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155
가볍게 소파에 걸터앉은 리하르트는 손으로 구슬 두 개를 가볍게 부딪히며 가지고 놀았다.
따각, 따각 부딪히는 소리 사이로 나는 다소 미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맨날 이런 일에만 불러서 미안해.”
“괜찮아, 어차피 요즘 할 일도 없고 심심했거든. 너도…….”
크흠, 리하르트가 한차례 헛기침을 하더니 슬쩍 시선을 피했다가 다시 나를 보았다.
“잘 지내는지 궁금했어. 그래서 뭔데?”
“아, 궁금한 게 있어서.”
“궁금한 거?”
“그리고 도움도 필요할지도…….”
내가 슬쩍 말끝을 흐리자 리하르트는 따닥거리며 가지고 놀던 구슬을 가볍게 손으로 쥐었다.
그러자 구슬이 순식간에 물처럼 흘러내려 사라졌다.
“뭔데?”
리하르트가 빙긋 웃으며 상체를 숙였다. 장난꾸러기 같은 낯으로 그가 아랫입술을 살짝 핥았다.
“티안 메이플의 푸른 철이라고 혹시 알아?”
“티안 메이플?”
리하르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설마 내 입에서 그런 단어가 나올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의아한 낯으로 잠시 기다리자 리하르트가 금세 입을 열었다.
“그 단어는 어디서 들었어? 요즘 늙은이 빼고는 잘 안 쓰는 말인데.”
“늙은이?”
“아……, 지금 있는 마탑주님. 슬슬 나한테 자리를 넘겨줄 때가 됐는데 영 내려가질 않네.”
그러고 보니 이맘때쯤엔 이미 리하르트가 마탑주가 됐었던 것 같은데.
‘…이제 정해진 내용대로 흘러가진 않는 건가?’
내가 만들었든, 세상 누가 만들었든 말이다.
나는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리하르트를 보다가 슬쩍 웃었다. 이 변화가 부디 나쁜 변화가 아니길 바랄 뿐이다.
“티안 메이플의 푸른 철은, 마탑이 소유한 광산에서 나는 철이야. 마도구를 만들 때 사용되거든.”
“마도구?”
“응, 달빛의 기운을 머금어서 어두운 곳에 들고 가면 철에서 푸른 빛이 은은하게 흘러나온다고 해서 푸른 철이라고 불러.”
“와…, 그렇구나.”
“응. 마탑 소유의 산에서는 마석이 많이 나거든. 그 마석의 힘을 빨아들여서 만들어진 철이라 푸른 빛을 띠는 모양이더라고.”
리하르트의 설명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법 박학다식한 그 모습에 사뭇 놀란 탓이다.
늘 장난기가 가득하고 한없이 가벼운 모습만 보다가 이런 이례적인 모습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근데 그 철은 왜? 지금은 티안 메이플이 아니라 그냥 단풍산이라고 불려. 마탑이 강제로 온도 습도를 관리하는 터라 사시사철 단풍잎이 가득한 산이거든.”
“관리한다고? 왜?”
“마석이 자라나기에 가장 좋은 날씨가 있거든.”
나는 리하르트의 설명을 들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마석도 키우는 줄은 몰랐는데.’
나는 뺨을 살짝 문지르며 웃었다. 문득 마석에 물을 주는 상상을 하니 웃음이 터진 탓이다.
“그 철, 혹시 내가 살 수 있을까?”
“살 수 있냐고?”
리하르트가 퍽 난감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으음, 얼마나?”
“1톤……?”
내가 말하면서도 민망하기 짝이 없는 숫자였다. 아무리 철이 무겁다고 하지만 1톤의 숫자가 차지하는 크기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1톤이라고?”
아니나 다를까 리하르트의 입이 떡하니 벌어지더니 믿기지 않는 얼굴로 내게 한 차례 더 확인했다.
“그건, 마탑에서 사용하는 1년 치 양인데?”
“1년?”
리하르트의 설명에 나 역시 말문이 막혔다.
마치 이 금액은 국가 예산의 1년 치 분량입니다, 하는 어딘가에서 들었던 말이 들려오는 기분이었다.
“1년에 채굴할 수 있는 양이 그 정도밖에 안 되거든.”
“……아.”
어쩐지 이 목록을 얻는 것도 굉장히 어려울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퍼플이 내어준 숙제 중에 뭐 하나 편한 일이 없었다.
“돈을 주고 살 순 없을까?”
“마탑에서 벌어들이는 1년 치 수익을 줘야 할 텐데 아무리 그래도 개인으로 운용하는 돈으로 해결하기엔 너무 많지 않을까?”
리하르트의 상당히 현실적인 조언에 내 입은 또다시 조개처럼 다물렸다.
“그래도, 어떻게 부탁해볼 수 없을까? 재고도 없어?”
“재고? 재고는……. 글쎄, 나는 모르겠고 마탑주님한테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
“음…….”
결국 돌려 돌려 거절인 걸까?
마탑 소유의 산을 딱 지목해, 딱 1년 치 분량을 말한 걸 보아선 아무리 생각해도 고의적이다.
“……그렇구나.”
정말 그냥 여기서 포기할 수밖에 없나?
‘다른 방법으로 알아낼 순 없겠지?’
그 상황의 목격자라고 해 봐야 개망나니와 그 퍼플이라는 드래곤 뿐인데, 하나는 제대로 기억이 안 난다고 하고 하나는 가르쳐 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정말로 500년을 허비할 순 없잖아.’
50년도 아니고 자그마치 500년이다. 살아 있을 거라는 다소 작은 기대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게 가지고 싶어?”
실망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리하르트는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응, 꼭 필요한 일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손을 댈 순 없는 일 같아.”
“마탑주님이랑 대화해 볼래?”
“…대화?”
“응, 내가 미래의 마탑주라곤 하지만, 아직은 아니어서 권한은 없거든.”
리하르트가 말했다.
“하지만, 마탑주님이라면 뭐 허락해 주실지도 몰라.”
그 늙은이가 악독하긴 해도 대화가 안 통하는 사람은 아니거든.
덧붙이는 말은 퍽 짓궂기는 했으나 그 목소리에 담긴 것은 제법 단단한 신뢰였다.
“그럼 부탁해도 될까?”
“좋아.”
리하르트가 손을 내밀었다.
“손?”
“바로 마탑으로 가야지. 난 마탑주님 방에 다이렉트로 출입이 가능하거든.”
이런 특혜를 받은 마법사는 몇 안 된다며 제법 뿌듯하게 말하는 리하르트의 표정은 아주 만족스러워 보였다.
리하르트가 내민 손을 가만히 바라보던 나는 스스럼없이 손을 붙잡았다.
리하르트의 어깨가 흠칫 떨리더니 이내 귓불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소년이 애써 고개를 숙여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하더니 냉큼 손가락을 튕겼다.
“가자, 에이린.”
“응.”
“눈 꽉 감고 있어.”
“알겠어, 고마워.”
나는 인사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눈을 질끈 감았다. 한차례 몸이 살짝 흔들리는 것도 같더니 이윽고 공기가 바뀌었다.
리하르트가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이제 눈 떠도 돼, 에이린.”
한 걸음 뒤로 물러난 리하르트가 빙긋 웃었다.
“마탑에 온 걸 환영해.”
리하르트가 두 팔을 벌려 개구지게 웃으며 말했다. 그의 긴 드롭 귀걸이가 퍽 영롱하게 반짝이며 흔들렸다.
“와아…….”
나는 고개를 젖혀 천장이 보이지 않는 높은 탑을 보았다.
마탑은 허공이 뻥 뚫려서 끝이 보이질 않았다. 텅 빈 로비처럼 보이는 아주 넓은 공간에는 계단으로 보이는 곳만 존재했다.
“여기가 마탑이야?”
“응, 여기는 로비층. 진짜 마탑은 2층부터 시작해.”
“2층? 계단을 올라가야 해?”
“아니, 여기서 한 번 더 마법을 쓰면 돼. 바깥에서 오는 모든 마법사는 한 번은 무조건 로비를 통하게 되어 있거든.”
리하르트의 설명에 나는 귀를 기울였다. 리하르트가 퍽 신이 난 듯 내 손을 잡고 가볍게 움직였다.
“이대로 마탑주님의 방에 가자.”
“바로? 예고도 없이 들어가도 돼?”
“응, 뭐…….”
리하르트가 설핏 웃었다.
“어차피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 그 인간은 다 보고 듣고 있을 거야.”
“어떻게?”
“이 로비. 로비를 거치는 것들은 그게 개미건 사람이건 혹은 식물이건 모두 마탑주님의 눈에 닿게 되어 있거든.”
마탑주가 바로 마지막 방어선이라는 거구나.
누가 들어오는지 전부 감시하고 분별하는 존재. 그러고 보니 에도 그런 존재가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만든 설정이었지.
‘만물을 내려다보는 눈.’
마법사의 정점에 오른 자라면 그 눈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 그때는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내게 다가오는 나쁜 사람을 걸러 줬으면 했었던가.’
희미하게 돌아온 기억을 더듬어 보니 아마도 그랬던 것 같다.
이 로비도 내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겠지. 내가 만든 것이다. 외롭고 고독한 나를 누군가 지켜 주길 바라서.
‘리하르트도 나중에 얻게 되는 눈이고.’
정확히는 마탑주인 리하르트에게 준 능력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아마 우리가 올 것도 알고 있을 거야.”
“응.”
“갈게, 잠깐 눈 감아.”
리하르트가 맞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내 눈꺼풀을 가볍게 닫아 다정하게 눌러 주었다,
훅-!
공기가 뒤바뀌는 순간 갑작스럽게 바람이 몰아닥쳤다.
나는 짧은 숨을 내뱉으며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는 로브를 쓴 남자가 있었다. 퍽 거만해 보이며 오만해 보이는, 세상 모든 것을 다 굽어살필 것만 같은 40대의 외형을 한 남자였다.
중후한 낯의 그가 아주 천천히 입을 열자 무거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오랫동안 기다렸…….”
“웬 똥폼이야? 스승.”
그리고 위엄은 한없이 가벼운 목소리에 부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