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120
짤깍짤깍.
나는 눈앞에 거대한 톱니바퀴가 툭, 툭, 툭 굴러가는 모습을 멍하니 보았다.
‘이게 뭐지?’
사방은 새까맣고 중앙에는 거대한 톱니바퀴밖에 없었다.
느릿느릿 맞물리며 굴러가는 톱니바퀴를 바라보다가 막 인상을 찌푸렸다.
굴러가는 것조차 힘겹게 느껴지는 톱니바퀴는 세월의 무게마저 느껴졌다.
이상한 일이다.
나는 방금까지 루실리온이랑 있었는데 말이다.
“루시?”
작게 내뱉은 목소리는 끝없는 어둠 속에 고스란히 삼켜졌다.
메아리쳐서 다시 돌아오지도 않는 소리는 얼마나 이 공간이 넓고 끝없는지를 알려주었다.
“아빠! 로랑!”
덜컥 드는 공포심에 힘껏 소리를 질러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적막이 소리를 먹어버려서 두려움이 물씬 밀려왔다.
그때였다, 무언가가 내 앞을 샤샥 뛰어가더니 곧 스쳐 지나갔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내 무릎에나 올법한 작은 아이가 도도도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저건…….
“나인가?”
작게 중얼거리는 순간 아이가 우뚝 멈춰 섰다. 힘껏 달려간 아이는 자리에 선 채 허리를 숙여 무언가를 줍고 있었다.
“미안해, 깜빡할 뻔했다. 휴.”
아이, 아니 어린 내가 배시시 웃었다.
“동화 속 공주님은 행복하겠다. 나도 이런 공주님이 되고 싶은데.”
어린 차미소가 주운 것은 책이었다.
저 시절, 아마도 내가 가장 좋아했던 안데르센 동화가 아닐까 싶었다.
그맘때 어느 가정에나 하나쯤은 있었던 아이들의 꿈과 희망이 담긴 동화.
나도 한때 무척 좋아했던 것들이었다.
“그나저나 춥다. 이러다 영영 쫓겨나는 건 아니겠지?”
맞기라도 했는지 뺨이 살짝 발갛게 달아 부풀어 오른 아이는 작게 중얼거리며 책을 꼭 끌어안았다.
“나도 남자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혼도 안 나고 할머니도 나를 사랑해줬겠지?”
속상한 표정의 어린 내가 작게 중얼거렸다. 나는 그 모습을 그저 멍하니 보았다.
‘저게, 언제 적이더라……?’
왜 기억이 나지 않을까?
이 모든 풍경이 낯설기 짝이 없어서 마치 처음 보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나는 어느새 그네에 앉아 느릿느릿 발을 구르고 있는 아이에게 다가갔다.
어린 내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어쩐지 한마디 해주고 싶었던 탓이었다.
“안녕.”
그러나 아이의 뒤에서 그림자가 지더니 나보다 어린 내게 먼저 말을 건 사람이 있었다.
헉!
화들짝 놀란 어린 날의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곤 냉큼 고개를 돌렸다.
“누구세요?”
“그냥, 길 잃은 영혼을 찾아다니는 별지기? 아니면 길잡이라고 해야 할까?”
“……네에?”
“아직 우리 꼬마한텐 어려우려나.”
한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챙이 널찍한 모자를 꾹 누른 남자는 아이의 옆자리에 있는 빈 그네에 앉았다.
“절 아세여?”
“무척 잘 알지, 너는 모르겠지만 나는 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그는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으며 모자의 챙 끝을 슬쩍 매만졌다. 아이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외롭지?”
“……어.”
어린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러더니 얼핏 비친 어두운 감정을 애써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여! 미소는 씩씩해여. 아빠도 엄마도 동생도 있는 걸여!”
“그래도 외롭잖아.”
“……아닌데에.”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는 건 좋지 않아.”
단호한 그 대답에 어린 나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다소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렸으나 대꾸를 하진 않는다.
“그럼 상상을 해보는 건 어때?”
“상상, 이요?”
“그래.”
챙을 깊게 눌러쓴 남자는 기이할 정도로 챙의 그림자에 가려져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동화 속 공주님이 되고 싶지 않아? 용사님이 구해주거나 네가 그 세계의 주인공이 돼서 모두가 널 사랑하길 바라지 않아?”
“되고 싶어요!”
남자의 말에 어린 나는 눈을 반짝이며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옛날부터 그런 용사님과 공주님이 나오는 동화를 유독 좋아했었지.’
나는 생각하며 남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챙 아래로 늘어진 그림자 밑으로 남자의 비스듬한 미소가 보였다. 그 미소가 어쩐지 내게는 오싹하고 불온하게만 보였다.
‘난 이런 기억이 없는데.’
이런 사람을 만난 적도 없다.
이렇게 독특하고 특이하며 신기한 사람을 만났다면,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는데 나는 전혀 모르겠다.
“그래, 그럼 그걸 생각해보는 거야.”
“근데 생각하면 괴롭잖아요.”
“보통은 그렇겠지, 하지만 네가 생각하고 상상하는 건 현실이 될 거란다.”
“네에…?”
어린 내가 듣기에도 말문이 막히는 이상한 내용이었는지 표정이 구겨졌다.
“그래, 기왕이면 스케치북에 그림도 그려가면서 소설처럼 적어보렴.”
“…….”
“네가 행복한 여주인공이 되는 거야.”
커다란 손이 어린 내 양쪽 뺨을 덮었다.
“앗, 차가!”
화들짝 놀란 어린 내가 섬찟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폴짝 뛰었다. 긴 챙의 남자가 웃었다.
“그러면 너도 그렇게 될 수 있을 거야.”
“……정말요? 근데 그건 신님만 할 수 있잖아요.”
“세계를 만드는 게 왜 신이라고 생각하니? 그는 갈망하는 것도, 원하는 것도 없으며, 필요한 것도 모르는데.”
남자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세계는 갈망하는 자가 만드는 거지. 그러니 네가 외롭고 슬퍼야만 네가 만드는 세계의 주인공은 행복할 거란다.”
“네?”
아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남자는 제 할 말이 끝났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아, 어차피 이 기억은 잊힐 테니까. 감당할 수 없는 걸 잊는 건 네가 가장 잘하는 일이잖니.”
“어…….”
“다음에 만날 땐…….”
남자는 챙을 가볍게 매만지며 어린 나를 유심하게 살폈다.
“슬슬 폐기처분을 할 때가 된 거 같구나. 톱니바퀴가 전부 망가졌으니. 이번이 마지막이겠군.”
“아까부터 무슨 이상한 말을 하는 거에여, 아저씨!”
어린 차미소가 듣기에도 기괴했는지, 어린 나는 벌떡 일어나서 후다닥 남자에게서 멀어졌다.
남자는 나를 쫓지 않고 그저 그 자리에서 웃었다.
그가 한 걸음 내디뎠다.
작은 보폭이었을 뿐인데 남자는 어느새 어린 내 앞에 있었다. 아이가 아차하는 사이, 남자가 손을 뻗어 어린 내 뺨을 문질렀다.
그러자 어린 차미소의 눈에서 생기가 빠지더니 이내 수많은 알 수 없는 글자들이 벌레처럼 내 몸을 기어올랐다.
빼곡하게 찬 글씨들이 내 몸을 꾸역꾸역 기어오르는 것을 보던 남자가 어린 나를 그네에 앉혀주고 책을 안겨주었다.
“잊지 말렴, 너는 가장 불행한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꿈을 꿔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란다.”
그가 마지막으로 작게 속삭이곤 모습을 감췄다.
그가 사라지자 어느새 어린 나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눈에는 생기가 돌고 징그럽게 몸을 기어오르던 글자도 사라졌다.
“어……, 아직도 엄마랑 아빠가 화났을까?”
어린 차미소는 그네에서 폴짝 뛰어내리더니 방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타다닥 집이 있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대체 뭐야?”
저 사람은 누구고?
나는 당황한 낯으로 다시 어두워진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안 되는데.”
갑자기 바로 옆에서 앳되고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여전히 톱니바퀴가 존재했다.
그러나 조금 다른 것은 그 앞에 내가 있었다는 거다. 정확히는 어린 차미소가 있었다.
“넌 여기에 오면 안 돼. 너는 감당할 수 없잖아.”
“내가 왜 여기에 있어……?”
“누군가 밖에서 강제로 네 기억을 건드리려고 했구나.”
에이린의 상태인 나를 유심히 바라보던 어린 차미소가 설핏 웃었다.
어린 차미소가 있으니 이제야 시야가 조금 밝게 트였다. 어린 차미소의 주변에는 크레파스와 스마트폰, 그리고 기이한 버튼이 있었다.
아이의 뒤에 있는 거대한 톱니바퀴의 상태도 조금 더 자세히 눈에 들어왔다.
톱니바퀴는 이곳저곳 녹이 슬어서 부식되어 무너지고 있는 처참한 상태였다. 굴러가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다시 네 세계로 돌아가, 그리고 잊어도 괜찮아.”
모든 것을 잊어야만 한다는 듯 어린 차미소가 말했다. 나는 당황한 낯을 숨기지 못하고 머리를 흔들었다.
“나는 그 남자를 만난 기억이 없어.”
“그것은 원래 차원을, 세계를 떠돌아. 우리 같은 존재를 건드리고 꿈꾸게 해.”
“그 꿈이라는 건 대체…….”
“외로움은 소망과 상상력의 가장 큰 원동력이야, 알고 있어?”
어린 내가 분명한데 어쩐지 전혀 이질적인 타인과 대화를 나누는 듯한 느낌만 들었다.
“그리고 이건, 우리의 마지막 꿈이야.”
“마지막이라니…….”
“세계가 완성되면 꿈은 끝나. 원래 ‘차미소’에서 끝났어야 했는데…….”
어린 나는 그저 서툴게 웃어 보이며 말끝을 흐렸다. 아이는 뒷말을 내뱉지 않았다.
“그러니까 돌아가서 잊어.”
“…잊으면?”
“지금처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거야. 꿈꾸던 거잖아. 사랑받는 인생.”
어린 차미소의 말에 나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주먹을 꽉 쥐었다.
내가 아직 에이린인 탓인지 어린 차미소와는 시선이 제법 맞았다.
가만히 들은 이야기를 곱씹다 보니 스멀스멀 불안한 생각이 밀어닥쳤다.
그래,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고 하는 게 더 옳겠다.
“……내가, 만든 거야?”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에이린의 세계는, 샤르네는…… 내가 만든 거야?”
“우리가 만든 거지.”
“왜…….”
“외로웠거든.”
어린 차미소가 담담하게 말했다.
“에이린은 어른이 되지 못할 거야.”
악담도 이런 악담이 없었다. 내가 인상을 확 찌푸리자 차미소는 웃으며 바닥을 굴러다니는 크레파스를 주웠다.
널브러진 스케치북에는 익숙한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도마뱀 모습의 나나, 드래곤, 리하르트, 아빠, 샤르네까지.
“우리의 꿈은 어린아이일 때만 계속되니까.”
영원히 세계를 떠돌며 어린아이로 있어야만 한다고 덧붙인 차미소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세계는 꿈을 꾸고 꿈을 그리는 자가 필요해. 그래야 새로운 세계가 탄생하거든.”
신은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는다고 덧붙이는 어린 차미소는 아주 힘들고 지쳐 보였다.
“우리는 이미 많이 닳고 닳았어. 나는 도망쳤고. 하지만, 곧 그가 우리를 찾아내고 녹여서 새로운 꿈을 꿀 아이를 만들 거야.”
잔인한 이야기였다.
나는 어린 차미소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는데, 어쩐지 전부 이해한 것 같기도 했다.
한참 만에 나는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까 이 세계는 우리의 마지막 꿈이야.”
어린 차미소가 단호하게 선언한 순간이었다.
“누구 마음대로.”
아무도 찢을 수 없을 거로 생각했던 공간이 새하얀 빛과 함께 찢어지며, 그리운 목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