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13
툭, 아이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에르노는 느리게 손을 뻗어 아이의 코밑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색색거리는 규칙적인 숨이 아이가 아직 멀쩡히 살아 있음을 알려 주었다.
“아버지, 괜찮아요?”
“그래, 괜찮다.”
그도 이렇게 전조가 없는 폭주를 겪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빠르게 폭주가 멈춘 것도.
참 이상한 일이었다.
보통은 폭주가 일어나기 일주일 전부터 느낌이 오곤 했으니까 말이다.
광폭화가 다가오면 저기압이 되고 별것 아닌 일에도 울컥울컥 살인 충동이 인다.
그때쯤 되면 그도 잠시 외출을 하곤 했다.
세상엔 합법적으로 죽어도 되는 쓰레기들이 아주 많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오늘 지금 이 순간까지 전혀 그런 위험한 충동이 없었다. 그 탓에 제 몸이 한계까지 몰린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2주 전쯤에 분명 전조가 있었는데.’
2주 전이라면…….
‘마침 이 애를 만난 날이었지.’
반지를 받았을 때의 청량함이 떠올랐다. 그리고 입 안을 맴도는 달콤하며 쌉싸름한 맛도.
이 향이 코끝을 가득 채운 순간…….
‘광폭화가 진정됐다.’
그뿐이랴, 아직도 혀끝에 비릿한 향이 아주 옅게 맴돌았다. 아마 아이의 피가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의 손이 생채기로 엉망이다.
이 작은 아이를 제 딸이라고 칭한 것은 그저 새로운 심심풀이의 시작이었다.
“인형…….”
그는 아이를 품에 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바닥을 나뒹구는 호랑이 인형을 주웠다.
흙으로 엉망이 되어 짓밟힌 인형은 아이가 안고 다니던 것만큼 깨끗하지 않았다.
“……다 태워 버리는 게 아니었을지도.”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에르노 에탐은 난생처음으로 자신이 저지른 일에 후회를 느꼈다.
몇 개라도 남겨 놨다면, 이런 일이 있을 때 아이에게 새것을 돌려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가 느리게 주변을 훑어보자 한껏 겁에 질려 제 근처로 다가오지도 못하는 시종 시녀가 보였다.
언제 폭주할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보는 듯한, 희게 질린 눈이다.
그가 어릴 때부터 느꼈던 편견 어린 시선.
‘그래, 보통은 저게 정상이지.’
살기 위해서 먼저 도망치는 것.
위험한 것은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뜨리는 것.
제 아들들조차도 도망을 먼저 우선순위로 잡았다. 자신이 그렇게 교육했으니까.
광폭화는 한 번 시작되면 멈출 방법이 한 가지뿐이었다.
더 강한 상대가 광폭화한 존재를 때려눕혀 강제로 기절시키는 것.
그러나, 그를 때려눕힐 만한 사람은 저택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나마 견줄 만한 미르엘 공작이나 가문의 첫째는 출타 중이다.
“아버지, 다행히 죽은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에도 그는 지금 한 사람의 피도 보지 않고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본래라면 아무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막았지.’
이 작고 어린 것이.
오다가 몇 번이고 넘어졌는지 흙투성이가 되고 손에는 생채기가 생겨 와서는 기어코 제 품에 안겨 광폭화를 막았다.
자칫하면 아이의 목숨도 앗아갔을 텐데.
“전부 정리시키렴.”
“네, 아버지. 내가 하고 갈 테니까 형은 아버지랑 먼저 돌아가.”
“어, 그래. 그 김에 아까 이 애가 쥐고 있던 열매 좀 찾아서 갖다줘. 어쩐지 그게 광폭화를 진정시킬 수 있는 열매인 것 같아. 한 번 알아봐야겠어.”
“알겠어.”
칼란 에탐이 제 붉은 머리카락을 거칠게 휘젓곤 살짝 흐트러진 차림새로 아이를 품고 있는 에르노 에탐의 뒤를 쫓았다.
“아버지, 그 열매가 아버지를 진정시킨 거 맞나요?”
“아마도.”
“그렇게 찾아 헤맸는데…… 이 애는 그런 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글쎄다. 비밀이 많은 따님이니까.”
에르노 에탐의 말에 칼란 에탐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버지.”
복도를 거니는 발걸음이 느긋했다. 에르노 에탐이 고개를 끄덕이자 칼란이 마저 입을 열었다.
“제가 사실 원래 이런 말은 잘 안 하잖아요.”
칼란이 답답한 듯 제 머리를 흩뜨렸다.
“이번 장난은, 여기서 관두는 게 어때요?”
칼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애가 이번에 아버지도 도와드렸고…, 솔직히 불쌍해서요. 작년에 그 남자랑은 어쨌든 계약을 한 거였는데, 얘랑은 그런 것도 아니잖아요. 실리안도 저랑 같은…….”
“칼란.”
“네, 아버지.”
“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니란다.”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그래도 얘가 아버지 구한다고 도망가자는 제 손도 뿌리치고…….”
“그만. 여기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으니, 이 얘기는 차후에 조금 더 하자꾸나.”
에르노가 두 번이나 말을 거절했다. 칼란은 여기까지가 자신이 참견할 수 있는 끝임을 알았다.
“……알겠어요.”
에르노는 언제나처럼 아이의 방 침대에 아이를 조심스럽게 눕혔다.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시녀에게 몇 가지 명령을 한 에르노가 아이의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저도 이만 돌아가 볼게요.”
“그래, 고생했다.”
칼란 에탐이 고개를 꾸벅 숙이곤 긴 복도를 걸어 사라졌다.
‘심심풀이 장난…….’
그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이었을 텐데 말이지.”
에르노 에탐은 주먹을 꽉 쥐곤 멈췄던 발을 다시 움직였다.
[에르, 그거 알아? 아이는 맹목적이야. 당신이 아무리 무서워도 그저 부모라는 이유만으로 끝없는 애정을 주거든. 아이가 태어나면, 분명 당신도 달라지겠지.] [확실히 너다운 멍청하고 재밌는 관점이네.] [아오, 비아냥대지 말고, 좀 들어봐, 아이는 당신이 어떤 죄를 지은 사람이든, 어떤 못난 사람이든 당신의 가장 멋진 모습만 본다니까? 그러니까, 그런 아이를 만나면 당신도 분명히 달라질 거야.] [달리아, 늘 말하지만 네가 말하는 세계는 늘 온갖 꿈을 모아둔 이상적인 세계야.] [아, 답답해! 이럴 땐 귀여운 딸이 최곤데! 남자는 딸에 약하다잖아?] [자식은 이제 사양이야. 셋이면 충분해.] [응, 그러니까 이 애가 딸이면 좋겠다. 그러면 당신도 알게 되겠지. 세상에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도 있다는 걸.]그렇게 입바른 소리를 했던 그녀는 그 세 번째 아이를 낳지도 못한 채 죽었다.
[이 아이는 어쩌면 당신의 세계를 바꿀지도 몰라, 그러니까 당신이 더는 외롭지 않으면 좋겠어.]그러니까, 그 모든 말도 바스러져 가루가 되었을 텐데.
갑자기 떠오르는 연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가 텅 빈 복도를 걸어 제 방으로 향했다.
아직도 입가에 맴도는 새콤하고 시큼한 열매의 향이 묘하게 평소와는 달리 그다지 불쾌하지 않았다.
* * *
번쩍-
눈을 뜨자 화려한 샹들리에와 천장이 보였다.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려다 이곳저곳이 쑤시는 느낌에 끙끙거리며 이불 속을 이리저리 뒹굴었다.
‘어휴, 죽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살아서 다행이다.
“악! 내 보서억!”
열매 근처에다가 다 쏟아붓고 온 내 보석…….
혹시나 지내다가 갑자기 인간화가 풀려서 도망갈 일이 있으면 바로 보석이라도 챙겨 가려고 늘 들고 다니는 것이었다.
작은 손으로 이곳저곳을 더듬거렸지만, 천 조각은 잡히지 않았다.
‘잃어버렸나? 옷도 바뀌었어.’
마일라가 갈아입힌 건가?
막 침대를 붙잡고 바닥으로 내려가려는데 달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세상에, 아가씨!”
“마이라…….”
“일어나셔서 다행이에요.”
마일라가 달려와선 나를 품에 힘껏 끌어안았다.
“일주일이나 눈을 뜨지 못하셔서 걱정했어요.”
“……어, 으응?”
며칠이라고……?
“일쭈일……?”
“네, 갑자기 놀라시고 무리를 하셔서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써……?”
“네, 정말 너무 걱정했어요.”
내 동공은 내가 보지 않아도 덜덜 떨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나, 안 들킨 거 맞겠지?’
기절한 동안 도마뱀으로 변하거나 그러진 않아서 다행이었다.
‘일주일이라니, 말도 안 돼…….’
왜냐고? 일주일이나 지났다는 건 이미 여주인공이 등장해서 원작이 시작했다는 것일 테니까!
“망해따…….”
점수를 딸 시간이 또 사라졌다.
“시장하시죠? 얼른 식사 가져오겠습니다.”
“웅, 알게써…….”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보석도 날아가고, 시간도 날아가고…….’
내 의욕도 같이 날아갔을지도 모르겠다.
“다들 많이 걱정하셨어요. 칼란 도련님과 실리안 도련님은 거의 매일 오셨고 공작 각하께서도 한 번 방문하시면서 깨어나시면 한번 오시라고 하셨어요.”
이상하게 그렇게 말하는 마일라의 목소리는 국어책을 읽는 듯 조금 건조한 것도 같았다.
‘착각이겠지?’
나는 괜한 생각을 털어 버렸다.
“구래? 아바지는?”
“아…, 그게……. 에르노 님은 며칠 전에는 한 번 오셨다가 그 뒤로는…….”
“그래?”
예상했던 일이라 크게 타격이 있진 않았다.
다만, 자는 사이에 모든 일이 끝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그래도 빚이 쌓였으니까 돈은 주겠지.’
기대하지 않으면 상처받을 일도 없다. 그래서 난 상처를 받지 않는 사람이 됐다.
응, 그러니까 이번에도 괜찮아.
“네, 아마 바쁘셔서 그러실 거예요. 공작님이 돌아가신 공녀님의 딸을 데리고 왔거든요. 듣자 하니 입양 얘기가 오간다고 하더라고요.”
“그러쿠나.”
대충 어떤 상황인지 감이 왔다.
여주인공이 광폭화를 진정시키는 힘이 있다는 것은 미르엘 공작이 이곳까지 오는 길에 발견하는 것이었다.
미르엘 공작은 가장 광폭화 증상이 심한 에르노에게 아이를 붙여 주려고 했다.
본래라면 에르노도 한 번 폭주했던 탓에 거부하지 않고 여주인공을 받아들인다.
“앗, 그러면 아가씨랑도 자매가 되시겠어요!”
“그런 이른 업쓰껄?”
나는 치마를 툭툭 털며 무심하게 말했다.
‘슬슬 끝을 준비할 때구나.’
별로 길지 않은 시간이었는데 아쉬울 뿐이다.
못해도 석 달은 갈 줄 알았는데 겨우 한 달도 안 돼서 끝날 줄은 몰랐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나는 머지않아 돌아올 출가를 훌륭하고 두둑하게 준비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