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118
“도망쳤어여.”
“도망? 어디에서?”
“저희 아빠가 사실 아주 무섭거든여.”
손가락 두 개로 뿔을 만들어 보인 아이가 도깨비 같다며 작게 속닥거렸다.
“아빠?”
“네….”
에르노 에탐의 얼굴이 설핏 불쾌감에 물들었다.
이 아이가 지금 말하는 아빠는 자신이 아닐 테니까. 그 사실 만으로도 이유 모를 불쾌감이 올라왔다.
그래, 에르노 에탐의 눈앞에 있는 아이는 에이린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까 봤던 전생의 에이린이 어려지면 딱 이런 얼굴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아직은 한참 앳되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피부가 조금은 가무잡잡하게 탄 소녀였다.
“저가 실수로 동생을 밀쳐서 동생이 넘어졌어여……. 이럴 때면 아빠가 사랑의 매를 들거든여?”
“사랑의 매?”
에르노 에탐의 눈썹이 슬쩍 꿈틀거렸다.
“네, 사랑의 매는 사랑해서 잘못되지 말라고 때리는 거라는데, 그게요, 사시른 너무 아파여…….”
아이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근데 엄마랑 아빠가 사랑하면 원래 다 그런 거래여.”
“…….”
에르노 에탐은 아이의 앞에서 비웃음을 흘리지 않기 위해 제법 노력해야만 했다.
‘그것들은 아이를 학대하는 일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에르노 에탐으로선 이해할 수 없었다.
모든 부모가 아이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에르노 에탐은 알고 있다.
그러나 싫으면 싫은 거지, 거기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비겁한 변명이며, 또한 죄책감을 덜기 위한 욕심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절 아끼니까 때리는 거랬어여. 선생님이여, 사랑하지 않으면 때리지도 않는 대여!”
저열한 어른의 진짜 속내를 모르는 아이는 그저 활짝 웃었다.
“근데 어제도 맞았는데 오늘도 맞으면 너무 아플 것 같아서 지금은 몰래 숨어 있는 중이에여!”
어제도 실수로 밥을 먹는데 멍청하게 수저를 떨어뜨려서 종아리를 맞았다며 아이가 작게 속닥거렸다.
아이는 여전히 환하게 웃고 있었다.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얼굴이었다.
아직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가진 아이는 자신이 체벌을 당하는 게 오로지 제 잘못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사랑의 매라니…….’
참 우습지도 않은 이름이었다.
온전히 어른을 위한, 가해자를 위한 변명이 담긴 비열한 단어가 아니던가.
에르노 에탐은 그저 이름만 들었는데도 불쾌할 정도였다.
그는 애써 제 감정을 티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에르노 에탐 답지 않은 노력이었으나, 어쩐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아저씨는 어디에 가는 길이어써여?”
“……딸을 찾으러 가는 길이었지.”
에르노 에탐의 대답에 아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헉, 아저씨 딸도 길을 잃었어여?”
“그런 듯하더구나.”
“좋겠다, 저도 사실 얼마 전에 길을 잃었는데 아무도 찾지 않아서 혼자 경찰 아찌한테 말해서 집까지 찾아와써여!”
“……그랬니?”
경찰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경비대 비슷한 게 아닐까 싶었다.
“네, 근데 동생들도 저랑 같이 길을 잃어서 먼저 찾고 있었대여. 저는 누나니까 그다음에 찾을 거랬어요.”
에르노 에탐은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결국 아무런 말을 내뱉지 못했다.
거짓을 진실이라고 믿으며 버티고 있는 아이에게 진실을 알려준다고 한들 고통스럽기만 할 것 같았던 탓이다.
“그래도 저를 제일 먼저 찾아주면 조았을 텐데여.”
“…그러니?”
“네, 아저씨는 딸을 몇 번째로 찾아가고 이써여?”
“첫 번째지.”
에르노 에탐의 대답에 아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와, 아저씨 딸은 좋겠다. 나도 아저씨 같은 아빠가 있으면 좋겠어여.”
앗, 물론 지금 아빠가 싫다는 건 아니에요!
작게 속살거리는 아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에르노 에탐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돌아가세여, 딸이 기다리겠다. 저도 아주 많이 기다려서 많이 외로운 거 잘 알거든요!”
아이가 눈을 감은 채 손을 꼭 맞잡고 무언가를 중얼거리자 어느새 에르노 에탐의 옆에 새하얀 빛을 내뿜는 문이 생겼다.
그 일련의 행위가 아주 익숙해 보여서 에르노 에탐의 눈이 커졌다.
“…같이 가지 않겠니? 아가.”
에르노 에탐이 손을 내밀었다.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포스스 웃었다.
“안대여, 저는 여기서 나갈 수 없어여.”
“내가 내보내 주마.”
아이가 웃었다.
“안대여, 전 아직…… 준비가 안 대써여.”
아이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준비?”
에르노 에탐의 물음에 아이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에르노 에탐이 들어오지 않자 문이 움직였다.
빛무리처럼 빛나는 문이 순식간에 에르노 에탐을 집어삼켰다.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뻗는 에르노 에탐을 보던 아이는 여전히 활짝 웃고 있었다.
아이의 뒤로 팔랑거리는 스케치북 사이로 작은 도마뱀의 형상 같은 것이 언뜻 보인 듯했다.
* * *
“머리 아파…….”
나는 어쩐지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은 채 숨을 삼켰다.
‘분명히 마지막에… 그, 소원 구슬을 가진 여우한테 능력을 쓴 것 같은데…….’
그 뒤에 머리가 어지러웠던 것을 떠올리면 아마 기절을 한 게 아닌가 싶었다.
“진짜 무슨 병약 미소녀도 아니고……”
기절을 맨날 하네.
나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침대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로랑?”
방에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천천히 뺨을 긁적이다가 슬쩍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아빠나 보러 갈까?”
복도를 걸어가는데 멀리서부터 오고 있는 로랑과 눈이 마주쳤다. 내가 손을 흔들자 로랑이 눈을 크게 뜨더니 후다닥 달려왔다.
“아가씨!”
“로랑, 안녕.”
“네…, 잔악무도한 수인국의 놈들이 아가씨를 핍박하고 죽이려고 했다면서요……!”
“어……?”
딱히 핍박하거나 죽이려고 하진 않았는데. 죽이려고 한 건 도리어 나랑 아빠 쪽일지도 모르겠다.
“아냐, 납치를 하려고 한 것뿐이라…….”
“나압치요오?!”
“…….”
“우리 말랑말랑한 아가씨를 어디 납치할 구석이 있다고! 이 작고 가녀린 아가씨를!”
아무래도 작고 가녀리니까 납치하려고 한 게 아닐까?
지극히 상식적인 부분을 배제하고 분노하는 로랑을 보며 나는 헤실헤실 웃음을 흘렸다.
나를 보는 로랑의 입가가 한차례 허물어졌다.
“로라앙, 나 기절한 지 얼마나 됐어?”
“무려 사흘이나 되셨어요…….”
“사흘?!”
평소보다 조금 더 심각한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에르노 공작…, 아니 선대 공작님께서도 어제 잠이 드셔선 하루가 지나도록 일어나지 않고 계셔서 저택 분위기가 말이 아니에요.”
아빠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피가 싹 빠져나가는 기분에 입술을 달싹이다가 조금 긴장한 낯으로 입을 열었다.
“…아빠 어디 아파?”
“아뇨, 전체적으로 안정적이라고 하셨어요. 그냥 눈만 못뜨시는 것 같아요.”
내가 울상이 됐는지, 로랑이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차르니엘 공자님께서 의원을 불러 살피셨는데, 특별한 부분도 없었고요. 혹시 광폭화나 이런 쪽의 문젠가 싶어서 칼란 공자님께서 알아보고 있다고 합니다.”
나는 엉거주춤 선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해도 아직 내 표정이 심상치 않았는지 로랑은 아예 한쪽 무릎을 꿇더니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진짜 걱정하지 마세요, 그냥 잠을 자고 있으신 거고 다른 곳엔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하셨어요.”
“……정말?”
“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아빠가 보고 싶어져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로랑이 내 뒤를 따라왔다.
“아가씨가 기절하신 동안 얘기를 들은 콜린 공자님과 루실리온 대신관께서도 방문하고 가셨어요.”
“리하르트랑 루시가?”
“네.”
“그 외에 2황자 전하와 릴리안 데이지 영애께서도 선물을 보내주셨고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눈이 동그래졌다.
“아, 그리고 로즈먼트 가문에서도 약을 보내왔습니다.”
힐 로즈먼트가 이런 살가운 일을 했을 리는 없으니 아마도 필일 것이 분명했다.
괜히 가슴께가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내가 아프면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구나.”
“네에?”
내가 작게 중얼거린 말을 들은 듯 로랑의 눈이 커졌다. 민망함에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아니, 그냥…….”
“당연히 걱정하죠. 말씀드렸잖아요, 저택 분위기도 말이 아니었다니까요?!”
로랑이 억울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려 입술을 달싹거렸다.
“저도 잠도 제대로 못 잤어요. 보이세요? 이 눈그늘!”
로랑이 불쑥 얼굴을 들이밀며 어둑어둑한 제 눈 아래를 검지로 콕 집어 보였다.
“으응…….”
나는 저도 모르게 입가를 허물어뜨리며 웃었다. 로랑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아빠의 방에 도착했다.
로랑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 주었다. 자고 있을 줄 알았던 아빠는 의외로 일어나 있었다.
침대에 앉은 채 창밖을 보고 있는 것이 골똘히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아빠?”
평소답지 않게 내가 들어온 것도 모르던 아빠는 내 부름을 듣고서야 고개를 돌렸다.
“에이린.”
“아빠, 아픈 데 있…….”
아빠가 갑자기 두 팔을 벌려 보였다.
“이리 오렴.”
나는 의아한 표정을 하면서도 도도도 달려가 침대로 폴짝 뛰어올랐다.
그러자 아빠가 나를 품에 끌어안았다.
“많이 힘들었겠구나.”
“네……?”
갑작스러운 말에 나는 의아한 얼굴로 아빠를 보았다. 아빠가 나를 내려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곳 말이다.”
“……어디요?”
눈을 끔뻑이고 있자 아빠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아빠가 고개를 들어 로랑을 바라보자 눈치 빠른 로랑이 냉큼 허리를 숙이곤 방에서 나갔다.
“네가 살던 세계…….”
“제가 살던 세계요? 아……. 거기에 대해 알고 싶으세요?”
내 물음에 아빠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오늘이 네가 기절한 지 며칠 째니?”
“로랑이 사흘째랬어요.”
“잠을 자면서 꿈을 꾸거나 한 건 없니?”
“네……, 일어났을 때 머리가 좀 아프긴 했어요.”
아빠는 나를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그럼 다행이구나.”
작게 중얼거린 아빠는 나를 한참이나 품에 끌어안은 채 말이 없었다.
끼이익, 쿵-!
이상하게도 어딘가에서 자꾸만, 망가진 태엽이 굴러가는 소리가 나는 듯했다.
그 소리가 오늘따라 유독, 듣기 싫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