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115
“할머니가 유지 장치 떼 버리라잖아!”
“차미소, 너 죽는다고!”
사방이 시끄러웠다.
몸을 흔들어대는 거친 손길에 기분은 바닥을 내달렸다.
눈을 뜨고 싶지 않지만, 떠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이 난장판은 도통 정이 안 갔던 할머니가 나를 죽이거나 내가 눈을 뜨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으니까.
“애미야, 너도 웃기는구나. 진즉 유지 장치 떼라고 했을 때 뗐으면 얼마나 좋아! 돈이 어디 땅 파면 나오는 줄 아느냐?”
“어머님, 아직 죽지도 않은 아이를…….”
“아, 엄마 말이 맞아요, 할머니. 누나가 뭘 했다고…….”
낯익고도 낯선 목소리가 우습게도 나를 감싸고 있었다.
늘 내게 날 선 목소리를 내던 사람들인데 말이다. 언성을 높이고 욕설을 내뱉고,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무시하고.
“뭘 하긴 뭘 했다 그러냐! 애미 너는 부모가 되어서 대체 우리 강아지들 교육을 어떻게 했으면 이렇게 저 애한테 집착을 하게 해!”
할머니의 언성이 높아졌다.
“네 자식 살리겠다고 설마 협박이라도 한 거냐?”
“어머님, 제가 어떻게…….”
“뭐가 문제냐고 물었느냐? 똥강아지들아.”
할머니가 말했다.
“저 애는 이 집안에 태어난 게 문제란다. 이 가문이 얼마나 귀한지 잘 알고 있잖니, 근데 어디 감히 이 손 귀한 집안에 계집이…….”
더는 들어줄 자신이 없었다.
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에 나는 꽉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잠시간은 내가 눈을 뜬 것을 알아채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조용히 고개를 돌리자 널찍한 등이 두 개 보였다.
그렇게도 끔찍하게 싫어했던 남동생들의 등이었다.
그리고 그 어깨 너머로 나이에 비해 주름이 적고 허리도 꼿꼿하게 선 노인이 보였다. 할머니는 내 시선을 느낀 듯 곧장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너!”
할머니가 남동생들이 가로막은 것을 뚫고 성큼성큼 걸어 내 앞에 섰다.
꼬장꼬장하게 생긴 낯에 21세기에 꾸역꾸역 불편한 개량 한복을 차려입은 모습은 그녀의 성격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고얀 년, 어디 어른이 왔는데 못 배워먹은 것처럼 계속 누워있어?”
나는 입술을 뻐끔거리다가 천천히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나는 늘 그랬다.
할머니 앞에만 서면 사고가 굳고 말도 제대로 내뱉지 못하는 머저리가 되는 것 같았다.
할머니가 입만 벌리기만 하면 두려운 듯 심장이 쿵쿵 뛰었고 숨이 멈췄다.
“당장 못 일어나느냐!”
허공을 보며 가만히 눈을 깜박이던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할머니 뒤에선 기억보다 조금 야윈 어머니가 보였다.
내 앞에선 늘 범접할 수 없는 태산 같았는데, 할머니 앞에선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 어머니가 참 작아 보였다.
‘어머니가 저렇게 작았던가?’
내 앞에선 늘 크고 무서웠던 사람이다.
아버지와는 다르게 때리진 않아도 늘 입을 다문 채 나를 노려보던 사람이었는데.
이상한 일이다. 이제는 전혀 무섭지 않게 느껴지다니 말이야.
‘이것도 다 아빠 덕분일지도.’
늘 내가 무엇을 하든 내가 무슨 잘못을 하든 오로지 내 편을 들며 지켜주던 아빠니까 말이다.
사랑을 듬뿍 받고 나니 그제야 내 주변에 있던 세계가 얼마나 불공평하고 불합리한 일이었는지를 알 것 같았다.
따지고 보자면, 아빠는 내게 구원이었다.
‘그땐 정말 죽고 싶었는데.’
지금은 그냥 그 세계로 돌아가고 싶었다.
“어디 눈을 그렇게 치켜떠? 이게 죽다 살아나서 미쳤느냐! 죽을 거였으면 곱게 죽던가, 수치스럽게 세상에 차에 치여?”
할머니의 악담은 하루 이틀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할머니는 지독한 남아선호사상주의의 끝에 있는 사람이었다. 사고방식이 아주 예전에 머물러 있는 사람.
식당에 첫 손님이 여자면 그날 하루 장사를 공친다느니, 여자가 사업을 하면 재수가 없다느니 하는 말을 곧잘 내뱉곤 했다.
내가 할머니의 미움을 받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여자가 제일 먼저 태어나서 재수가 없을 거라느니, 뭐라느니.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정말로 말도 안 되는 말이었다.
여자로 태어나서 안 될 일이었다면 어차피 안 될 일이었을 것이다.
여자가 들어와서 하루 공칠 장사였다면 결국 안 될 장사였을 것이다.
그냥 누군가는 실패에 그럴듯한 이유가 필요했고 그게 때로는 여자였고 때로는 아이였고 때로는 노인이었을 뿐일 것이다.
그저 언제나 탓은 약자의 것이었다. 나는 약자였을 뿐이다.
종종 생각하곤 한다.
나는 무슨 잘못을 그렇게 했기에, 늘 태어난 것이 죄라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는지.
그렇게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는 말을 늘 듣고 살아야 했는지.
‘저 세계엔 검을 들고 마법을 쓰고 사람이 죽고 사람을 사고파는 일이 가득한데…….’
그런 사람들도 모두 아빠의 해사한 웃음과 함께 가루가 되어 사라지곤 했다.
그 세계를 보고 온 탓일까?
활화산 같던 할머니의 화도 이제는 별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픽 웃고 말았다. 그러자 할머니의 표정이 아주 이상해졌다.
“너 지금 웃었니?”
“그럼…….”
목소리가 잠긴 탓인지 소리보단 바람이 더 많이 섞여 있었다.
나는 손을 들어 몇 번인가 목을 매만지다가 마저 입을 열었다.
나는 미친 걸까?
어쩌면 팔려 갈 뻔도 하고 죽을 뻔도 하고 드래곤이기도 하고 5년이나 잠들어있다가 깨어나서 어린 나이에 가주직도 달아 보니 조금 미쳤을지도 모르겠다.
“제가 우는 것처럼 보이세요?”
“……뭐? 지금 뭐라고 했느냐!”
“우는 것처럼 보이시냐고요.”
“이 년이 미쳤나……!”
내가 눈을 똑바로 뜨고 벌벌 떨지도 않은 채 말하자 할머니의 눈이 커졌다.
그럴 만도 했다.
할머니의 기억 속엔 나는 한마디 대꾸도 못 하고 윽박만 지르면 벌벌 떨며 말이나 더듬거리는 멍청하고 바보 같은 골칫덩이였을 테니까.
“차미소, 너 할머니께 대체 무슨 말을……!”
“애미 네가 애 교육을 엉망으로 시킨 게야! 이 년이 아주 죽다 살아나서 미쳤는지……!”
“년, 년. 자꾸 그러지 마세요, 할머니. 같은 년이면서 왜 그러세요, 상스럽게.”
늘 고상함과 기품을 강조하는 할머니는 내 말에 입을 떡 벌렸다.
내가 이렇게 대꾸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잠깐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저번에 죽을 걸 그랬어.’
그렇다면 조용히 눈을 감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면 이런 꼴을 볼 일도 없었을 테고 계속 에이린으로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정말 꿈이라서 영영 죽게 되는 거라면?’
영원히 돌아갈 수 없게 되는 거라면 그건 싫었다. 나는 그 세계에서 오래 살고 싶은 것이다.
“의사! 정신과 의사를 불러와! 이 년이 아주 미친 게야, 귀신이 들렸어!”
“할머니 저는 멀쩡해요. 태어나서 이렇게 머리가 맑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차미소, 당장 할머니께 사과드리렴!”
어머니가 사색이 되어 달려와 내게 쏘아붙였다.
“야, 너는 눈뜨자마자 할머니한테…….”
“야, 차이도.”
나는 첫째 동생을 바라봤다. 문득 아빠가 떠올랐다. 화가 날수록 더 환하게 웃었던 아빠가.
그래서 나도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닥쳐.”
“……뭐라고?”
나는 손을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손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침대 아래로 다리를 내리자 역시나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그래도 서는 것이 어렵진 않았다. 나는 조심조심 자리에서 일어났다.
링거를 힘껏 뽑아내자 피가 튀었다. 나는 대충 옷 소매로 주삿바늘이 꽂혔던 부위를 꾹 눌렀다.
‘일단 병원에서 벗어나야지.’
꿈이든 아니든 자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병원만 아니면 좋을 것 같았다.
“차미소, 지금 어디 가니!”
비척비척 걸어가는 데 어머니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날카로운 눈매나 꾹 다물린 입술이 한때는 두렵기도 했었는데…….
더 큰 사람들을 많이 보고 와서 그런지 이제 별것도 아니게 느껴졌다.
‘정말 이 사람들이 뭐라고 무서워했더라?’
시야가 높아진 것이 썩 적응되지 않았다. 오랜만에 위에서 보는 시선이다.
이 사람에게 한때는 그렇게 사랑받고 싶었다.
진짜 사랑을 받아보니, 나는 단 한 번도 사랑받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지만.
“어머니.”
나는 웃는 얼굴로 최대한 다감하게 입을 열었다. 어머니는 이상한 것을 보는 표정으로 내게 시선을 두었다.
드르륵-
병실 문이 열렸다.
어머니의 뒤로 익숙하고 두려운 낯이 보였다. 나는 그와 눈을 마주치면서도 입을 멈추지 않았다.
“제가 나가 뒈지든 차에 치여 뒈지든 부디 다음엔 살리지 마세요.”
“지금 뭐라고…….”
어머니는 상당히 충격을 받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래, 충격보다는 상처를 받은 것 같았다. 웃기는 일이지. 나는 그보다 더 많은 상처를 받았는데.
“……일어나자마자 소란을 피우는구나.”
문밖에 서 있던 아버지가 병실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나는 그냥 아버지를 무시하며 막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제 아들을 무시하는 내가 퍽 못마땅했던 모양이었다.
“감히 어디 어른이 말을 하는데……!”
할머니가 내 손목을 잡아당겼다. 나는 대번에 얼굴을 구겼다.
‘아빠 보고 싶어.’
치미는 짜증에 강렬하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화악, 뜨거운 햇빛이 쏟아지듯 갑자기 병실이 크게 반짝이는가 싶더니 그 자리에 누군가 서 있었다.
“이게 갑자기 무슨…….”
“……아빠?”
아빠였다.
또다시 상상이 이루어졌다. 그것도 현실에서.
그것을 깨닫는 순간 등줄기가 오싹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