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15
내가 눈을 홉뜬 채 한참이나 홀로그램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미르엘 공작을 보았다.
“하라부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그의 다리에 폭삭 매달려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뭐, 뭐 하는 거냐, 이 솜털 같은 것이!”
“헤헤, 간샵니다!”
이걸로 집을 나갈 준비는 다 되었다.
“따님.”
내가 미르엘 공작의 다리에 매달려 헤실거리고 있는 때였다.
어느새 허리를 굽힌 에르노 에탐이 내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나를 달랑 들어 올렸다.
“지지야.”
그가 여상하게 말하며 빙긋 웃는 낯으로 내 팔찌에 검지와 중지를 얹었다.
파아앗-
이번에도 작은 빛무리가 번졌다가 사라졌다.
홀로그램이 떴다.
【 출금액: 100,000,000 Lo
총금액: 10,000,000 Lo 】
들어왔던 1억이 고스란히 빠져나가 사라졌다.
‘뭐야?!’
눈앞에서 증발한 돈에 내가 입을 떡 벌리며 에르노 에탐을 바라보았다.
“함부로 음식 주워 먹으면 배탈 난단다.”
“뭐라고? 이 패륜 놈이 진짜…!”
옳소, 옳소!
이, 이 사이코패스 같은 미친 인간!
‘그러고 보니 이 인간 8서클 마법사였지.’
그 말은 즉, 마탑의 시스템을 뚫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미친 마법사라는 거다.
‘이게 무섭지도 않나.’
마탑에서 추적이 들어올지도 모를 텐데.
황망함에 넋을 놓고 있으려니 그가 주머니에서 다이아몬드로 된 팔찌를 꺼내 내 팔찌에 가져다 댔다.
‘다이아?’
저건 분명히 플래티넘을 아득히 뛰어넘는 제국에서 겨우 5개만 발행되었다는…….
파아아앗-!
이번에는 아까보다 한층 더 밝은 빛무리가 새어 나왔다.
【 입금액: 1,000,000,000 Lo
총금액: 1,010,000,000 Lo 】
눈 깜짝할 사이에 0이 하나 더 생겼다.
이게 얼마야?
10억?
“알겠니? 따님.”
그래, 네 말이 다 옳다.
“네!! 아바지 사랑해여!”
나는 눈을 반짝이며 에르노 에탐의 목에 폴짝 매달려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어쩐지 그의 허리가 조금 뻣뻣해진 기분인데, 착각이겠지?
“정말 감삽니다, 아바지! 아바지가 채고! 천재! 머쨍이! 머찐 마완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칭찬을 열심히 내뱉었다.
‘이거면 죽을 때까지 일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혹시 이게 바로 이 놀이의 끝을 알리는 간접적인 신호인 걸까?
‘이 정도 돈이면 확실히 섬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나는 눈치껏 빠져 주면 되는 건가?
그의 품에 안긴 채 흘긋 아래를 보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고 있는 여주인공이 있었다.
새까만 흑단의 머리카락과 에르노 에탐과 부녀지간이라고 해도 믿을 것만 같은 벌꿀 같은 눈동자가 사랑스럽다.
표정은 밝고 호기심이 흘러넘쳤으며, 아직 어린 소녀에겐 싱그러운 생기가 흘렀다.
나는 아이를 보는 순간 깨달았다.
왜 이 아이가 여주인공일 수밖에 없는지.
왜 모든 주·조연의, 모든 어두운 부분을 걷어냈는지. 왜 모두가 그녀의 햇살 같은 면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는지.
이곳에서 나는 철저한 조연이었다.
엑스트라다.
눈을 마주친 순간, 여주인공이 해사한 낯으로 하얗게 웃었다.
결코, 이길 수 없는 빛이 그곳에 있었다.
“에르노 에탐!”
“혹시 가주님께선 제 말이 안 들리시나요? 조만간 청력에 좋은 음식을 보내겠습니다.”
“필요 없다! 그리고 아까 얘기했던 대로 이 아이는 네 누나의 아이니 입양하도록 해라. 네게 도움이 될 거다.”
에르노 에탐의 눈동자가 둥글게 휘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화사한 미소였다.
그리고 소설에서는 그의 이런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나는 꿀꺽 침을 삼키며 바짝 긴장했다.
“제게는 이미 딸이 있는데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는데요.”
“소꿉장난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아이는, ‘그것’을 진정시키는 능력이 있다.”
시종일관 건들거리며 건성으로 대화하던 에르노 에탐의 눈에 흥미가 깃들었다.
“……그 애가 말입니까?”
“그래, 너도 네 자식들에게 상처를 주고 싶진 않겠지.”
“……흠.”
그는 잠시 고민하듯 나를 한 차례 보고 다시 미르엘 공작의 다리 뒤에 숨은 아이를 보았다.
“아바지, 나 방에 가께여!”
방해꾼은 이쯤에서 빠져 줘야지.
어차피 에르노 에탐의 진짜 딸이 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으니까.
‘돈도 많이 벌었고.’
괜찮은 고아원도 알게 됐으니 이제 무사히 떠날 일만 남았다.
‘응, 완벽하고 괜찮아.’
내 활기찬 음성에 에르노 에탐은 순순히 나를 내려 주었다.
“나는 대화를 좀 하고 가겠다, 저녁 식사 때 데리러 가마.”
“네!”
다음을 기약하는 그 약속에 나는 활짝 웃으며 손을 붕붕 흔들었다.
밖으로 나오자 마일라가 기다렸다는 듯 내게 다가왔다.
“아가씨!”
“웅, 방에 가쟈.”
“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생각보다 금방 나오셨네요.”
“우움…… 용돈 바다써!”
용돈이라고 하기엔 아주 두둑한 돈이었지만 말이다.
내가 팔찌를 톡 두드리자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숫자가 흐뭇하다.
“나 낮짬 자 꺼야, 안뇽!”
“네? 갑자기 낮잠이요? 그러면 제가 잠자리를 준비해 드릴게요.”
“안야, 나 혼자 할 쑤 이써.”
나는 마일라에게 말하곤 방으로 쏙 들어가 문을 닫았다. 다행히 마일라는 더 물고 늘어지지 않고 물러났다.
슬슬 떠날 준비를 할 시간이었다.
나는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 가 지금껏 내가 모아 둔 물건을 조심조심 꺼냈다.
보자기를 펼치자 내가 모아 둔 물건들이 보였다.
아마 다른 귀족들 눈에는 잡동사니에 가까울 테지만…….
“요건…… 돌려주고 가까?”
돈을 많이 받았는데, 별관에서 훔친 것까지 가져가기엔 양심에 찔렸다.
‘별관 다녀와야겠다.’
그래도 저녁 식사는 같이하자고 했으니, 그전까지는 돌아와야지.
나는 의자를 끌고 와 문고리를 살짝 돌려 열고는 밖을 살폈다. 다행히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살금살금 방을 벗어나 짧은 다리를 열심히 움직여 별관으로 돌아갔다.
별관은 본 저택에 비해서는 꽤 조용했다.
“이건 여기였고……, 이건 저기였나?”
나는 내가 훔쳐 온 곳에 도로 물건을 하나하나 옮겨 두곤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오며 가며 병사들을 만나긴 했지만, 반갑게 인사하는 나를 유의 깊게 보진 않았다.
무사히 훔쳤던 것을 제자리에 돌려 두고 슬금슬금 별관으로 돌아오려는 때였다.
누군가 새하얀 천을 품에 안고 후다닥 뛰어가고 있었다.
‘……어? 마일라잖아?’
평소와는 다르게 마일라는 얼굴이 굳어 있었다.
잔뜩 긴장한 낯으로 주변을 살피던 마일라가 이내 별관 뒤쪽으로 후다닥 사라졌다.
“……머지?”
바쁜 일이라도 있는 건가?
‘아, 마일라가 오기 전에 돌아가야 하는데!’
마침 여기에 있으니 적어도 내가 늦을 일은 없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틈을 타서 재빨리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몸을 날렸다.
그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리를 주먹으로 통통 두드리며 저녁 식사를 기다렸다.
그렇게 다섯 시가 되었다.
‘으음, 슬슬 오려나.’
바짝 긴장한 채 기다린 탓인지 조금 지친 나는 침대 위를 데구루루 굴렀다.
여섯 시가 되었다.
‘조금 늦네…….’
가물가물 눈이 감기려는 것을 애써 비벼 가며 눈을 힘겹게 떴다.
일곱 시가 되었다.
여전히 에르노 에탐은 오지 않았다.
슬슬 불안한 감이 들었다.
보통 에르노 에탐과 함께하는 저녁 식사는 여섯 시를 넘기지 않았다.
‘일이 있는 거겠지.’
나는 애써 생각하며 근처에 있던 호랑이 인형을 품에 끌어안았다.
그러나 여덟 시가 되어도 에르노 에탐은 나타나지 않았다.
문득 깨달았다.
‘아, 이게 끝이구나.’
그 사람이 흥미를 잃는다는 게 이렇게 잊힌다는 뜻인가 싶었다.
“갠차나…….”
응, 나는 괜찮아.
늘 있는 일이니까.
[왜 안 오지…? 어머니가 분명히 오늘 가족끼리 다 같이 외식한다고 했는데…….]그날도 나는 그저 식탁에서 아버지가 했던 ‘내일은 가족끼리 다 같이 외식이나 하자꾸나.’라고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학교에서 돌아와 옷도 다 갈아입고 기다렸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들었다. 시계가 아홉 시를 넘어가자 나는 에르노 에탐을 기다리기를 포기했다.
자정이 되도록 옷도 갈아입지 않고 저녁 식사를 기다리고 있던 과거의 나와는 다르게 지금의 나는 애써 눈을 감았고 애꿎은 양을 세며 잠이 들기 위해 노력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에르노 에탐은 오지 않았다.
마치 나만 두고 외식을 하고 드라이브까지 다녀왔던 가족들처럼.
* * *
“세상에, 아가씨. 들으셨어요? 어제 에르노 공자님께서 근신령을 받으셨대요.”
평소와는 다르게 제법 일찍 눈이 떠져서 멍하니 앉아 있는데, 마일라가 밝은 얼굴로 들어왔다.
‘역시 어제는 뭔가 급한 일이 있었던 모양이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손등으로 눈두덩을 느릿느릿 비비며 대꾸했다.
“……아바지가? 왜?”
“글쎄요……. 그거까진 저도 잘 모르겠어요. 듣자 하니 공작 각하께서 화를 엄청나게 내셨다고 해요.”
그런 거라면 내가 싫어서 일부러 안 온 건 아닐지도 모르겠다.
나도 모르게 피어오르는 기대와 희망에 나는 흠칫 놀라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나는 생각을 털어냈다.
“아바지 보러 가도 대?”
“네, 아마 아가씨는 출입이 가능하실 거예요!”
“갈래!”
나는 침대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잠옷은 죽어도 안 된다고 비장한 얼굴로 길을 가로막는 마일라로 인해 시간이 조금 더 소요되긴 했지만.
‘아침 식사를 같이해도 되냐고 물어볼까?’
나는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방에 도착했다.
다행히 방문은 누가 열어 줘야 할 것처럼 꽉 닫혀 있지 않았다. 이상하게 앞을 지키는 병사도 없었다.
“마이라, 이제 가두 대!”
“네? 하지만…….”
“갠차나, 아바지랑 밥 먹꾸 갈게!”
내가 주먹을 꼭 쥐며 피력하자 마일라가 기특하다는 듯 제 입을 꼭 막았다.
“마, 마일라……?”
“아, 네. 그럼 물러나 보겠습니다.”
“웅.”
마일라는 행동과는 다르게 무언가 아쉬운 듯 나를 흘긋흘긋 보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섰다.
나는 슬쩍 문을 열기 위해서 문틈 사이에 손을 밀어 넣었다.
“확실히, 정말로 효과가 있구나.”
“네, 그러니까 부탁드려요…….”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분명히 그랬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