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152
“이 부근이었던 것 같은데…….”
늦은 밤 몰래 방을 빠져나온 나는 어두워진 길거리를 느리게 걸었다.
‘갓난아기 시절의 기억이 있다니…….’
사실 내가 보통의 사람이라면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아주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신기했다.
음, 별다른 느낌은 없는데.
하긴, 거의 20년이 다 되어가는 일인데 아직도 흔적 같은 것이 남아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겠지.
“뭔가 여기에 오면 될 것 같았는데.”
어둑해진 상점가는 간간이 술집만 불을 밝히고 있었다.
술에 취한 사람들이 비몽사몽 걸어가는 것뿐, 특별하고 별다른 흔적은 없었다.
‘내 착각이었나.’
여기에 오면 나를 개망나니에게 넘긴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제 창조주 버프 같은 것도 사라졌다고 하니까…….’
생각하는 대로 이뤄질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하면 안 되겠지.
“돌아갈까?”
로브 끝을 매만지다가 막 몸을 돌리려는 때였다. 뒤를 돌자 새까만 로브를 쓴 누군가가 내 뒤에 우뚝 서 있었다.
나는 흠칫 놀라 반사적으로 뒷걸음을 쳤다가 이내 걸음을 뚝 멈췄다.
“이건 또, 그리운 얼굴이구나.”
어딘가 귀에 익은 목소리를 낸 상대는 여자인 듯 가느다란 소프라노 톤의 미성을 흘리고 있었다.
너무나도 듣기 좋은 미성이었던 터라 도리어 더 경계심이 생겼다.
잠깐이라도 방심하면 경계고 뭐고 다 풀어져 술이나 한잔 기울이며 인생 고된 이야기를 줄줄 풀어놓고 있을 것 같았으니까 말이다.
“누구……, 세요?”
“저런,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냐, 아니면 기억하지 않으려는 것이냐?”
로브를 쓴 여자의 고개가 기우뚱 비스듬히 기울었다. 다소 기이하게 보이는 행동이었다.
“제대로 설명을 해 주지 않으시면 누구라고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최근에 만나신 분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에 남아 있는 목소리다. 로브 아래로 여자의 입술이 둥글게 호선을 그리는 모습이 보였다.
“어허, 어린 것이 퍽 똑 부러지는구나. 하지만 생명의 은인을 이렇게 대접하는 건 조금 아쉽구나.”
생명의 은인?
그제야 내가 여기에 온 이유가 떠올랐다. 그리고 어릴 적, 떠올랐던 기억까지도.
[이 아이는…… 없이…… 자라야만…… 운명……. 드래곤은…… 죽는 일도 흔했다.] [그래야만…… 미래가 평탄하고 행복해진다고 하니…….] [……아픈 일이지.] [기억해라, 이 아이는 네 아이다.]누군가가 나를 개망나니에게 넘겼다. 내용은 제대로 기억나지 않지만, 드문드문 떠오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설마, 제가 어릴 때…….”
“그래! 내가 그 흙더미에서 널 끄집어내 그 죽어가는 숨통을 터주었지.”
여자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언뜻 날카로운 송곳니가 보였다. 여자는 퍽 즐거운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그녀의 새하얀 피부가 눈에 들어왔다. 새하얀 피부와 분홍색 눈동자, 그리고 은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아름다운 여자였다.
나이는 40대쯤 되어 보이지만, 어쩐지 그보다 나이가 더 많을 것 같았다.
“영혼은 잘 정착했고 제대로 자리도 잡았구나. 별 같잖은 것이 하나 들러붙은 것 같기는 하다만…….”
그녀는 눈을 반짝 빛내며 얼굴을 바싹 들이밀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코앞에 다가온 얼굴에도 어쩐지 피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 더는 세상에 후배는 태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또 동지가 태어났구나.”
“……동지라니 설마.”
“그래, 나도 너와 같은 존재란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너보다는 약한 존재이지.”
여자가 눈을 번쩍 빛내며 말했다. 분홍빛 홍채 사이에서 황금빛 안광이 번뜩인 것도 같았다.
“나는 퍼플. 그냥 그렇게 불러주면 된다. 이 세계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드래곤이지.”
역시 그랬구나.
마지막 기억 속 얼굴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낯설지 않은, 친숙한 느낌이었다.
“…어르신께서 절 살려주신 건가요?”
“결론을 따지면 그렇겠지만, 내 긴 잠을 깨운 것은 너였단다.”
“저요?”
“그래, 네가 살고자 나를 불렀지.”
“제가요……?”
그때는 이 세계에 내가 없었을 텐데.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녀는 말없이 그저 웃었다.
“궁금한 것이 있어서 찾아왔어요.”
“궁금한 거? 이 늙은이에게 말이냐?”
외향은 아주 정정한 40대처럼 보이는데, 말투만큼은 아주 나이 많은 노부인 같아 괴리가 느껴졌다.
“무엇이?”
“제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게 됐는지, 그리고…… 제 어머니가. 왜 절 품게 됐는지가 궁금합니다.”
“흐음…….”
“그 모든 것에… 창조주의 의지가 들어갔는지도요.”
내 말에 퍼플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성의 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퍽 관심이 없다는 표정에 도리어 초조해진 것은 나였다. 생각해 보면 그녀는 전혀 아쉬운 것이 없을 테니까 말이다.
‘너무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온 건가?’
하지만, 오늘따라 어쩐지 생각보다는 몸이 먼저 움직였다.
“혹시 제가 궁금해하던 것들에 대해 알고 계신가요?”
“알고 있지.”
여자는 로브를 벗으며 빙긋 웃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꼼지락거렸다.
“나는 네가 어떤 존재인지도 알고 있단다.”
“…알고 있다고요?”
“그래, 세계를 창조하고도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하는, 소모품.”
그 단호하고도 냉정한 말에 어깨가 절로 크게 떨렸다.
“불쌍하고 가련한 존재들.”
미소가 초승달처럼 걸렸다. 눈은 웃지 않는, 불쾌한 미소였다.
“망가지면 그 존재를 뭉개 다시 새로운 영혼으로 만들지. 그래, 마치 망가진 철을 뜨거운 열로 녹여 다시 새로운 물건으로 만들어 내는 것처럼.”
아픈 곳을 웃는 낯으로 푹푹 찌르는 것이 썩 달갑지 않았다.
내 표정이 굳어가는 것을 보았는지 그녀는 어느새 눈까지 접어 웃고 있었다.
“너무 그렇게 불쾌하게 여기지 말렴. 세계의 평가를 말하는 것뿐이야.”
내 의견이 아니라는 거야.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그 굴레에서 유일하게 벗어난 영혼이지.”
“…….”
“나는 아주 많은 걸 알고 많은 걸 보았단다. 이 세계가 태어날 때부터 나는 존재했지. 신보다도 더 오래된 존재가 바로 나란다.”
“신보다도…….”
“신은 완성된 세계에 신앙이 생기고 만들어진 끝에야 생겨나는 존재지. 그 훨씬 이전에 존재했지.”
내가 모르는 건 없다는 이야기란다.
덧붙이는 말에 절로 몸이 바짝 긴장됐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진실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알려 주실 수 있나요?”
“알려 주는 건 어렵지 않지.”
“그러면……!”
“내가 알려 주면 뭘 해 줄 거니?”
그녀가 빙긋 웃으며 물었다.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나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주먹을 꽉 쥐었다.
“뭐든, 할 수 있는 거라면요. 돈이나…, 뭔가 원하시는 게 있다면…….”
“돈은 내겐 아무런 값어치가 없단다. 그래. 내가 사는 집으로 오겠니?”
“네?”
“내 말동무나 해 주렴. 나는 아주 심심하고 외로우니까 말이야. 고독이 끔찍해서 나는 지쳤다. 그래서 아주 오랜 시간 잠을 잤거든. 그리고 널 기다렸단다.”
그녀가 웃었다.
그 웃음이 어쩐지 기괴하게 보였다. 눈도 입도 전부 텅 비어서 새까만 어둠이 들어찬 것만 같았다.
“말동무라면…….”
“그래, 내 수명이 다할 때까지란다. 얼마 남지 않았어. 너는 앞으로 수천 년을 더 살아가겠지만, 내겐 이제 많아 봐야 500년이거든.”
그 감도 잡히지 않는 숫자에 입이 절로 떡하니 벌어졌다. 하지만 못 해줄 것은 없었다.
나도 어쨌든 같은 동족이 필요는 할 테니까. 그리고 그녀가 얼마나 긴 시간 외로웠을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래, 뭐 말동무 정도야…….’
어려운 일도 아니다. 왔다 갔다 하며 가끔은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었다.
내가 막 긍정의 대답을 하려는 때였다.
“단, 내 집에 오는 순간부터 500년은 나갈 수 없단다.”
그녀가 얼굴을 바싹 들이대며 말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절로 입이 벌어졌다.
“그게 무슨…….”
“죽기 전까지 내 말동무만 해 준다면, 원하는 게 무엇이든 내 전부를 주고 가마.”
“그건…….”
나는 입술을 뻐끔거리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제안이었다.
“그건 할 수 없어요.”
“그래? 그럼 나도 네게 알려 줄 건 없단다.”
여자가 가볍게 뒤로 물러났다.
“우리의 만남은 여기서 끝이겠구나.”
여자의 몸이 조금씩 산화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나는 깜짝 놀라 손을 뻗었다.
“저기!”
“……어쭈, 어린 게 멱살을 잡는구나? 네 부모는 가정교육을 이렇게 시키더냐?”
“그게, 저기… 그건 죄송한데. 알려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양손으로 멱살을 꽉 잡은 채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내 안의 노인 공경 사상이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지만, 그보다는 아빠에게 진실을 알려 주고 싶었다.
“그렇게 알고 싶으냐? 세상을 살다 보면 결국 아무것도 아니게 될 그런 이야기 쪼가리를?”
“그게 중요한 사람도 있습니다.”
“……아, 그래? 그럼 간단하겠구나.”
“500년은 안 됩니다.”
“그래, 그럼 내 부탁을 들어주면 되겠구나.”
“부탁…, 이요?”
“그래. 들어준다면…… 얘기를 못 해 줄 것도 없지.”
드래곤이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었다.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답은 정해져 있었다.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