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145
편지지 한 장에 커다랗고 굵은 글씨가 짧게 적힌 편지가 도착했다.
발신인은…….
“황성……, 맞네.”
몇 번을 다시 보고 눈을 비비고 보고 온몸을 박박 씻고 눈을 닦고 봐도 역시나 여전히 어떤 미사여구도 보이지 않는 단호한 편지였다.
“음…….”
대체 언제 무슨 연회에 참석하라는 건지 최소한의 안내도 하지 않으면 어쩌라는 걸까?
“에노쉬도 참…….”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내 옷을 챙겨주고 있는 로랑을 흘긋 보았다.
“흑…….”
다시 만난 로랑은 나만 보면 눈시울을 붉히고 울기 직전이었다.
“언제 이렇게 훌쩍 크셔서는…….”
기억보다 조금 더 연륜이 생긴 로랑은 예전에는 없던 주름이 눈가에 조금 보였다.
물론 여전히 나이에 비해서는 아주 젊어 보였지만 말이다.
“로랑, 언제까지 나만 보면 울 거야.”
“하지만, 흑……. 우리 아가씨……. 기특하시기도 하고…….”
어릴 때부터 봐와서 그런지 로랑은 나를 늘 애 취급을 한단 말이야.
하지만, 훌쩍 커버린 키가 아쉬운 것은 사실이다. 내가 못 본 사이 늘어버린 주름의 수만큼, 바뀐 계절의 수만큼, 어쩔 수 없는 아쉬움도 남았다.
“근데 에노쉬가 연회에 참석하라는데… 곧 황실에서 연회 열려?”
“앗, 네. 일 년에 두 번 귀족 가문의 가주끼리 모이는 연회가 있거든요. 아마 그 주기였을 거예요. 근데 아가씨는 아직…….”
“아직?”
“몸이 낫지 않았으니 참석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요!”
로랑이 주먹을 꼭 쥐며 말했다. 억울한 듯 눈을 부릅뜬 그녀를 보며 나는 까르르 웃었다.
나는 그녀를 보다가 뺨을 가볍게 문질렀다.
‘이것도 나쁘진 않은데.’
나는 가볍게 웃었다.
“그 연회 아빠가 참석하고 있었어?”
“아뇨.”
“그럼…… 차르니엘 삼촌?”
“아뇨.”
나는 눈을 끔뻑였다.
그럼 누가 참석하고 있었는데? 의아한 낯으로 고개를 기울이자 로랑이 빙긋 웃었다.
“아무도 참석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에탐 가문은 원래 이런 행사에 잘 참석하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아마 아가씨께 온 것도 압박이 아닐까 싶어요.”
나는 가만히 다시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여섯 글자에서도 분노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물론 어쩌면 ‘압박’이라는 정치적 이유일 수도 있긴 하겠지만…….
“아마 아닐 거야.”
그래도 그렇게 믿고 싶진 않았다. 친구의 화를 정치적인 이유로 생각해버리면 조금 그렇잖아.
아마 긴 시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일 확률이 높겠지.
“근데 나 가주라는 거 정식으로 발표는 안 했잖아.”
“안 해도 괜찮아요, 실제로 발표하기도 전에 연회엔 먼저 참석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고 들었고요.”
“그렇구나.”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칼렛한테 드레스랑 필요한 옷 제작은 요청해뒀으니까…….’
못 본 새 사교계에서 가장 유명한 화제의 디자이너가 된 스칼렛의 가게는 어느새 수도 중심의 가장 큰 가게가 되어 있었다.
직원도 어찌나 많은지 확 달라진 모습에 정말 입이 떡 벌어졌다.
‘나도 열심히 살아야지.’
응, 그래야지.
“참석하시려고요?”
“응.”
“아직 몸도 회복 안 되셨는데…….”
그놈의 몸이 가만히 있는다고 회복이나 되겠어?
애초에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생긴 체력 부족, 근력 부족의 문제인데 말이다.
“이제 슬슬 나도 돌아다녀야지, 언제까지 이 층에만 있겠어.”
아무리 아빠가 나를 과보호한다고 해도 말이다.
내 말에 로랑의 표정이 아쉬움에 톡 가라앉았다. 그 적나라한 감정에 나는 웃었다.
“있잖아, 난 꽤 잠을 자고 있었잖아. 로랑.”
“네? 네에…….”
“그래서 시간이 흐르는 게 너무 아쉬워. 자유롭게 살아보고 싶어.”
잃어버린 시간을 되돌릴 순 없겠지만, 그만큼 최선을 다해서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그러니까 조금 더 충실하게 살려고. 내가 할 일들이잖아.”
내게 주어진 직책이었다.
누군가의 딸도 아니고 반의 누군지도 모를 사람도 아니고 그냥 에이린 에탐이자 에탐 가주.
그게 바로 나였다.
“그러니까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진 말아줘.”
긴 시간 현대에서 고통스러웠던 때를 떠올리면 조금이라도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알겠습니다. 아가씨……, 아니…….”
로랑이 고개를 젓더니 이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가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저는 필사적으로 가주님을 보필하겠습니다.”
“응, 고마워.”
나는 로랑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내게 이렇게 무릎을 꿇진 않아도 돼. 로랑은 나한테, 아주 소중한 사람이니까.”
그런 사람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것은 전혀 바라지 않는 바였다.
로랑이 내 손을 조심스럽게 잡고 빠르게 일어났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물론입니다.”
로랑이 활짝 웃었다. 나도 로랑을 보며 마주 웃었다.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다.
* * *
왜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을까? 황성 연회가 겨우, 닷새 뒤였다는 사실을.
“로랑…….”
한숨을 푹 쉬며 연신 고개를 숙이던 로랑을 떠올리자 화낼 기분도 들지 않았다.
사실 딱히 화를 낼 건 없었다. 내가 한 거라곤 아침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어리바리 옷이 갈아입혀져 마차에 넣어진 것뿐이니까.
“벌써 이런 곳에 참석하겠다고 할 줄은 몰랐구나.”
“에노쉬가 참석하라고 하더라고요.”
화가 단단히 났나 봐요.
말을 덧붙이자 맞은편에 앉은 아빠가 코웃음을 쳤다.
“그깟 놈이 화를 내봤자지. 원하면 언제든지 말해라.”
“뭘 원해요……?”
“황위.”
“아빠, 그거 반역이에요.”
“네가 원한다면 황제 자리쯤 못 줄 것도 없지.”
그러니까 그게 반역이라니까요?
내가 아빠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아빠가 슬쩍 내 시선을 피해 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진심이긴 하다. 네가 원하면, 못 해줄 건 없어. 못 할 일도 없고.”
“저는…… 모두와 사이좋게 지내고 싶어요, 아빠. 높은 권력이나 엄청난 지배자가 되고 싶은 게 아니에요.”
그건 내가 드래곤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창틀에 팔을 올리고 손등에 턱을 괴었다.
“이렇게 아빠랑 있는 것도 친구를 만나러 가는 것도 좋아요. 저쪽 세계에선 한 번도 못 해봤는걸요.”
“그러냐.”
아빠가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살짝 헝클었다.
“네가 그렇다면 그걸 힘껏 도와주는 게 내가 할 일이란다.”
“…가끔 불안한 생각이 들어요.”
“불안한 생각?”
“이 모든 게 꿈만 같아서요. 제가 만든 세계면…….”
이 이상할 정도로 호의적이었던 사람들의 마음이 강제로 내게 조종당한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었다.
나는 고개를 휙휙 저었다. 아니야, 이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지.
“아무것도 아니에요.”
“에이린, 너는…….”
입술을 달싹이던 아빠가 문득 멈칫 굳었다. 살짝 커진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아빠…?”
입술을 달싹거리던 아빠가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아빠가 고개를 젓곤 굳게 입을 다문 채 아예 고개를 돌려버렸다. 무언가 믿을 수 없는 것을 발견한 사람처럼 기이한 행동이었다.
아빠는 황성으로 가는 내내 아무런 말도 없이 조용했다. 평소와는 다르게 무거운 분위기였다.
‘뭐지?’
이상하게도 불안한 기분이 등줄기를 스쳤다.
황성에 도착하자 이윽고 사용인들이 우리를 맞이했다. 안내받아서 도착한 연회장으로 향했다.
“아빠, 있잖아요. 그동안 연회에 참석 안 한 이유가…….”
천천히 걸어가는 내 옆을 걷던 아빠는 어느새 훌쩍 앞에 있었다.
처음이었다.
훌쩍 가까워진 뒤 아빠가 내 앞을 먼저 걷고 있는 것은.
어릴 적, 멀어져 가는 아빠의 뒷모습을 보던 때를 제외하면 말이다.
“아빠?”
내 부름에 흠칫 놀란 아빠가 눈을 크게 뜨며 걸음을 뚝 멈췄다. 그가 나를 바라보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빠, 괜찮아요?”
“…그래.”
아빠가 입술을 달싹였다.
아빠는 다시 내 옆으로 와 보폭을 맞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아빠가 이상했다.
보폭은 맞추지만, 앞을 바라본 채 나를 전혀 보지 않고 있었으니까.
우리가 연회장 안으로 들어가자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호기심과 기대감이 아니라, 마치 불쾌한 무언가를 보는 듯한 시선이 우르르 몰려 내게 꽂혔다.
채 카펫 위를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걸음이 멈췄다.
“아빠…….”
내가 손을 뻗어 아빠의 옷자락을 붙잡자 아빠가 뻣뻣하게 굳어 내게 고개를 돌렸다.
일그러진 아빠의 표정은 어딘가 고통에 잠겨 있었다. 무언가 불쾌한 감각과 싸우고 있기라도 한 듯한 표정이었다.
“아빠…….”
내가 당황해 아빠를 부르는 그때였다.
갑자기 사위가 새까맣게 물들며 어두워지더니 내가 있는 공간의 시간이 뚝 멈췄다.
그리고 허공에서 나타난 것은 신이었다.
그러니까, 루실리온이 모시는 신, ‘아르마’였다.
“아가야, 큰일 났어.”
소년의 형상을 한 신이 다급하게 내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