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150
시간이 지나면서 한 가지 확실해진 것은, 이 사람의 마음을 기묘하게 조종하는 별지기의 능력은 정말로 내가 직접 쌓아온 인연에 한해서는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잠시 영향을 받았던 사람들도 일주일 사이엔 대개 원래대로 돌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나와 연관이 없던 사람들은 이제 내게 호기심을 가지고 이유 없이 나를 좋아하거나 호의를 보이지 않았다.
드래곤이라는 사실은 꽤 많은 이들의 공포를 조성하는 모양이었다.
“이거 떨어뜨렸어.”
“아! 가, 감, 감사합니다. 실, 실례 많았습니다!”
내가 떨어진 수건을 가리키며 말하자 사용인이 흠칫 떨며 쭈뼛쭈뼛 다가와 수건을 줍더니 허리를 굽히며 후다닥 멀어졌다.
제 앞이 안 보일 정도로 거대한 산처럼 수건을 쌓고 도망가는 뒷모습이 정말 대단했다.
“음.”
“에이린.”
“아빠?”
“아랫것들 교육을 다시 해야겠구나.”
“됐어요, 뭘 또 교육을 다시 해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빠는 원래대로 돌아왔고 나와 오래 알고 지냈던 사람들도 처음에는 조금 꺼림직한 표정을 했지만, 점점 원래대로 돌아왔다.
저 하녀는 아마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하녀가 분명했다.
“그나저나 일전에 제가 말한 건 어떨 것 같아요?”
“그, 염색인지 하는 그거 말이니?”
“네, 샤르네 언니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런 약품을 만드는 건 가능할 것 같다는 답변을 받았거든요.”
“네가 말하는 계획대로만 한다면 분명히 훌륭한 상품이 나오겠지.”
아빠는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가만히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다정한 손길은 예전처럼 여전했지만, 아빠의 시선은 어딘가 예전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예전에는 가볍기만 하던 그 시선에 어떤 생각이나 상념 같은 것이 뒤섞인 느낌이었다는 거다.
“아빠, 요즘 누군가 찾고 있다고 들었어요. 누군지 물어봐도 돼요?”
그뿐만이 아니라 황성 지하 감옥에 감금된, 모두가 내 아빠라고 생각했던 개망나니를 몇 번 만나러 가기도 한 모양이었다.
‘아직 살아 있다는 게 더 신기하긴 했는데.’
아빠는 일주일 전에 있었던 가주들이 참석하는 연회에 다녀온 뒤, 내게 가주직의 전권을 넘겨주었다.
대놓고 네가 하라, 이렇게 명령한 것은 아니지만 대외적인 일부터 모든 일까지 내 의견을 묻고 내 결정을 따랐다.
그러자 에탐의 그림자 집단인 테렘의 태도도 바뀌었다.
그들은 모든 에탐의 주요 인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내게 보고했다.
멀리 원정을 떠났거나 테렘의 감시 범위에서 멀리 벗어난 경우엔 보고를 올리지 못했지만 말이다.
아카데미에도 사람을 심어놨는지, 칼란과 실리안은 물론이고 샤르네의 보고도 내게 들어오곤 했다.
‘다들 잘 지내고 있으니 다행이었지만.’
물론,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아카데미를 다니고 있는 다른 에탐의 방계의 아이들이나 매년 돈을 받아 가는 각 부서에 대한 보고도 이어졌다.
어떻게 할아버지인 미르엘 에탐이 매년 신년 회의 때마다 그렇게 사람들을 탈탈 털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테렘의 태도는 전혀 바뀌지 않았지.’
테렘과는 그렇게 친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대화를 많이 나눴던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나를 모셔야 하는 건 변함이 없어서 그런가?’
아니면, 테렘 자체가 좀 위압감이 있는 군림자를 원했기 때문에 드래곤인 나여도 괜찮았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궁금하니?”
“네.”
“널 개망나니에게 넘긴 사람을 찾고 있단다.”
“아……, 그런 거예요?”
나는 잠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에 멍하니 아빠를 보았다.
“그래, 무덤이 파헤쳐졌던 흔적을 발견했거든.”
“……무덤이요?”
“달리아의 무덤은 누군가 오래 전 한 차례 파헤쳤다. 그리고 다시 흙을 덮었지.”
아빠는 가주가 된 내게 더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다.
묻는 것이 있다면 꼬박꼬박 대답을 해 주었고 궁금한 것이 있다고 하면 충실하게 그것에 대해 알아봐 결과물을 내밀었다.
아빠는 묵묵하게 내 보좌를 해 주고 있었다.
늘, 타인의 위에 서고 누군가에게 받는 것만 익숙했던 아빠가…….
나를 위해서 내 곁에서 조력자의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으니 나도 아빠에게 더 어리광을 부릴 수가 없게 됐다.
그것이 못내 서운하고 조금은 아쉬우며……, 아주 약간은 속상했다.
“그럼……, 그 사람이 절 무덤에서 꺼낸 거라는 거예요?”
“나는 달리아의 죽음 이후에 달리아를 묻었다. 관이 닫히고…….”
아빠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다소 말을 하기가 힘든 사람처럼 입을 꾸욱 다물었다가 마저 말을 이어갔다.
“흙이 덮이는 것을 모두 보았지.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목격한 것이다.”
“……네.”
“그날, 나는 태어나지 못했다고 생각한 너 역시 함께 묻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살아 돌아왔다.
그것도 아빠의 딸이 아니라 타인의, 직계도 아닌 방계의 자식이 되어서.
모든 진실을 알았을 때 아빠는 자연스럽게 이해해 주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어쩌면 나 때문일 수도 있었다.
내가 이 세계를 창조했기 때문에 아빠의 당연한 의문을 나에 대한 호의로 포장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번에 별지기로 인해, 아빠가 혼란스러워진 사이에 묻어뒀던 그 의문이 다시 떠오른 것은 아닌가, 하는 다소 비약일지도 모르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거든. 네가 어떻게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건지도…….”
“…….”
“네가 살아있다는 걸 발견해서 무덤을 파내서 꺼낸 자가 굳이 내가 아닌 그놈에게 찾아간 이유도…….”
아빠는 나직하게 말했다.
“달리아의 죽음에 또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닌지도.”
아빠의 말은 이해가 됐다. 나를 탓하는 것도 아닌 것은 안다. 하지만 괜히 가슴 한쪽이 무거웠다.
“에이린.”
“네, 아빠.”
“미리 말하지만, 널 탓하거나 탓할 누군가를 찾기 위해서 알아보는 게 아니야.”
아빠가 말하며 손바닥으로 내 뺨을 가볍게 감쌌다. 무척 다정한 손길이었다.
여전히 아빠의 손은 따뜻했고 내 피부는 조금 차가웠으며 두 온도가 겹쳐서 만드는 미지근함이 좋았다.
“이번 일도 네 탓은 없다.”
“……네.”
“너는 단지 외로운 어린아이였을 뿐이지.”
아빠는 나를 품에 안아 언제나처럼 다정한 말을 속삭였다.
아빠는 내가 어느 세계에서 살다 왔는지도 알고 있고 이 세계를 만든 사람이 나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황성에서 며칠간 물고 돌아온 뒤엔 이번 일이 생긴 이유도 말해 주었다.
모든 것을 가만히 들은 아빠는 언제나처럼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했다.
“외로운 아이가 상상을 했고 그로 인해 세계가 태어나, 네가 그 세계에서 특별한 사람이 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야.”
아빠는 나를 품에 끌어안은 채 다정하게 속삭였다. 등을 토닥거리는 손길도 기분이 좋았다.
“너는 살고자 버둥거렸을 뿐이야. 만들어진 불행에서 벗어나고자.”
그래, 어쩌면 작은 불행에서 시작된 일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벗어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세상의 누군가는 나와 같은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네가 이제야 네 손으로 쥔 행복을 만끽하겠다고 하는데 방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
아빠의 말에 나는 서툴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있어도 내가 전부 없애마.”
다정한 말을 듣는 건 여전히 익숙하지 않지만, 그래도 머뭇거리는 발걸음이 조금 더 당당해지는 계기가 되는 것도 같았다.
‘부모님의 맹목적인 사랑이라는 말이 예전엔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지금은 알 것도 같았다.
그저 이유 없이 퍼부어 주는 애정이 이토록 달콤하다는 사실을, 나는 이 세계에 와서 몸소 배웠으니까.
“저 아주아주 행복해질 거예요.”
“그래.”
“누구보다 행복해져서……, 그래서, 아빠. 우리 오래오래 같이 살아요.”
나는 아빠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말했다.
“별지기도 어쩔 수 없을 때까지 행복해질 테니까…….”
아빠는 내 머리를 헝클더니 작게 웃었다. 나는 그 표정을 보며 아빠를 조금 더 힘껏 끌어안았다.
“제가 행복해지는 거, 지켜봐 주세요.”
이건 내게 주어진 어쩌면 사명 같은 것이었다.
“기대되는구나.”
“돈도 엄청나게 벌어서 효도도 할게요.”
“지금보다 더 벌면 나라를 하나 세워야겠는데?”
“……그것도 나쁘지 않고요.”
내 말에 아빠가 재밌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한결 가벼워진 분위기에 내 입가도 절로 풀어졌다.
우리도 어느새 함께 성장을 한 걸까? 아빠도 한결 어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손자 손녀도 보셔야죠.”
“……손자 손녀?”
“네, 재롱도 보시고 그리고…….”
“그건…….”
아빠가 빙긋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불만스럽지만 환한 미소였다.
“그건 마음에 안 드는데.”
“네?”
“네 결혼은 아직 내 머릿속에 없으니까 말이다. 널 노리는 놈팡이들은 많지만.”
“그래요…?”
나는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이날 이때껏 나는 남들 다 받아본다는 약혼 요청서나 혼인 신청서 같은 것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래, 되먹지도 않은 요청서는 오는 대로 내가 다 태웠거든.”
퍽 당당하게 말하는 아빠의 표정은 정말로 뿌듯해 보였다.
조금, 성장한 것 같다는 말은 살짝 정정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앞으로도 태울 테니 걱정 말거라.”
아니, 살짝 말고 조금 많이 정정해야 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