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157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와 리하르트는 마탑에서 강제로 추방됐다.
마지막으로 본 마탑주는 볼이 퉁퉁 부어선 과장되게도 얼음주머니를 볼에 댄 채 느릿느릿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서로 마주 보다가 한숨을 깊게 쉬었을 때야 우리는 조금 마음이 편한 얼굴로 입을 열 수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리하르트였다.
“미안해, 에이린.”
“아니, 네가 미안할 건 없지. 내가 먼저 억지스러운 부탁을 한 거잖아. 도리어 내가 더 미안해.”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푹 숙였다.
졸지에 리하르트가 줄곧 숨겨오고 내가 애써 모른 척해 오던, 그 아픈 부분을 서로 알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리하르트는 다소 우울하고 음침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채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죽여버린다던가, 저주라던가, 망할 마탑주, 늙은이 같은 단어가 종종 들리는 것을 보아하니 좋은 내용은 아닐 것 같았다.
‘괜히 내가 다 미안하네.’
뭐라고 사과를 해야 할지 말을 더 해야 할지 모르겠다.
“신경 쓰지 마, 나쁜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닐 거야. 그 스승이 좀 짜증 나고 늙었는데 중년인 척하고 멍청하긴 해도…… 실력 하나만은 진짜거든.”
리하르트의 말에 나는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네가 미안할 건 없어. 난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어.”
“…….”
내 말에 리하르트의 눈이 살짝 커졌다. 리하르트가 입술을 꾹 깨물더니 천천히 나를 보았다.
“왜 아무렇지도 않았어?”
리하르트가 한 걸음 내게 다가왔다.
“어? 그러니까 마탑주님은 농담이나 장난을 가볍게 하신 걸 테니까…….”
“그 인간이, 비록 쓰레기 같고 성격이라곤 파탄 난 인간이긴 하지만 그래도…….”
“…….”
“거짓말은 안 해.”
어? 여기서 이렇게 진지하게 받아 버리면 나는 어떡하는데.
내가 당황해서 입술만 뻐끔거리자 리하르트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표정을 굳혔다.
“아무렇지도 않아 하지 말아줘.”
“……리하르트.”
“알고 있어. 네가 그런 마음이 없다는 건. 그래도…….”
리하르트의 눈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혼신의 힘을 다해 제 감정을 쥐어짜 내고 있는 그의 표정은 다소 고통스럽게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도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면 속상해.”
“…….”
나는 조심스럽게 눈동자를 굴렸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이런 직설적인 대화법에 대체 뭐라고 말을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던 탓이다.
짧게 숨을 내쉬며 나는 애꿎은 손만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에이린.”
“응.”
“나, 아직도 너 좋아해.”
“…….”
“그러니까 아무렇지 않다고 하지 말아 줘.”
리하르트의 말에 나는 대답을 고민했다.
어떤 말을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어쩌면 상처를 주고 싶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이제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잖아.”
“…응, 아무 데도 가진 않아.”
“그러니까…….”
“하지만, 리하르트.”
다급히 그의 고백에 대한 답을 하려고 했을 때였다.
리하르트의 손이 내 입을 조심스럽게 눌렀다. 커다란 손은 아주 잘게 떨리고 있었다.
“답은, 나중에 해 주면 안 돼?”
“…….”
“조금만 더 생각해 보고 해 줘. 우리, 너랑 나, 생각보다 오래 같이 있지 못했잖아.”
리하르트가 말했다.
손끝이 잘게 떨리고 있어도 시선을 피하진 않았다. 나보다도 훨씬 용기가 있었다.
“가족이 되기로 했는데 그러지도 못했어. 근데 지금 생각해 보면 가족이 되지 않아서 다행이야.”
나는 여전히 그의 손에 입이 막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좋아해, 에이린. 좋아해…….”
곧이라도 흩어져 없어질 것 같은 고백이었다. 나는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내가 조금 더 노력해 볼게. 그러니까…….”
떨리는 시선을 숨기지 않은 채 소년이 나를 보았다.
“내게 기회를 한 번만 줄래?”
리하르트의 손이 아주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기회?”
“응, 내가 너한테 나를 알릴 수 있는 기회. 너랑 있을 기회. 여태 그런 거 없었잖아.”
도마뱀이었던 시절을 제외하면 말이야.
덧붙이는 목소리에 나는 거절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이토록 애절한 목소리를, 고백을 거절하는 법을 나는 알지 못했다.
“…알겠어.”
내 대답에 리하르트의 눈이 커졌다.
“정말로?”
“응, 정말로. 나는…….”
나는 어떤 말을 하려다가 그냥 관뒀다. 고맙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지금은 어울리지 않는다.
리하르트는 그걸 바라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에이린이 짧은 숨을 뱉었다.
“혼자, 붉은 광산에 가기 무서울 것 같은데…….”
사실은 혼자서 갈 생각이었다.
내게는 테렘이 있었고 나를 지키는 호위 기사들도 있었으니까.
“나랑 같이 갈래? 리하르트.”
나는 손을 쭉 내밀었다.
내 말을 들은 리하르트의 눈이 순식간에 커졌다.
이것이 아마 리하르트가 원하는 기회일 것이고 내가 줄 수 있는 기회일 것이다.
리하르트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를 보며 나는 빙긋 웃었다.
“싫어?”
허공에 놓인 손이 퍽 쓸쓸하게 보여서 한 차례 더 묻자 리하르트가 고개를 붕붕 저으며 냉큼 내 손을 붙잡았다.
“아니, 당연히 좋지.”
“응, 고마워.”
“천만에, 얼마든지 가 줄 수 있어. 네가 원한다면.”
바라던 바라고 덧붙이는 리하르트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있었다.
행복해 보이는 리하르트를 보고 있으니 괜히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웃자 그도 웃었다.
우리는 마주 보며 웃었다.
처음으로 홀가분하게 모든 것을 내려 두고 솔직한 감정을 품은 채 서로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 * *
리하르트는 마법을 쓸 수 있었지만, 타국을 넘나들 때는 기본적으로 마법을 쓰지 않는 것이 관례인 모양이었다.
우리는 이틀 정도를 에템 가문에 머무르면서 잠시 나갔다 올 준비를 했다.
아빠한테 얘기하자 아빠는 눈을 부릅뜨며 꼬치꼬치 캐물었는데, 그러다가 리하르트와 둘이서 간다고 하니까 아예 리하르트를 데리고 열 시간도 넘게 면담을 진행했다.
다시 나온 리하르트가 핼쑥해져서 나온 것은 그다지 비밀은 아니었다.
붉은 광산.
이건 낯이 익는 이름이었다.
붉은 광산에 있는 설표의 눈물도 준비물 중의 하나였으니까 말이다.
붉은 광산은 수인국에 있는 광산인데 붉은 철이 난다고 했다. 푸른 철과는 다르지만 이것도 뭐 다양한 마도구 제작에 쓰인다고 들었다.
정확히는 푸른 철의 반대되는 요소인 듯 보였지만.
‘문제는 청화무인데…….’
일단 어쩔 수 없어서 다른 사람에게 관리를 맡겨 두기는 했는데, 시간이 된다면 와서 다른 미션을 수행하는 동안 다시 심어서 기를 생각이었다.
‘설마 이렇게 떠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기껏 고생한 것이 물거품이 되는 것만 같은 느낌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에이린, 준비 다 했어?”
“응, 입국서류도 우리보다 먼저 도착할 예정이래.”
“그럼 출발해볼까?”
“좋아.”
리하르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를 해 주려는 모양이었다.
‘…조금, 민망하네.’
리하르트의 고백을 듣고 난 뒤라 그런지 조금 민망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흠흠, 갈까?”
에스코트가 아니었네.
손을 맞잡은 리하르트가 항구를 향해 느릿느릿 걷기 시작했다.
명백히 나와 보폭을 맞춰 주고 있는 것이었다.
평소엔 의식하지 않았던 그 사소한 배려까지 이제 괜히 의식되고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진짜 첫 연애 하는 초등학생도 아니고…….’
어릴 때부터 봐 온 친구에게 이런 느낌이 들 건 또 뭐란 말인가.
나는 붙잡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얼굴을 두어 번 거칠게 쓸었다. 화장을 하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에이린, 뱃멀미는 안 해?”
“음, 잘 모르겠는데… 아마 안 하지 않을까?”
전생에는 딱히 멀미를 했던 기억도 없었으니까 말이다.
리하르트와 함께 배에 올랐다. 커다란 여객선은 곧장 수인국으로 가는 배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배 위에는 수인이 굉장히 많이 있었다.
‘와, 사람도 많네.’
아마 수인국 입장에선 강제적으로 맺은 조약이 꽤 많았을 텐데 이렇게까지 잘 풀린 건 놀라울 정도로 의외네.
보통은 서로 악감정이 생기니까 말이다.
“에이린, 이쪽 선실인가 봐.”
갑판을 잠시 구경하고 있던 나를 리하르트가 냉큼 이끌었다. 나는 리하르트에게 이끌려 선실로 향했다.
1등석 중에서도 가장 넓어 보이는 선실로 리하르트가 나를 안내했다.
“들어가시죠, 레이디.”
리하르트가 퍽 멋쩍은 표정으로 냉큼 문을 열어 주었다.
“푸핫.”
퍽 귀여운 그 모습에 웃음을 터뜨리자 리하르트의 표정이 벌겋게 물들었다.
리하르트는 내가 들어가기를 기다렸다가 한참 만에 쭈뼛쭈뼛 내 뒤를 쫓아 들어왔다.
부우우우-!
짐을 다 내려놓자 이윽고 커다란 뱃고동 소리와 함께 배가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