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136
“명심할 건, 네가 생각하는 세상이 아니라는 거! 이건 가 보면 알 거야.”
“……네.”
“그리고 네가 잃어버렸던 기억은 천천히 꿈을 통해 돌아올 거야.”
“네.”
“마지막으로, 이 인연이 제대로 끊기지 못한 데엔 네 책임도 있어. 확실히 끊어낼 것.”
아빠와 루실리온 아르마와 나, 그리고 어린 차미소가 모인 어두운 공간에서 아르마가 안경을 끼고 칠판을 지시봉으로 두드리며 설명을 했다.
“말했다시피 에르노 에탐과 반쪽짜리 각인이 된 덕분에 너는 이 세계와 저 세계 반만 발을 걸친 채야. 그러니까 저쪽 세계의 수명을 채우고 죽으면 우리가 널 낚아챌 거야.”
어느새 아르마는 강태공이 되어 낚싯대를 있는 힘껏 당기고 있었다.
신이 되면 정말 별의별 행위가 다 가능한 모양이었다. 하나의 동화를 보는 기분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그 세계에 미련을 가지고 죽으면, 우리는 널 끄집어낼 수 없어.”
“네.”
“별지기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 영혼을 회수하기 위해 널 방해할 거야.”
“네…….”
“자, 여기까지. 질문!”
나는 냉큼 손을 들었다.
“좋아요, 말씀해 보세요. 아가 학생.”
그놈의 아가는 왜 내가 아가야.
불만스러웠지만, 어쨌든 신에게 대들 정도의 깜냥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람을 죽이거나 내가 만약 자살하면 어떻게 돼요?”
“자살해도 넌 살 거야. 사람은 원래 정해진 운명만큼은 살아야 하거든.”
“그럼 나는…….”
“근데 너는 명계 기록부가 다시 쓰인 편에 속해. 원래는 그때 죽어야 했거든.”
네가 용기를 냈던 그때 말이야.
덧붙이는 아르마의 말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왜, 다시…….”
“별지기가 간섭했겠지. 명계 기록부에 손을 댈 정도면 꽤 대가를 지불했을 텐데…….”
아르마가 턱을 문질렀다.
그래도 명계는 호락호락하지 않으니 요행이 두 번은 힘들 거라고 덧붙이는 목소리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사람을 죽이는 건……, 네 죄업이 깊어질 거야. 안 돼.”
아르마가 고개를 저었다.
죄업이 깊어지면 명계가 관여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고 아르마가 덧붙였다.
“명계의 규칙은 어떤 규칙보다 가장 중요시돼. 네 손을 쓰지 않고 죽이는 것 정도는 상관없어. 죽이지 않고 식물인간까진 괜찮아.”
청부살인은 된다는 건가.
나는 잠시 팔짱을 끼고 고민에 빠졌다. 아빠가 내 이마에 아프지 않게 딱밤을 날렸다.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마. 너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말렴. 죽이는 건 내가 할 테니까.”
아니, 아빠가 한다고 하면 정말 할 것 같아서 무서워.
내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빠 덕분에 나쁜 생각이 순식간에 휘발됐다.
아빠가 퍽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언제 어떻게 죽는지는 몰라요?”
“네가 30세에 죽는 건 알지만, 그 이외엔 몰라. 명계 기록부를 뒤져볼 수 있는 노릇은 아니라서.”
그 말은 생각보다 끔찍하게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이 아닌가.
‘죽는 때의 고통은 잠깐이라고는 하지만…….’
죽기 위해서 살아가는 기분은 어떤 기분일까?
“그럼 더 질문이 없는 것 같으니 슬슬 시작해볼까?”
아르마가 통로를 만들었다.
“너는 그냥 여기로 들어가기만 하면 돼. 나머진 바깥에서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아르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통로 앞에 섰다. 아빠가 나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기다리마. 시간이 얼마나 지나더라도. 늦어져도 되니까 다치지 말고 아프지 말고 무사히 돌아오렴.”
“응, 다녀올게요.”
그래서, 이제는 누구도 잃고 싶지 않았다.
“기억은…….”
어린 차미소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이미 지나간 기억일 뿐이야. 그걸 명심해. 우리는 어렸고 너무 외로웠어. 그뿐이야.”
“……으응, 알겠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마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일이겠지.
내 말에 어린 차미소가 흐릿하게 웃었다.
“이 정도로 완벽한 세계를 만든 건, 처음이야. 이 세계는…….”
차미소가 내게 손을 뻗었다.
“어리고 무력한 우리의 마지막 소원이었어. 그러니까, 홀리지 마.”
바라는 건 모두 여기 있잖아.
어린 차미소가 내 손을 한 번 쥐더니 뒤로 물러났다.
루실리온은 내 곁으로 다가와 빙긋 웃었다.
“실례.”
살짝 허리를 굽힌 그가 내 뺨에 입을 맞췄다. 옅은 빛무리가 내 이마로 스며들었다.
“……무슨….”
“가호를 담았어요.”
콰앙-!
서슬 퍼렇게 눈을 뜬 아빠가 루실리온의 뒤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루실리온이 가볍게 나를 통로로 밀었다.
루실리온이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들어오자 통로가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다. 아빠가 눈을 크게 뜨고 내게 손을 뻗었다.
“아빠! 사랑해요!!”
오랜 시간 내뱉지 못한 말을, 있는 힘껏 배에 힘을 줘 내뱉었다.
“……!”
당황한 아빠의 입술이 재빨리 벌어지는 순간, 통로의 문이 굳게 닫혔다.
‘아빠의 말은 못 들었지만…….’
그래도 괜찮다.
무슨 말을 했을지, 어쩐지 짐작이 가니까.
“좋아, 할 수 있어.”
나는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사방이 새까만 어둠 속이었다. 정면에 있는 빛무리만이 그나마 이 어두운 공간의 이정표였다.
‘그나저나…….’
마지막으로 루실리온이 했던 말이 의미심장했다.
“곧 다시 보자니, 무슨 소리야?”
7년 뒤에 다시 보자는 말을 한 건가?
루실리온은 항상 묘한 말을 한단 말이지. 나도 정신연령이 제법 높은데, 나보다 더한 어른미가 있었다.
‘애늙은이……라고 해야 되나.’
세상 모든 걸 다 내려다보는 기분이다.
나는 성큼성큼 길을 걸었다. 사방이 어두우니 괜히 느릿느릿 걸으면 더 위축될 것 같은 기분에 일부러 크게 크게 걸었다.
“언제까지 가야 하는 거야?”
다리가 아팠다.
출구로 보이는 곳이 가까워지는지도 잘 모르겠다. 다리를 통통 두드리며 다시 걸음을 옮길 때였다.
‘어? 조금 가까워졌나?’
빛무리가 조금 가까워졌다.
그렇게 한참을 더 걷고 나자 나는 곧 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문 앞에 서자 빛무리가 순식간에 다가와 나를 감쌌다. 눈이 부셔 절로 눈이 질끈 감겼다.
“어어……?!”
몸이 어딘가로 훅 빨아들여지는 기분이었다.
태양만큼이나 강렬하게 빛을 뿜어서 시야가 답답했던 순간이 지나고 이윽고 은은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으…….”
강렬한 빛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아서 실제로 빛이 사라지고도 나는 한참 만에 간신히 눈을 뜰 수 있었다.
“…….”
익숙한 천장을 마주함과 동시에 짧은 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병원은 아니네.’
하지만, 내가 지내던 자취방도 아니었다. 가족 모두와 함께 살던 그 집에 있는 내 방이었다.
‘나는 에이린이야. 지금은 차미소로 지내면서 수명까지 살기 위해서 왔어. 아빠는 에르노 에탐이고 나는 에탐 가문의 가주야.’
기억을 더듬어 기억나는 사람들의 이름을 전부 생각한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다행히 혹시나 했던 기억의 유실은 없었다.
왜 흔히 소설을 보면 그런 일이 있지 않던가, 다른 세계로 가면 이전 세계의 기억이 점점 희미해진다거나.
그런 기이한 현상들.
‘내가 너무 소설을 많이 봤나.’
뒷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낡은 침대, 낡은 책상 어린 날의 그것과 그다지 다른 것은 없었다.
‘아냐, 혹시 모르니까 써 놓자.’
하나밖에 없는 책장에서 빈 노트를 꺼내 나는 내 기억을 천천히 써 내려갔다.
싸구려 비밀일기장이었다. 열쇠가 달려 있는 일기장은 예전에 용돈을 모으고 모아 샀던 것이었다.
‘행복한 일이나 기쁜 일은 꼭 기록해 두자고 했었던 것 같은데…….’
지금 열어 보니 몇 페이지 적혀 있지 않았다. 적혀 있어 봐야 오늘은 엄마가 내게도 도넛을 하나 나눠줬다, 정도의 이야기였다.
‘그놈들이 먹다 남겨서 아까우니 줬다는 걸 알지만.’
그게 가장 기쁜 일이었던 적도 있지.
기억나는 것을 전부 제국어로 한 번 적고 혹시 몰라서 뒷페이지에는 한국어로 번역하듯 글을 적었다.
그리고 열쇠로 단단히 잠가 서랍 가장 안쪽에 밀어 넣었다.
‘일단 자취방으로 돌아가야겠다.’
그다음엔, 적금 든 거 전부 빼고 퇴사하면서 퇴직금도 받고…….
“오늘이 몇월 며……. 크흠.”
목소리가 퍽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괜스레 민망해 목을 몇 번이나 만졌다.
높은 시야가 썩 익숙하진 않다.
‘핸드폰은 없나?’
방에 시간이나 날짜를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달력은 있지만, 이미 아주 오래된 달력뿐이다.
방에 걸린 옷가지를 살피니 다행히 지갑은 있었다. 돈과 카드도 아직 있고 신분증도 있다.
‘자취방이 근데 안 빠졌으려나?’
월세도 꽤 안 냈을 테니 빠졌을 것 같긴 한데.
뒷머리를 긁적이며 방을 나서자 TV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내 인기척을 느낀 듯 거실에 앉아 있던 네 사람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미소?”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어머니였다.
“미소야……! 드디어, 일어났구나.”
늘 내게는 굳어 싸늘한 표정을 보여주던 어머니는 곧 울음이 터질 것처럼 일그러진 표정으로 내게 달려와 나를 끌어안았다.
아버지도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내 앞에 서서 퍽 그리운 사람을 마주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돌아간 세계는 네가 기억하는 것과는 다르게 네가 바라는 모든 것들이 네 눈앞에 있을 거야.] [명심할 건, 네가 생각하는 세상이 아니라는 거! 이건 가 보면 알 거야.]문득 아르마의 말이 떠오르며 그 의미가 단숨에 이해됐다.
잔인한 세계는 또다시 내 상처를 이용해 나를 어떻게 해보려고 하고 있었다.
“네가 일어날 거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내 아이는 그렇게 약하지 않으니까…….”
“…….”
“그동안, 미안했단다. 내가 너무…… 작고 편협한 생각에 사로잡혀서…… 그게 네 잘못은 아니었을 텐데…… 미안하다.”
“…….”
“뭐라고 말이라도 해보렴…….”
나는 내게 매달리는 어머니를 내려다보면서도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채근을 듣고서야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당신 딸, 죽은 지 오래예요.”
그날, 그 차 사고에서 나는 죽었다. 이곳에 있는 것은 껍데기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