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121
“아빠……?”
“아저씨가, 여긴 어떻게…….”
나와 어린 차미소가 동시에 말했다.
‘아저씨?’
얘는 어떻게 아빠를 알고 있지? 아빠도 딱히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아빠는 물끄러미 우리 둘을 바라보았다.
“제가 조금 도움을 받았습니다.”
아빠의 뒤로 루실리온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확히는 지금과는 다른 모습의 루실리온이었다.
루실리온은 새하얀 머리카락이 길게 늘어진 모습으로 새파랗던 눈동자마저 새하얗게 변해 성스럽게만 보이는 낯을 한 채 성경책을 들고 어둠 속에서 유유히 빛을 내고 있었다.
기이할 정도로 신기하며 또 신성한 모습이었다. 그는 마치 갓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와도 같이 보였다.
내가 뚫어져라 바라보자 루실리온이 어색한 듯 뺨을 긁적였다.
“강림을 사용하면 조금 모습이 변합니다.”
“…강림이라니.”
그건 신이 들어올 때나 쓰는 말이 아니었나? 저걸 이렇게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할 일이야?
“아가.”
“……아빠.”
한쪽 무릎을 꿇은 아빠가 내게 팔을 벌려 보였다. 나는 급히 달려가 아빠에게 덥석 매달렸다.
“무사해서 다행이구나, 다친 곳은 없니?”
“네…….”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가득 들었지만, 신체가 다친 건 아니었다.
사실 머리가 조금 멍한 감도 있었다.
“주인님, 일단 돌아가죠.”
나와 아빠의 대화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던 루실리온이 손을 내밀었다.
흘긋 아빠를 보자 아빠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막 루실리온의 손을 잡으려는 때였다.
루실리온의 몸이 환하게 빛나더니 이윽고 퐁! 하는 이상한 소리와 함께 루실리온의 모습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긴 머리카락은 짧아지고 눈은 다시 새파랗게 돌아왔다.
그리고…….
“안돼에에엣! 애기야!”
퐁! 소리를 내며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새하얗고 작은 요정처럼 생긴 아이였다.
5살쯤 되어 보이는 외양의 소녀는 등에 천사 날개 같은 것을 달고 있었는데, 그대로 어린 차미소에게 냅다 달라붙는 것이 아니던가.
“누, 누구세요……?”
어린 차미소가 당황한 얼굴로 소녀를 떼어내려고 했다.
“……아르마?”
그때, 루실리온이 작게 중얼거리며 눈을 크게 떴다.
“역시 여기에선 분신 정도는 만들 수 있는 모양이네.”
천사 날개를 가진 아이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이가 날아다닐 때마다 아래로 새하얀 빛의 가루가 우수수 떨어졌다.
“휴, 여기에서 나가면 우리 귀여운 애기를 만나기 힘들어지니까.”
쪼르르 날아오른 아이가 어린 차미소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더니 작은 손으로 아이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아이, 착하다. 우리 애기, 고생 많았다!”
“……무슨.”
차미소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괜찮아, 괜찮아. 내가 지켜줄게.”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뜬금없는 행동에 나도 어린 차미소의 눈도 동그래졌다.
“난 여기 들어왔으니까 됐어, 이쪽 일은 내가 계책을 찾아볼 테니까 일단 너희는 돌아가야지. 내 영역에서 너무 벗어나 있으면 안 돼.”
차미소에게 찰싹 달라붙은 날개 달린 아이가 다분히 성의 없는 낯으로 손을 휘휘 저었다.
“얼른 돌아가렴, 예쁜아.”
예쁜이?
“…알겠습니다.”
루실리온?!
순순히 대답하는 루실리온을 보던 나는 아빠의 목을 조금 더 힘주어 끌어안았다.
“걱정하지 마, 내 세계에 떠돌이 따윈 들어올 수 없게 해줄 테니까.”
날개 달린 아이는 당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말에 놀란 표정을 한 사람이 있었다. 어린 차미소였다.
내가 어린 차미소를 바라보자 어린 차미소 역시 나를 마주 보았다. 아이는 어쩐지, 나를 부러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어린 내가 마지막까지 혼자 놀이터에 남았을 그 때와 같은 눈이었다.
부모님이 찾으러 와서 하나둘 놀던 아이들이 돌아갈 때, 땅거미가 지도록 아무도 찾으러 오지 않았던 그때의 모습.
“가자, 에이린.”
“네…….”
나는 이내 아빠의 품에 안겨 빛이 뿜어져 나오는 공간으로 들어갔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이내 시야가 밝아졌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푹신한 침대 위였다.
“아가씨!”
내가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로랑이 후다닥 달려와 나를 부축했다.
온몸이 식은땀에 절어 있었다. 울상인 로랑의 표정을 보다가 고개를 돌리자 바로 옆에는 아빠가 누워 있었다.
반대쪽에는 루실리온이 반듯한 자세로 눈을 감은 채 내 손을 잡고 있었다.
“몸은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어쩐지 목이 바짝 가라앉아 있었다.
“아가씨가 쓰러지시고 대신관과 에르노 선대 공작께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시더니… 갑자기 이렇게…….”
로랑의 눈에 순식간에 눈물이 망울망울 차올랐다. 퍽 마음고생이 심했던 모양인지 표정도 어두웠다.
“저보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여길 지키고 있어 달라고 하셨는데 그게 쉽냐고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나를 끌어안은 로랑의 손등을 살포시 토닥거렸다.
“또 악몽이라도 꾸셨어요? 땀을 엄청나게 흘리시더라고요…….”
“응, 악몽이었지.”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진실을 직시했으니 말이다.
“나 기절한 지 얼마나 지났어?”
“나흘은 더 넘었어요…….”
“근데도 안 들켰다고?”
“아뇨……, 당연히 들켰죠.”
로랑의 입술이 툭 튀어나왔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뺨을 긁적였다.
“일은 차르니엘 각하를 비롯한 다른 분들께서 다 처리하고 계세요.”
“……그래?”
“잠든 사이에 하타르 건도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가고 있는 모양이에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움찔, 잡힌 오른손에 힘이 들어가는가 싶더니 어느새 아빠가 눈을 떠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에이린…….”
잠긴 목소리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
“그래, 무사해서 다행이구나.”
아빠가 나를 가볍게 한 차례 끌어안곤 머리를 쓰다듬었다. 머지않아 루실리온도 눈을 떴다.
그는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펴더니 고개를 기울였다.
“주인님, 괜찮으시죠?”
“응, 너는…….”
“저도 한동안은 귀가 조용하긴 할 것 같군요.”
신이 사라졌다는 데도 루실리온은 제법 여유로웠다.
“하지만 힘을 조금 많이 써서 신전에 돌아가 며칠은 쉬어야겠습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려고?”
“네, 곧 다시 올게요.”
눈꼬리를 휘어 웃은 루실리온은 정말 피곤한 듯 관자놀이를 누르며 가볍게 물러났다.
허리를 숙인 루실리온이 방을 빠져나가는 것을 보며 나는 입맛을 다시다가 흘긋 아빠를 보았다.
“오늘은 일단 쉬거라. 한동안은, 푹 쉬는 편이 좋겠구나.”
아빠도 내 침대에서 내려가더니 내 머리를 꾹 누르며 슥슥 쓰다듬었다.
“앞으론 무슨 일이 있으면 혼자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내게 말하거라.”
첫 만남에 비해서는 퍽 어른스러운 말이었다.
나는 꾹 눌린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매만지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흐물흐물 풀어지는 입꼬리는 어쩔 수가 없었다. 아빠에게 칭찬을 받을 때마다 꼬리가 팽팽 움직이는 강아지가 되는 것만 같았다.
“네.”
“그래, 식사도 꼭 하고.”
“네!”
“쉬렴.”
“아빠도……, 와주셔서 감사했어요…….”
아빠가 나를 흘긋 보더니 픽 웃었다.
“딸이 길을 잃었으면 찾으러 가는 게 당연한 일이지.”
“…….”
“늘 널 먼저 찾으마, 그러니 멀어지지 말렴.”
“……네.”
아빠는 로랑에게 나를 씻기고 밥을 먹이라는 둥 몇 가지 지시를 내리곤 방을 나섰다.
‘마지막 꿈이라고…….’
얘기를 제대로 듣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쉬웠다. 꿈은 무엇인지, 마지막 꿈은 언제 끝나는지, 묻고 싶은 게 많았는데.
‘나중에 생각하자.’
지금 생각할 일은 분명히 아니었다.
* * *
“내 동생이 미안했소.”
쿵-!
수려한 낯의 사내의 이마가 바닥에 쾅 박혔다. 가무잡잡한 피부의 근육질의 남자가 사내의 뒤통수를 바닥에 내리찍은 탓이다.
“윽…, 아, 아픕니다!”
“살림, 네가 재상이 됐다고 해도 감히 이런 문제를 일으키느냐!”
사자후가 튀어나왔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주황색 눈동자와 같은 색 머리카락을 가진 근육질의 남자는 마치 태양을 떠오르게 했다.
“감히 정정당당한 결투도 아니고 이렇게 뒤에서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고약한 수를 쓰다니.”
“다 형님을 위함이었습…….”
“시끄럽다, 정말 미안하게 됐소.”
탁자에 둘러앉은 남자는 포박당한 여우 구슬을 가지고 있던 남자, 살림의 뒤통수를 다시 한번 거칠게 내리눌렀다.
나는 당황한 낯을 숨기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하긴, 국가 전쟁으로 번질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까…….’
근데 설마…….
‘수인국의 왕이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아빠와 차르니엘 에탐은 팔짱을 낀 채 영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나라를 그렇게 만들고 입으로만 사과하겠다는 게 썩 좋게는 보이지 않는군요.”
차르니엘 에탐이 입을 열었다.
아마 이것저것 다 뜯어낼 생각이겠지.
‘아빠는…….’
그냥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아마 내가 엮였기 때문이 아닐까 괜히 짐작만 해보았다.
그리고 황제가 이번 일에 에탐 가문이 피해를 많이 봤다는 핑계를 대며 협상을 에탐에서 하라고 떠넘긴 탓일지도 모른다.
정확히는, 아빠를 콕 집어 맡겼다곤 들었지만 말이다.
“드래곤이 태어났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정말이었나 보오.”
남자는 호기심을 감추지 않고 내게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빠가 냉큼 나를 품에 안아 무릎에 앉혔다.
“그래서 또 납치하려고 그러시는지.”
나를 끌어안은 아빠는 심기가 상한 듯 환한 미소를 띤 채 물었다.
“아니, 나는 그러한 행위를 대단히 싫어하오. 살림이 나를 위해 벌인 행위임은 알고 있소만…….”
남자의 표정은 정말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불쾌하다는 듯 구겨져 있었다.
“내가 알았다면 이놈의 발목을 분질러 놨을 거요.”
과격한 그 말에 아빠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내겐 아직 인간화를 하지 못한 아들이 하나 있소. 드래곤이라면 그걸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오. 원하는 것이 있다면 사죄의 의미로 최대한 들어주리다.”
제법 시원시원하게 그가 말했다. 차르니엘 에탐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연 때였다.
“그럼 가감 없이…….”
“그거 말인데……!”
나는 차르니엘 에탐의 말을 가로채며 손을 번쩍 들었다.
나는 을 읽었기 때문에……, 아니 어쩌면 이제 이 말은 조금 이상할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이 소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수인국에서 가장 값진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저 가지고 싶은 게 있어요.”
기왕 털어낼 거 제일 좋은 걸로 한가득 털어야지.
나는 히죽 웃으며 눈을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