
근데 범인이 이렇게 쉽게 잡혀도 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왜 그랬대요?”
“글쎄, 그건 말하지 않더구나. 차분히 가서 심문해 보면 될 일이지.”
빙긋 웃는 아빠의 표정은 내가 봐도 무서웠다.
굉장히 젊어 보이는 남자인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 냄새, 이상한 거죠?”
남자는 입을 벌리기도 힘겨워 보이는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이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 남자를 치료해 주면 좋겠어.’
나는 눈을 감은 채 생각했다.
손끝에서 새하얀 마력이 뻗어 나와 순식간에 남자를 감쌌다. 남자의 눈이 커졌다.
그가 제 뺨을 몇 번 어루만지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별거 아닙니다. 인간화를 오래 하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마나가 뭉치는 증상이 있는데, 그걸 완화해 주는 것뿐이죠.”
“완화?”
“어린 수인에겐 조금 독해서 종종 수인화가 풀리는 일도 있긴 합니다.”
위험한 건 아니라며 덧붙이는 목소리는 딱히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근데 진짜 왜 그랬어요?”
“…….”
남자는 냉큼 입을 다물었다.
나는 허탈하게 잡힌 범인을 바라보았다. 하긴, 아빠 능력에 사실 특정된 범인을 잡지 못할 리는 없겠지.
‘괜히 세계관 강자가 아니니까.’
내가 가만히 남자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남자도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정말 드래곤이군요.”
“가짠 줄 알았어요?”
“그건 아니지만, 봐도 믿기지 않는 건 사실이네요.”
남자가 솔직하게 말했다.
그는 정말로 신기한 전설 속 생물을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우린 당신이 필요했습니다.”
“내가, 왜요?”
“…….”
남자는 또다시 입을 다물었다.
아빠한테 이렇게 맞고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는 건 그만큼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는 거겠지.
“하타르는 왜 뿌렸어요?”
“제국과 전쟁을 하려고 했겠지.”
대답은 아빠에게서 나왔다. 갑자기 전쟁을? 현대에서 살던 내게는 조금 먼 나라의 이야기 같았다.
남자는 입을 꾹 다문 채 여전히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렇게 얻어맞고도 자세를 꼿꼿하게 세운 채 말을 아끼는 것이 조금 놀라울 정도였다.
‘의리는 있는 사람인가?’
척 보기에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물론 좋은 사람이냐고 한다면 확신은 없고.
‘뒤에 누군가가 있는 건 확실하네.’
일단 이 사람이 진짜 ‘머리’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너무 싱겁게 잡히긴 했다.
그때였다.
“윽…….”
갑작스럽게 남자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배를 끌어안았다.
욱, 욱…….
그러더니 갑자기 입을 막고 헛구역질하기 시작했다. 내가 당황한 낯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가 무언가를 입에서 뱉어냈다.
“그거 아십니까?”
살짝 창백해진 낯의 그가 빙긋 웃었다.
“여우에겐 소원 구슬이라는 게 있다는 거.”
남자의 녹갈색 눈동자가 언뜻 다감하게 휘어졌다. 아빠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당신이랑 꽤 비슷하지요? 드래곤 아가씨. 드래곤에게도 구슬이 있으니까요.”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세상이 멈췄다.
아빠가 멈췄고 칼란과 실리안의 움직임이 멈췄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게.
“역시 당신에겐 효과가 없네요. 드래곤의 하위 호환의 힘이라 그런 걸까요?”
“……아빠?”
내가 아빠의 옷자락을 붙잡고 흔들었다. 그러나 아빠는 반응이 없었다.
“아빠! 칼란, 실리안!”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다.
정말 석상처럼 굳은 것 같았다.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드래곤도 결국은 마력이 원천. 당신이 해츨링이 아니었다면 생각지도 못할 방법이었겠지만…….”
남자는 무언가 팔찌 같은 것을 꺼내 들고 내게 다가왔다.
“싫어…….”
내 가족을 더 뺏기고 싶지 않아. 내 소중한 가족인데. 내가 지켜주지 않으면, 안 돼.
나는 다가오는 남자를 보며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메아리치듯 울려 퍼졌다. 내가 말하고 있는데 나도 모르는 언어가 입술을 타고 흘러나온다.
나도 모르는 언어인데,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만 같은 언어이기도 했다.
참 기이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어쨌든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남자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설마…….”
남자는 몸을 움직이려고 노력하는 모양이었으나 쉽게 되지 않는 듯 당황한 기색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어쩐지 이 사람을 아주 손쉽게 막을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손끝에서부터 피가 싸하게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대체 어떻게 용언을…….”
그의 말은 끝까지 맺어지지 못했다.
그는 마치 누군가에게 조종이라도 당하는 사람처럼 움직이더니 순식간에 아빠와 형제들을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내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가 구슬을 꽉 쥔 채 숨을 삼켰다. 흔들리는 시선과 꽉 깨문 이를 보아하니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삐걱거리며 앞으로 걸어와 무릎을 꿇고 내 손에 구슬을 올려두었다.
남자의 얼굴에 깊은 낭패감이 깃들었다.
남자의 손에선 물빛으로 빛나던 구슬이 내 손에 오자 순식간에 투명한 유리구슬처럼 변했다.
“……에이린?”
“아빠…!”
원래대로 돌아온 아빠가 놀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급히 아빠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영영 잃을 것만 같던 기분이 들자 어쩐지 서글펐다.
“아빠, 아빠… 아빠…….”
“그래, 따님.”
아빠가 나를 안아 품에 힘껏 끌어안았다. 강하게 끌어안은 품에 안겨 있으니 기분이 한층 괜찮아졌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줄 수 있겠니?”
“저 사람이 이상한 힘을 썼어요.”
“그랬구나.”
그가 가볍게 나를 품에 안더니 내 머리를 제 가슴팍에 묻게 했다.
그러더니 내 뺨을 가볍게 문지르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사위가 고요해졌다.
늘 나를 피곤하게 했던 소음이 완전히 사라졌다. 소음뿐만이 아니라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고 함이 옳았다.
눈을 감고 있어도 아빠의 팔이 움직이는 건 알 수 있었다.
“이제 눈을 떠도 된단다.”
살짝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기절한 듯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남자가 보였다.
뒤통수에는 커다란 혹이 보였다.
“이거요…, 저 사람 거예요.”
내가 아빠에게 내 주먹 두 개만 한 구슬을 내밀자 아빠가 인상을 찌푸리곤 구슬을 집어 칼란 에탐에게 넘겼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손수건을 꺼내 내 손을 문질러 닦아 주었다.
“아빠?”
“지지다, 지지. 더러운 거.”
“……그거 지금 아버지 아들 손에 있거든요?”
칼란 에탐이 황당하다는 듯 반문했다. 아빠가 칼란을 보고는 픽 웃었다.
“너도 딸 하던가. 왜? 손 닦아줘?”
아빠가 손수건을 들어 올리자 칼란 에탐이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빠, 나…….”
눈앞이 핑그르르 돌았다.
“어……?”
또 능력을 쓴 부작용인 걸까?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에 손을 들어 이마를 감싸자 아빠가 내 등을 토닥거렸다.
“아가, 따님?”
“아빠, 나 어지럽고 졸…….”
눈앞이 흐릿해졌다.
“에이린!”
아빠의 애절한 부름에도 불구하고 눈앞이 암전됐다.
끼익, 끼익.
덜컹.
또다시 톱니바퀴가 흐르는 방향이 바뀌었다. 신기하게도 나는 그 바뀌는 톱니바퀴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았다가 뜬 순간, 이번에는 지옥의 한복판이었다.
“이 돈만 먹는 기생충 같은 년! 당장 죽이지 않고 뭐해! 언제까지 이년에게 돈을 퍼부을 거야! 언제까지!”
“어머님, 제발…….”
“야, 너 언제까지 처잘 거야?!”
그래, 시끄럽고 끔찍한, 속이 뒤집힐 것 같은 지옥 속에서 나는 눈을 떴다.
어쩌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하나가 끝나지 않는 이상 이 지옥은 영원히 나를 괴롭힐 것이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