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148
한 시간쯤 지나 에노쉬까지 응접실로 돌아오자 우리는 각자 소파에 둘러앉을 수 있었다.
사실 그때까지는 괜히 설움이 북받쳐서 눈물이나 뚝뚝 흘리고 있었던 터라 괜히 부끄러웠다.
오자마자 에노쉬가…
“뭐야? 이 퉁퉁 불은 반죽은.”
…라고 하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지만 말이다.
“다들 근데 왜 여기에 있어…?”
“루실리온이 갑자기 내 방에 침입하더니 네가 위험해질 거라고 하던데.”
에노쉬가 인상을 팍 찡그리며 말했다.
“하여튼, 옛날부터 저 황족을 공경할 줄 모르는 무엄한 짓거리는 달라지질 않았어.”
팔짱을 낀 채 다리까지 꼰 에노쉬는 어릴 때와 다름없는 오만한 낯으로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정식 루트를 통하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요.”
생긋 웃으며 루실리온이 지지 않고 대답했다.
“그 적이라는 게 누군데? 말만 하면 세상에 다시는 얼굴 내밀지 못하고 죽여달라고 빌게 만들어 줄 수 있는데.”
리하르트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못 본 새 상당히 미친놈……, 아니. 호전적으로 변한 리하르트가 소파의 손잡이를 주먹으로 가볍게 내리치며 말했다.
‘마탑주한테 많이 시달린 걸까?’
훤칠하게 자라긴 했는데, 성격도 제법 기억과 많이 달랐다.
하긴, 바꾸고 싶어도 내가 이 세계에 있었던 날이 훨씬 적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겠지.
리하르트는 콜린 공작과 분위기가 흡사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옅어지는 색의 머리카락은 신비로움을 자아냈고 새하얀 피부와 날카롭게 뜬 눈은 남자고 여자고 전부 홀릴 것처럼 생겼다.
‘진짜 콜린 공작님이랑 똑 닮았네.’
왜 부자지간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 정도면 내가 찾아주지 않았어도 미래에 언젠가는 얼굴만 봐도 서로 부자인 걸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에노쉬는 한층 더 남성미와 카리스마가 짙어졌다.
오만한 눈빛과 나른한 포즈는 여전했지만, 그 외엔 예전과 다르게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루실리온은 또 어떻고.
나를 도와줬다는 건 루실리온도 나만큼의 시간을 포기했다는 것일 텐데도 루실리온은 정말 훌륭하게 성장했다.
성직자 특유의 분위기가 풍기는데 새파란 눈동자는 나를 단숨에 잡아먹을 것처럼 느껴졌다.
다정하게 휘어지는 눈꼬리나 입가는 어릴 때와 크게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았다.
은백색의 머리카락은 여전히 그를 청렴하게 보이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다들 무슨 버프라도 받고 있는 걸까?’
나를 포함해서 이들의 외모를 보다 보면 그냥 말문이 턱 막혔다.
“그래서 대체 뭐 때문에 연회장 분위기가 그랬는지 말을 좀 해 봐.”
에노쉬가 고개를 까딱였다.
“설명은 드린 대로입니다. 주인님에게 벌레가 한 마리 붙어서요. 이게 좀 귀찮은 벌레라, 사람의 뇌를 조종합니다.”
루실리온이 말했다.
뇌를 조종하는 게 아니라, 내가 만든 세계에서 쉽게 말해 버프가 사라진다는 얘기인데…….
내가 루실리온을 보자 루실리온은 나를 흘긋 보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어갔다.
“조종한다고?”
“네, 작은 불안이나 생각했던 나쁜 감정을 증폭시킨다고 하면 딱 맞겠네요.”
“…….”
“그래서 지금 다 반죽을 싫어한다고?”
에노쉬의 말에 릴리안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에노쉬가 어깨를 살짝 떨더니 냉큼 다시 입을 열었다.
“에이린.”
호칭을 뒤바꾸는 그 모습에 루실리온이 퍽 한심한 눈으로 에노쉬를 보았다.
에노쉬가 고개를 휙 돌렸다.
“네, 연회장에 모인 사람들은 주인님에 대한 호기심도 있겠지만…….”
루실리온이 빙긋 웃었다.
“두려움이 조금 더 크겠죠. 주인님은 대단하신 분이시니까요.”
사실 드래곤이어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는 것은 사실 인정하고 있었다.
종족이 다른데, 모두와 함께 세상 전부가 나를 좋아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그 벌레를 잡아야 한다는 거잖아?”
리하르트는 어딘가 퍽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턱을 괸 채 루실리온에게 말했다.
‘왜 저렇게 날이 서 있지?’
의아한 표정으로 리하르트를 바라보자 리하르트가 설핏 미간을 좁혔다.
“맞습니다.”
“어떻게 잡는데?”
“모릅니다.”
루실리온이 웃으며 대답했다. 리하르트의 눈썹이 크게 들썩였다.
“모른다는 건 뭐야? 놀리는 거야? 대충 아무나 잡아서 썰면 그중 하나는 정답이겠지. 안 그래?”
리하르트의 사나운 말에 루실리온이 눈을 가늘게 떴다. 루실리온의 눈썹도 한차례 들썩인 것 같았다.
“어떤 모습으로 어떤 생김새를 한 채 숨어 있는지 모르니까요. 그러니까 사실 당신들께 기대하는 건 별로 없습니다.”
해사하게 웃는 루실리온의 말에 에노쉬와 리하르트의 표정이 확 굳었다.
릴리안의 표정은 웃음이 한층 더 짙어졌는데, 어쩐지 차가운 겨울바람이 쌩하니 부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냥 주인님이 무너지지 않도록 옆에서 잘 보필해주기만 하시면…….”
쐐액-!
콰앙-!
검이 뽑히는 소리와 무언가가 날아오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루실리온은 제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소파에 꽂힌 에노쉬의 검과 그 반대쪽 소파를 움푹 태우고 사라진 마력 덩어리를 흘긋 보면서도 여유롭게 웃었다.
“주인님께서 다치면 어쩌려고 이런 불손한 짓을.”
“불손은 네가 하는 게 불손이라고 하는 거란다. 감히 황태자인 나한테…….”
에노쉬가 루실리온의 코앞에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대며 이를 악문 채 으르렁거렸다.
“친구 사이에 이것도 어렵습니까?”
“어느 친구가 이렇게 사람을 개무시하지?”
“여기 있잖습니까.”
루실리온이 말하자 에노쉬가 헛웃음을 흘리며 검을 확 뽑았다.
“너, 마음에 안 들어.”
리하르트가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뜬 그 모습에 도리어 당황한 건 나였다.
“저도 마음에 들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게다가 루실리온은 지지 않았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나를 위해서 모여줬다는 거잖아. 내가 키득키득 웃고 있으니 왁자지껄 떠들며 티격태격대던 세 사람이 내게 시선을 돌렸다.
“뭐야, 너 어디 아프냐? 반죽.”
“괜찮아? 에이린?”
“주인님, 금방 고쳐드리겠습니다.”
아니, 좀 웃었다고 사람을 아픈 사람 취급하네.
억울해서 입술을 툭 내밀자 릴리안이 조심스럽게 내 손을 붙잡아 왔다.
“상담을 할 사람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내게 말해줘요.”
아니, 나 문제없다고요.
“어쨌든 필요 없다니 사람 우습게 취급하지 마, 너.”
리하르트가 루실리온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마탑에서는 기본적인 예의를 가르치진 않는 모양입니다.”
“고리타분한 신전보단 낫겠지.”
루실리온의 말에 리하르트가 코웃음을 쳤다.
“원래 마탑과 신전은 사이가 안 좋다.”
“아…….”
“아니지, 마탑은 원래 전부 사이가 안 좋다.”
에노쉬가 설명을 덧붙였다. 리하르트의 드롭 귀걸이가 움직일 때마다 달랑거렸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건가요?”
릴리안이 물었다.
“누군지도 모르고 찾아낼 수도 없을 테니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릴 모은 이유는…….”
“당신들은 주인님의 도움을 받아 애정을 쌓은 종류의 사람이니까요.”
루실리온의 말에 세 사람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주인님께 이유 없는 애정을 주지 않았고 주인님으로 인해 잃어버린 것이 없으니 적의 공격이 통하지 않습니다.”
불쾌한 기억이나 나쁜 기억이 없으니 증폭될 기억도 없다고 덧붙이는 말에 에노쉬가 팔짱을 꼈다.
그러더니 다리를 까딱거리며 퍽 껄렁하게 입을 열었다.
“아닌데, 난 저 반죽에게 불만이 아주 많아.”
“그래봐야 연락을 안 했다는 내용이겠죠.”
루실리온의 말에 뻔뻔하게 입을 열려던 에노쉬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너……!”
“그것도 결국 애정에서 기반한 걱정이니까요.”
“…….”
나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린 채 에노쉬를 보다가 손으로 살짝 입을 가렸다.
“에노쉬……. 너…….”
내가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에노쉬를 바라보자 에노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입으로만 툴툴거리고…… 사실은, 나 좋아했구나…….”
내가 부러 과장된 낯으로 눈물을 닦는 척을 하자 에노쉬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맨날 잠이나 자는 게 좋기는 무슨……!!”
벌겋게 변한 얼굴로 에노쉬가 삿대질을 했다.
“푸흐…….”
그 표정이 어찌나 웃긴 지 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아하하하!”
내가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리자 에노쉬가 인상을 찡그리며 팔짱을 끼더니 나를 노려보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
“에휴. 그래도 웃으니 좋네. 이제 좀 웃음이 나오냐?”
에노쉬가 다리를 꼬며 퍽 퉁명스럽게 말했다. 문득 고개를 들자 다들 나를 퍽 흡족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응, 고마워.”
친구는 좋은 거구나.
차미소로 살 시절 남동생들을 목적으로 내게 다가와 친구라고 말했던 이들은 전부, 친구가 아니었던 거다.
“오냐, 고마워해라. 우민 반죽아.”
에노쉬의 말에 모두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