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134
“할아버지, 할머니! 예전에 황제 폐하한테 받았던 영지로 내려가셔도 괜찮아요!”
“언제 그 말을 해주나 기다렸지.”
할아버지는 내 방문에도 그다지 놀라지 않은 얼굴로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크는 할아버지와 꽤 정이 들었는지 그의 품에서 고롱고롱 잠을 자고 있었다.
“네, 잘 부탁드려요!”
나는 부러 활짝 웃으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 게지?”
의아한 목소리는 할머니에게서 나왔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잠깐 여기선 또 잠이 들겠지만, 그뿐이었다.
‘난 돌아올 거니까.’
굳이 이별 인사를 건네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 일도 없어요.”
그다음은 에탐 가문의 직계들이었다.
사실 할아버지 할머니에겐 비밀로 한다고 쳐도 이 가문을 지키고 있을 이들에겐 비밀이 있을 순 없다.
회의라는 이름 아래 모두를 모아 사정을 설명하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러니까, 성장기 때문에 또 잠이 든다는 거지?”
차르니엘 에탐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는 언제나처럼 내 옆에 앉아 있었지만 굳은 낯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며칠째 저런 표정이다. 마음이 썩 좋지 않았다.
내가 말을 걸면 입가에 미소를 띠면서도 말을 걸지 않으면 항상 저런 표정이었다.
“정말 그것뿐인가?”
익숙한 건조함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고양이 한 마리를 품에 안고 있는 크루노 에탐이었다. 언제나와 같은 건조한 목소리와 품에 안겨 있는 고양이는 확실히 어울리지 않았다.
“응, 그것뿐이에요.”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크루노 에탐이 다시 침묵했다.
내가 사실 전생을 기억하고 있다는 거나 다른 세계에서 살아온 기억이 있다는 것은 아빠 말고는 모르는 일이다.
앞으로도 아빠와 루실리온 이외의 사람에게 말할 일은 없겠지.
그러니까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른 세계에 죽기 위해서 간다니, 대체 누구에게 말할 수 있겠어.
“끙……, 이번 연회 때 네가 가주가 됐다는 걸 공식적으로 밝히려고 했는데…….”
“죄송해요.”
“죄송할 건 없지만……, 그럼 일단 유물의 선택 정도는 받는 게 좋겠어.”
“유물의 선택이요?”
“그래, 에탐 가문엔 세 가지 유물이 있거든. 가주에게 계승되는 검인 ‘업화의 염’, 에르노가 가지고 있는 ‘균형의 조각’, 그리고 마지막이 여태 주인을 선택한 적 없는 ‘드래곤의 구슬’이다.”
드래곤의 구슬…….
말 그대로 해석하자면, 진짜 드래곤이 가지고 있는 구슬이라는 의미가 됐다.
‘여의주, 같은 건가?’
아니지.
여긴 서양이니까 여의주 같은 건 없으려나?
“근데 유물은 본래 한 사람에게 하나만 주어지거든. 업화의 염이 아버지 옆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차르니엘 에탐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마 네 유물은 구슬 쪽인 것 같구나.”
“구슬…….”
“오래된 서에 따르면 드래곤의 구슬은……”
“구슬은……?”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차르니엘 에탐의 말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인상을 찌푸리자 차르니엘이 뺨을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오늘따라 하도 긴장한 표정을 하고 있어서 농담을 좀 해봤는데……, 실패인가?”
“아…….”
하하, 어색하게 웃어주자 차르니엘 에탐이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드래곤의 구슬은 주인을 선택한 적이 없어서 자세한 정보는 없어. 다만, 소원을 이뤄준다더군.”
“……소원이요?”
“응, 그거 외엔 밝혀진 게 없어. 이것도 초대 에탐이 남긴 한 마디뿐이니까.”
나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야, 그래도 오늘 전해주려고는 했던 거라.”
차르니엘 에탐이 손가락을 까딱이자 어느새 다가온 집사가 내게 작고 투박한 상자를 내밀었다.
옆에 있던 아빠가 대신 받아 상자의 뚜껑을 열어주었다. 안에는 무슨 유리구슬 같은 투박한 구슬이 있었다.
드래곤의 구슬이라는 이명과는 다르게 그다지 대단한 것 없는 모습이었다.
투명한 구슬을 조심스럽게 손에 쥐자 이내 구슬이 금빛으로 은은하게 빛나기 시작하더니 곧 내 몸으로 스며들었다.
‘……어?’
아니, 구슬이 스며들고 있잖아!
허공에 붕 뜬 금빛의 구슬은 내 심장을 가만히 파고들더니 이내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손을 뻗던 아빠도 당황한 듯 허공에 손이 굳어버렸다.
“이게 무슨…….”
“따님, 괜찮니?”
“네. 그냥 배가 조금…….”
조금 따끈따끈해졌다고 해야 할까? 가슴 안쪽이 포근해진 기분이었다.
“배가 아파? 당장 의원을…….”
“아니, 배가 따뜻해요.”
“……뭐?”
“그냥 따끈따끈.”
딱히 별다른 느낌은 없었다. 드래곤의 구슬이 스며들었다는 감각도 사실 제대로 들지 않았다.
“뭐가 되었든…….”
차르니엘 에탐이 입을 열었다.
“무사히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 조카님.”
“맞아,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
차르니엘 에탐의 말에 다른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나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무척 충만한 기분이었다.
* * *
‘오늘은 리하르트랑 또 에노쉬를 만나려고 했는데…….’
아쉽게도 에노쉬는 최근 황제가 되기 위해 황태자위를 다투고 있어서 시간이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짬이 나지 않아 한동안은 만나기 어려울 거라는 답장과 미안하다는 편지를 가만히 바라보며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에게는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이야기를 대신하기로 했다.
‘음, 황태자 안 되어 있으면 돌아왔을 때 얼굴 안 본다고 해야지.’
그럼 열심히 해서 황태자가 되지 않을까?
‘그럼 내 인맥의 질이 한층 높아지는 거지.’
차기 황제가 내 친구다?
이것만큼 만족스러운 것도 없다. 나를 못 만난 대가는 이걸로 치러야지.
나는 히죽히죽 웃으며 편지를 썼다.
‘뭐, 이걸 보면 어떻게든 만났어야 한다고 말하겠지만…….’
그래도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건 좋으니까.
나는 예전보단 제법 번듯해진 편지를 작성하곤 편지 봉투에 담아 하녀에게 건네주었다.
“가주님, 아래층에 콜린 공자께서 와 계십니다.”
“아, 금방 내려갈게. 이건 황실로 보내줘.”
“알겠습니다.”
나는 폴짝 뛰어내렸다.
리하르트를 만나고 나면 필에게 안부를 전하는 편지를 쓰고 또……, 오라버니들이랑 샤르네한테도 가고…….
‘그다음엔 아빠랑 계속 있어야지.’
아빠는 요즘 방에서 잘 나오지 않았다. 내가 찾아가면 언제나 반겨주곤 하지만, 그뿐이다.
생각이 많아 보였는데, 아마 내 걱정일 거라고 생각하면 함부로 괜찮다고 말하는 것도 기만 같았다.
‘일단 나중에 생각하자.’
나는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내고 아래층으로 향했다.
응접실에는 리하르트가 있었다.
“에이린.”
“리하르트, 안녕.”
“응, 잘 지내고 있어서 다행이야.”
리하르트가 한껏 밝은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벌떡 일어나 다가오는 리하르트의 손을 잡고 소파에 앉자 그가 웃었다.
“보고 싶었어, 에이린.”
“응.”
“근데 어쩐 일이야? 할 얘기가 있다고 하더니……. 무슨 일 있어?”
고개를 끄덕이고 리하르트에게 설명을 했다. 긴 잠이 들게 될 거라고.
가만히 얘기를 듣던 리하르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번에는, 제대로 말해주고 가고 싶었어. 매번…… 너한텐 미안한 일이 많았거든.”
“……그건, 내가 도와줄 수 없는 일이야? 에이린.”
리하르트가 내 손을 꽉 붙잡으며 말했다.
“나는, 널 도와줄 수 없는 거야?”
리하르트가 울 것 같은 낯으로 말했다. 내게 있어서, 리하르트는 소중한 가족이나 마찬가지다.
가장 힘들고 슬플 때 곁에 있어 주었고 긴 시간 미안한 일도 많이 있었다.
그 고아원에서 리하르트가 있어서 나는 생각보다 외롭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 개인적인 사정에, 리하르트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이 어리고 작은 아이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니까 더욱 그랬다.
“응.”
나는 리하르트의 손을 한 차례 꽉 마주 잡곤 살짝 풀며 말했다.
“넌 이미 날 많이 도와줬어, 리하르트. 너는 나한테 정말로 소중한 친구야.”
그러니까 이번에는 말없이 사라지고 싶지 않았다.
아르마에게 시간을 달라고 부탁한 이유 중 리하르트는 가장 큰 이유를 차지하고 있었다.
“항상 고마워.”
리하르트는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돌아오는 거지?”
“당연하지.”
“기다릴게.”
“응.”
나는 가볍게 그의 손등에 이마를 문질렀다. 우리는 성년이 되기까지의 잠시간의 이별을 나눴다.
우리는 그 뒤로도 한참이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대개는 마탑에서 고생하고 있는 리하르트의 불평불만이었지만.
리하르트가 돌아가고 식사를 마치고 나니 하늘은 이미 새까맸다.
로랑의 도움을 받아 이불에 들어간 나는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사람들을 하나둘 손가락으로 짚어보았다.
‘내일은, 칼란이랑 실리안이랑… 그리고 샤르네도 만나야겠다.’
샤르네를 지켜줄 사람도 테렘에서 한 사람 배정해놔야 할 것 같았다.
샤르네가 아직 에탐 가문의 가호를 받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라는 티를 팍팍 내라고 해야지.
‘그렇게 하면…….’
생각하며 막 눈을 비비적거리는 때였다.
갑자기 눈앞이 밝아지더니 허공에 아르마가 뿅하고 나타났다.
‘…아니, 뿅이라니.’
천사 날개를 파닥거리는 아르마가 내 앞에서 방긋 웃었다.
“안녕, 아가.”
“…안녕하세요.”
“일전엔 다른 애들이 있어서 아직 설명 못한 부분이 있어서 왔어.”
아르마가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처럼 희게 웃었다.
“네가 돌아가면, 별지기가 움직일 거야.”
“……네?”
“돌아간 세계는 네가 기억하는 것과는 다르게 네가 바라는 모든 것들이 네 눈앞에 있을 거야.”
잘 이해가 되지 않아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있자 가보면 알 거라고 아르마가 덧붙였다.
“별지기는 네 영혼을 회수해야 하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거야.”
“…….”
“그러니까 네가 확실히 끊어야 해. 미련도 인연도 전부 끊어야 해. 네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나머진 우리 예쁜이랑 내가 처리할 거야.”
아르마가 말하며 손을 설레설레 흔들었다. 흐릿하게 사라지는 그 인영을 보며 나는 눈을 끔뻑였다.
폭풍이 왔다가 사라졌다.
괜히 마음이 한층 더 심란해지는 밤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밤은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