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125
모든 준비는 조용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사용인들도 쉬쉬했고 아빠도 오늘은 무척 바빠서 집무실에서 거의 얼굴을 비치지도 않았다.
“준비가 다 됐어요!”
로랑의 이야기를 들은 나는 냉큼 아빠의 집무실로 쪼르르 달려갔다.
똑똑.
바짝 긴장한 채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담담한 목소리가 들렸다.
늘 내게 다정한 목소리와는 한 꺼풀 다른 느낌이었다.
사무적이고 무감정하고 건조한 목소리다.
내가 살짝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아빠가 무심하게 고개를 들었다가 눈을 크게 뜨며 펜을 내려두었다.
“아빠, 바빠요?”
“그럴 리가.”
일련의 그 한 마디가 너무나도 다정하게 들렸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차미소일 때는 남동생들이 아버지의 방에 아무렇지 않게 들어가는 모습이 부럽기도 했었다.
내가 들어갈 때는 아버지가 항상 인상을 찌푸리며 언성을 높였던 기억만 있는 터라, 나는 이렇게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 자체가 트라우마였었다.
‘와, 나 자잘한 트라우마가 너무 많잖아.’
옛날엔 그다지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여기에 와서 느끼고 있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에이린?”
“아, 네.”
“또 무슨 일 있었니?”
부드러운 목소리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빠, 저랑 같이 저녁 먹을 수 있어요?”
“물론이지.”
“그럼 온실 가서 먹어요! 제가 준비해놨어요.”
“……네가?”
“네!”
나는 두근두근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아빠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의 생각할 시간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처럼.
“당연히 가야지.”
첫 번째 관문은 넘었던 터라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자 아빠가 묘한 표정을 하면서도 피식 웃으며 내 손을 맞잡았다.
“내 따님은 기특하기도 하지.”
“…정말요?”
“그래, 네가 내게 와서 늘 다행이라고 생각한단다.”
“……저도요. 그동안 많이 힘들었는데, 아빠를 만나서 다행이에요.”
힘주어 아빠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보단 혼자서 해결하는 것이 너무 익숙한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그래, 그러려면 그쪽을 어떻게 해결해야겠지.”
낮게 중얼거린 아빠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던 터라 고개를 들자 아빠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란다.”
아빠가 말을 부드럽게 돌렸다.
나는 아빠와 함께 온실에 도착했다. 온실 앞에는 로랑이 서 있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온실 문이 활짝 열렸다.
문 앞에는 한껏 꾸민 에탐 직계들이 서 있었다. 로랑이 내 부탁대로 칼란과 실리안도 데려온 모양인지 두 형제도 보였다.
그러나 문이 열리고 나와 함께 온실로 발을 디디려던 아빠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
아빠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아빠……, 지금껏 제대로 못 챙겨준 것 같아서요. 제가 선물을 준비했는데요…….”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곤 손을 꼼지락거렸다. 움직이지 않는 아빠에게 성큼성큼 다가온 것은 차르니엘 에탐이었다.
그가 팔을 뻗어 아빠의 어깨에 가볍게 둘렀다.
“몇 년 만에 네 생일 파티를 해보는지 모르겠군. 생일 축하한다. 막내야.”
“지금 이게 무슨…….”
아빠의 얼굴이 사나워졌다.
“아, 아빠…! 싫으면 제 선물만 받아주셔도 되는데……. 그래도 저는 아빠한테 생일 선물로 가주직도 받고 그랬는데…….”
“……무슨 선물?”
“가주직이 생일 선물?”
“막냉아, 너 설마 그렇게 말하고 가주직을 준 거야?”
내 말에 에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어? 뭔가 일이 이상하게 흘러간다.
내가 당황해서 눈동자를 굴리고 있자 인상을 찌푸린 아빠가 팔짱을 끼고 입을 열었다.
“내가 가진 거 무슨 이유를 달아서 내 딸에게 주든 무슨 상관이지?”
내가 봐도 좀 얄미울 정도로 뻔뻔한 말이었다. 아빠가 내 편이 아니었다면 아주 조금 짜증이 났을지도 모르겠다.
“막냉아~! 선물 가져왔다!”
넬리아 자르단이 다분히 신이 난 표정으로 무언가를 들고 다가왔다.
드레스였다.
나는 입을 열려다 말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드레스?’
내가 입기엔 너무 컸다.
한눈에 봐도 성인용이다. 넬리아 자르단은 정확히 아빠에게로 직진했다.
아빠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넬리아 자르단이 들고 있던 드레스가 활활 불타더니 순식간에 재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아빠?”
“어? 나도 가져왔는데!”
“다들 산 채로 죽고 싶은 모양이지?”
아빠가 답지 않게 으르렁거렸다. 평소보다 한층 더 예민한 기분이었다.
덜컥 겁이 났다.
역시 하지 않는 편이 좋았던 걸까?
“아빠, 괜찮아요?”
새하얗게 질린 낯의 아빠를 보고 있으니 문득 다들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아빠가 소중한 사람을 잃은 날일 텐데…….’
짐작해보건대 아마 그런 이유겠지.
분위기를 가볍게 하겠다고 생각한 건지 도를 넘는 장난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울컥하니 기분까지 나빠졌다.
나는 아빠 앞을 막으며 양손을 옆으로 쫙 펼쳤다.
“아빠 왜 자꾸 괴롭혀요? 그래도 아빠가 힘든 날이고 소중한 사람도 잃은 날인데…….”
아무리 분위기를 띄우려는 의도라고 하지만, 선을 넘어선 안 되는 것도 있었다.
“응?”
“아무리 분위기를 띄우려는 거지만 그래도 이렇게 아빠를 놀리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축하해주려고 온 건 고맙지만, 그래도 아빠가 이렇게 싫어할 줄은 몰랐다.
“에이린.”
“아빠가 이렇게 싫어할 줄 알았으면 하지 말 걸 그랬어요…….”
그냥 가볍게 선물을 전해주고 파티까진 아니더라도 다 같이 식사를 했으면 해서 마련한 자리였다.
“죄송해요.”
“아니, 죄송할 건 없다. 네가 생각해서 해줬다는 건 알고 있고…… 네가 내 생각을 해준 걸로 충분히 기쁘니까.”
아빠가 조금은 조급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나를 달래려고 하는 말이 분명했다.
“아니에요, 아빠가 사실 생일을 불편해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도…….”
“네 딸 울겠구나. 솔직하게 말하지 그러누?”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할머니가 말했다. 할머니도 화려한 드레스를 하나 들고 있었다.
“내 생일에 누가 죽은 적은 없어.”
저번에 맨 처음 로랑에게 물어봤을 때 로랑도 직접 물어보라고 했었는데.
“아, 없다고요……?”
“그래.”
“그럼…….”
“뭔가 큰 사고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납치를 당한 것도 더더욱 아니고.”
내 생각을 읽은 듯 아빠가 말했다.
그럼 대체 왜 그런 거지?
“……어서 그랬다.”
“네?”
“내 생일에 드레스를 입기 싫어서 그랬다.”
“……네?”
생각지도 못한 비밀에 나는 입을 떡하니 벌리고 말았다. 뭐가 싫었다고?
정말 조금 많이 당황스러웠다. 입술을 뻐끔거리고 있는데 차르니엘이 어깨를 벌벌 떨며 고개를 숙이기 시작하더니 넬리아 자르단과 아크레아 사파일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세상에, 그렇게 생일 안 챙기고 숨기고 있으니까 이제 딸이 오해도 하네.”
나는 조용히 입술을 오므라뜨렸다.
어딘가 잘못돼도 아주 크게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내가 오해해도 아주 제대로 했구나.
얼굴에 순간 열이 확 올랐다.
‘이, 멍청한…….’
대체 나는 무슨 짓을 한 거지?
“아,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나는 급히 고개를 돌리고 삐그덕거리며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빠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지만 차마 민망함에 얼굴을 들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제가, 그러니까…….”
“내 소중한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한 거니?”
아빠가 나를 따라와 나직하게 물었다.
“네…, 싫어하신다기에…….”
그리고 로판 소설 nn년 경험으로 알게 된 클리셰가 있으니까 우리 아빠도 그런 트라우마 같은 상처가 있구나 싶었는데……!
“네 엄마가 죽었다고 생각했구나.”
“……네.”
부끄러움에 참을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대답은 해야 했기에 꾸역꾸역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숨을 삼킨 채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죄송해요.”
부끄러웠다.
“아니, 내가 제대로 말하지 않은 탓이다.”
아빠가 말했다.
“네 엄마가 죽은 날은 누군가의 특별한 날은 아니었어. 그러니 걱정하지 말렴.”
아빠의 커다란 손이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별거 아니야.”
넬리아 자르단이 어깨를 으쓱였다.
“네?”
“어릴 때마다 생일이 되면 어머니가 드레스를 입히고 가발을 씌웠거든. 자연스럽게 막냉이 생일은 막냉이 놀리는 쪽이 되어서 말이야.”
넬리아 자르단이 이실직고하듯 느릿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뭐, 그러다 이놈 성질머리가 폭발해서… 그 뒤로는 생일 파티만 준비한다고 하면 온 집안을 초토화했거든.”
“아…….”
할머니가 못됐네.
“어머니도 쟤가 크면서부턴 나중엔 안 하게 됐고……, 쟤도 별로 생일을 챙기는 편은 아니었으니까.”
“그때는 에르노가 어여쁘고 귀여웠지. 딱 너 같았다.”
할머니가 변명하듯 읊조렸다.
“뭐, 오늘은 그냥 농담으로 들고나온 거고. 그간 생일 축하한다는 말도 못 하게 하더니…….”
할머니가 성큼성큼 걸어와 아빠의 어깨를 툭툭 쳤다.
“딱히 네가 싫어서 그랬던 건 아니지만, 이 정도로 싫어할 줄 알았으면 덜할 걸 그랬구나.”
그러면서도 안 해야 했다는 소리는 죽어도 안 한다.
“어쨌든 생일 축하한다.”
“생일 축하해.”
“생일 축하한다.”
“늦었지만 축하해, 이 바퀴벌레는 선물…….”
화르륵!
“꺼져.”
하이엘 에탐의 손바닥에 있던 바퀴벌레가 순식간에 불타 사라졌다.
“성질머리하고는…….”
하이엘 에탐이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발전했네, 상 안 뒤엎고.”
“내 딸이 열어준 건데 어떻게 그러지?”
아빠가 뻔뻔하게 말하자 하이엘 에탐이 몸을 부르르 떨곤 몸을 돌렸다.
모두 각자 흩어져 음식을 집어 먹고 술병을 뜯기 시작했다. 아빠가 내게 다가와 나를 품에 안았다.
“고맙다, 따님.”
아빠가 내 뺨에 입을 맞췄다. 아빠도 느릿느릿 온실 안으로 들어갔다.
“네!”
헤실헤실 웃으며 아빠를 끌어안은 나는 생각했다.
‘다음 생일엔 아빠 드레스 입은 사진 보여달라고 해야지.’
그야말로 호기에 가득 찬 생각을 하며 나는 키득키득 웃었다.
아빠가 알면 경악할 건 알지만, 그래도 궁금했다. 도대체 어땠기에 저 할머니가 그렇게까지 집착했는지.
다행히 파티는 제법 늦게까지 이어지며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