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119
“뱀뱀아! 아니, 이제 드래곤이랬으니까 용용인가…….”
나는 다음 날 아침 댓바람부터 찾아온 리하르트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너어는 진짜…….”
작명 센스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내가 떨떠름한 얼굴을 하자 리하르트가 냉큼 허공에 손을 휘젓더니 뭔가를 내게 내밀었다.
꽃냄새가 코끝에 훅 밀려 들어왔다. 리하르트가 설핏 웃었다.
“아프다고 해서 걱정했어, 이건 선물이야.”
“……꽃이네.”
“응, 꽃 싫어해?”
“아니, 좋아.”
나는 양손으로 꽃을 받으며 서툴게 웃었다. 누군가에게 꽃을 받아본 적은 확실히 없는 것 같다.
“다행이다.”
리하르트가 웃을 때마다 그의 귀걸이가 달랑거리며 흔들렸다.
“요즘 마탑에 다닌다고 들었는데.”
“응, 지금은 마탑주 밑에 있어. 내가 후계자라나 뭐라나.”
귀찮다는 듯 읊조리는 표정은 자못 짜증스럽게까지 느껴졌다. 나는 꽃다발을 로랑에게 넘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멋있다.”
“……멋있어?”
“응, 마탑주 후계자라면 엄청 대단한 거잖아.”
“그건… 그렇지.”
리하르트가 눈동자를 슬쩍 굴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보니까! 마탑주 후계자는 지금껏 나밖에 없었대. 그 영감이 나 말고는 할 사람이 없댔어.”
리하르트가 신이나서 말했다. 활짝 웃는 얼굴을 보며 나는 작게 박수를 쳐줬다.
“와아, 대단하다.”
내 말에 리하르트의 입술 끝이 움찔거렸다. 칭찬이 퍽 듣기 좋았던 모양이었다.
“역시 리하르트가 대단하네.”
“뭐, 이… 이건 별거 아니지. 나중에 나는 최연소 마탑주까지 될 거니까.”
소년이 퍽 뿌듯하게 제 포부를 밝혔다. 주먹으로 가슴을 팡팡 치는 모습에 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하든 부디 사이코만 되지 않기를.
“근데 여긴 어쩐 일이야?”
“아, 임무. 수인국에서 보낸 첩자가 있다고 해서 마탑 측에 심문 요청이 들어왔거든.”
“……응? 우리 가문엔 아빠가 있는데?”
“아, 국가적 범죄자에 대한 일차적 심문은 황성 혹은 마탑 측에서 맡게 되어 있어.”
아하, 그런 거구나.
하긴 국가 범죄자를 아무래도 귀족 가문에서 사사로이 처분할 순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아버님…, 크흠! 아니 에탐 공작님은 강한 분이시긴 하지만, 마탑에 소속되거나 황실에 소속된 게 아니니까.”
얘 지금 은근슬쩍 아버님이라고 말하지 않았어?
우리 아빠를 아버님이라고 부르네. 나는 조금 당황한 얼굴로 리하르트를 봤다.
“마, 말실수야.”
내 시선의 의미를 눈치채기라도 한 것인지 덧붙이는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네가 무사한 걸 봤으니까 난 이만 가볼게.”
리하르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손을 흔들곤 후다닥 사라졌다.
“세상에, 이거 구하기 힘들다는 달피아 꽃이네요.”
리하르트가 떠나고 꽃을 유심히 살피던 로랑이 말했다.
“그래…?”
“네, 달빛을 받으면 영롱하게 빛이 나서 밤길을 밝혀주는 꽃으로도 유명해요.”
“그렇구나.”
겉보기에는 수수한 들꽃처럼 보였던 터라 조금 놀랍긴 했다.
“이제 일정 끝난 건가?”
“아, 원래 그럴 예정이었는데… 루실리온 대신관께서 면담을 요청하셔서요.”
“루시가?”
“네.”
“언제? 설마 지금?”
“네, 지금 다른 곳에 대기하고 계세요.”
끙, 생각보다 할 일이 많네.
오늘은 푹 쉬려고 했는데 반가운 손님들이 여럿 찾아와서 쉽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아빠가 어제 반응이 이상했지…….’
오래 잠을 잔 이유를 물었더니 입을 다물어버렸다. 평소에는 웬만해선 다 얘기해 주는 아빠인데도 말이다.
그리고는 내가 환생하기 전에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제법 진지하게 물었다.
덕분에 어제는 아빠와 대화를 하다가 아빠 침대에서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그러나 아침에 눈을 뜨니 아빠는 또 없었다.
‘바쁜 일이 있었겠지만…….’
그래도 눈을 떴을 때 아빠가 없으니 조금 아쉽긴 했다.
‘근데 루실리온은 왜 온 거지?’
나는 로랑과 함께 루실리온이 기다리고 있다는 응접실로 향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로랑이 가볍게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주인님.”
루실리온이 방긋 웃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게 쫄래쫄래 다가왔다.
‘…얘는 이놈의 주인님 소리 언제 관두려나.’
나는 코앞까지 다가온 루실리온을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 루시.”
“네, 아프셨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으신가요?”
루실리온이 유심하게 나를 살피더니 이내 살포시 미소띤 얼굴로 물었다.
“응, 괜찮아. 잠깐 잠을 오래 잔 것뿐이라서.”
“……그렇군요.”
루실리온이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가 내 손을 잡아 데리고 가더니 날 소파에 앉혔다.
“루시?”
“꿈 같은 건 꾸지 않으셨나요?”
“응.”
“주인님, 저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나요?”
“응, 당연하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루실리온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주인님은 지금 행복한가요? 지금 당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즐거워요?”
갑작스런 루실리온의 말에 눈이 절로 동그래졌다.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꿈만 같아서 좋아.”
“꿈…….”
루실리온이 낮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로랑을 바라보았다.
“잠시 자리를 비켜주시겠습니까?”
“아…….”
아빠 때와는 다르게 로랑은 설핏 눈치를 보며 나를 보았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그제야 방을 나섰다.
“사실 오늘은 에탐 공작 각하께서 신기한 꿈을 꾸셨다고 들어서 공작가에 와 본 거였어요.”
“신기한 꿈?”
“네, 그 전에 한 가지 밝히자면 저는 사실 주인님이 이 세계에 온전히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압니다.”
갑작스럽게 내뱉어진 루실리온의 폭탄 발언에 뒤통수를 크게 얻어맞은 듯했다.
내가 당황해서 고개를 들자 어느새 그는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내 손을 잡고 있었다.
“오해는 마세요, 저는 이 세계에 속하고 신, 아르마(ARMA)의 영역에 닿는 거라면 그게 무엇이든 읽고 볼 수 있습니다.”
루실리온이 나와 눈을 마주친 채 차분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서, 처음부터 주인님은 그 세계에 속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어요.”
“…….”
“왜냐하면 원래 저는 그 날, 사실 그 내기에서 졌을 거예요. 알면서도 꾸역꾸역 고집을 피우고 있었던 거고요.”
나는 루실리온이 말한 그 날이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내가 그에게 스콘을 내어 주었던 그 날이었을 것이다.
“말하지 못할 뿐이지, 저는 생각보다 많은 걸 볼 수 있고 신은 생각보다 많은 미래를 제게 알려줘요.”
루실리온은 지금껏 내비치지 않던 속내를 보였다. 나는 조금 어리둥절한 낯으로 그 이야기를 들었다.
에서도 이런 속내가 나오진 않았던 터라 조금 당황했다.
“대신관과 내기를 한 그날, 신은 제게 실패한다고 했고 저는 고집을 부렸어요. 답답했거든요.”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루실리온은 항상 모든 것을 아는 사람처럼 굴었고 내가 이상한 능력을 썼을 때도 늘 침착했다.
“그리고 주인님을 만난 거예요.”
“…….”
“주인님은 이 세계 사람이 아니죠?”
쿵,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딱히 말하면 안 되는 이유는 없지만, 그렇다고 말해서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아빠 외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는데.
“성체가 되기 위해선 각인이 온전해야 하는데, 주인님은 그렇지 못하다고 말씀드렸죠?”
“……응.”
“주인님은 전생의 기억을 가진 채 환생을 하셨나요?”
“…비슷, 해.”
나는 말끝을 살짝 떨었다.
루실리온의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평온했으며 다감했으나 심장은 무척 빨리 뛰었다.
“다시 돌아가고 싶으신가요?”
“아니. 절대로, 다시는…….”
나는 힘주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루실리온은 잠시 고민하다가 마저 입을 열었다.
“주인님이 온전히 각인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도 저쪽 세계의 당신께서 살아있기 때문일 거예요.”
“……내가, 살아있다고?”
“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제가 주인님의 운명을 볼 수 없는 건 이상한 일이에요.”
“왜?”
“각인이 반쪽이라고 한들……, 누군가와 운명이 엮였다는 건 주인님이 온전히 이 세계에 속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의미니까요.”
루실리온의 차분한 말을 들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잡았다.
“하지만, 제가 운명을 볼 수 없는 경우가 두 가지 있어요.”
“두 가지?”
“네, 상대가 죽었거나…….”
그는 말끝을 흐렸다.
“혹은 신이거나.”
루실리온의 말에 나는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조금 머리가 아파져 왔다.
“신께선 제게 답해주지 않았습니다. 주인님에 관한 어떤 질문에도 대개 침묵으로 일관했죠.”
루실리온이 말했다. 내 인상이 찌푸려져도 그는 물러나지 않았다.
“잘 생각해보세요, 주인님.”
“뭘……?”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내가 소파 등받이에 가깝게 주춤 물러나려고 하자 루실리온이 내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잡았다.
“주인님은 정말 이 세계를 모르시나요?”
“여긴 그냥…….”
누군가 만들어낸 세계야. 소설 속이야, 차마 그렇게 말하진 못하고 나는 애꿎은 입술만 달싹였다.
오늘따라 루실리온의 움직임과 목소리가 유독 슬로우 모션처럼 느껴졌다.
덜커덩, 덜커덩.
끼이이익-!
그 순간, 꾸역꾸역 굴러가고 있던 톱니바퀴가 완전히 어긋났다는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날카로운 손톱으로 분필 칠판을 긁어내리듯, 소름 끼치는 비명과 같은 소리가 들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에이린의 모습인 채로 새까만 어둠 속, 거대한 톱니바퀴 앞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