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159
“이쪽입니다. 그럼 푹 쉬십시오.”
토끼 수인인 듯 머리 위에 새하얀 귀를 쫑긋하게 달고 있는 사용인이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재빨리 사라졌다.
“어……?”
“잠깐!”
리하르트와 내가 당황해서 동시에 그녀를 불렀지만, 토끼 수인은 아주 빨랐다.
“방을 하나만 주면 어떡해…….”
다행히 침대는 아주 넓었지만 말이다.
둘이 아니라 사람 네다섯이 자도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조금 당황스러운 것은 분명했다.
“어, 쩔 수 없지.”
리하르트는 벌겋게 물든 얼굴을 손등으로 벅벅 문지르더니 큰 보폭으로 들어가 겉옷을 벗었다.
‘테렘도 어디 있겠지?’
늘 말하지 않아도 잘 쫓아다녔으니까 말이다.
“욕실도 두 개네. 나 이쪽에서 씻고 나올게, 리하르트.”
“아, 으응. 응! 난 그럼 이쪽!”
리하르트가 후다닥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설렁줄을 흔들다 말고 훌쩍 사라진 리하르트를 보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시중 안 받아도 되나?’
하긴 리하르트나 나나 고아원에서도 있어 봤으니까 말이다.
나는 혼자 씻으려고 할 때마다 로랑이 절대 안 된다고 온몸으로 사수했기 때문인지 이제 시중이 있어야 도리어 씻을 수 있게 됐다.
‘이것도 어리광일까?’
생각하며 들어 온 사용인을 바라봤다. 아까 토끼 사용인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아, 근데 기왕 불렀으니까 그냥 방 바꿔 달라고 해도…….’
나는 들어 온 사용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리하르트가 나왔다가 괜히 실망하는 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나 씻고 싶은데.”
“금방 준비하겠습니다.”
“응, 고마워요.”
나는 사람들을 따라 욕실로 들어갔다.
나도 꽤 느릿느릿 씻고 나왔는데도 아직 리하르트는 나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엄청 오래 씻네.’
욕조에 꽤 오래 들어가 있나 싶었다. 몸을 다 씻고 나니 괜히 노곤노곤해졌다.
침대에 꾸물꾸물 들어가니 구름 같은 푹신함에 잠이 솔솔 몰려왔다.
‘너무 편하잖아…….’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쏟아지는 잠을 도저히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침대였다.
‘대체 침대를 뭐로 만들면…….’
이렇게 생각한 게 내 마지막 기억이었다.
침대는 너무나도 포근했다.
* * *
“에이린, 나 다 씻었…….”
온몸을 벅벅 씻다 못해 찬물로 몇 번이나 샤워를 끝낸 리하르트가 나왔다.
혹시나 같은 침대에서 자다가 몸에서 냄새가 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머리를 감고 또 감고 또 감았다.
그뿐이랴, 몸은 얼마나 씻었고. 나중에는 피부 껍질이 벗겨질 것 같아서 샤워를 멈췄다.
쌔액 쌔액-
작은 숨소리에 입을 열었던 리하르트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에이린이 이미 세상모르고 침대에서 잠을 자고 있었던 탓이다.
왜 굳이 웅크려서 자는지 모를 자세로 에이린은 자고 있었다.
리하르트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에이린의 웅크린 몸을 펴주었다.
그 위에 덮지 않은 이불까지 푹 덮어주자 에이린은 한결 편한 얼굴로 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에이린.”
리하르트가 에이린의 이름을 작게 불렀다.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촛불은 꺼지고 샹들리에도 빛을 잃었다. 커튼까지 스르륵 닫히자 완연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에이린.”
다시 한번 에이린을 불렀다.
리하르트는 에이린이 가지고 싶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도마뱀이었던 그 시절부터, 에이린은 제 것인 것만 같았다. 평생 함께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에이린…….”
에이린의 대답을 사실 알고는 있었다. 그럼에도 답을 미룬 것은, 일말의 희망이라도 가지고 싶었던 탓이다.
그것이 설령 헛된 희망이고 이뤄지지 않을 꿈이라고 할지라도.
“넌 내 거였는데. 이 거짓말쟁이.”
에이린에게선 답이 없었다.
색색 숨을 고르는 그 소리에서 리하르트는 그저 눈을 감았다가 뜨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거짓말쟁이라고 하더라도……, 지금의 행복한 에이린이 훨씬 보기 좋은 것은 사실이었다.
“좋아해.”
도마뱀이었던 그 시절부터 좋아했다.
그 작은 몸으로 제 설움을 삼켜 주려고 버둥거리던 그때부터.
하지만, 리하르트도 알고는 있었다. 고아원에 있는 내내 에이린의 마음은 아주 먼 곳에 있었다.
긴 시간 고아원에서 나가 사실은 가족에게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렇겠지. 그래서 에이린은 기회가 왔을 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에이린에게는 항상 우선인 것들이 있다. 1번인 것들이 있었다. 그다음엔 2번이 있었고 3번이 있었다.
아마 에이린의 세 손가락 안에 ‘리하르트 콜린’이라는 이름은 없겠지.
숨기는 것이 아주 많은 에이린은, 늘 많은 것을 혼자서 해결하려고 들었다.
“그래도 서운하단 말이야.”
좋아하는 사람을 떠나서 친구로서도 의지가 되지 않는 것 같아서, 아주 서운했다.
“내가 널 가장 먼저 알았는데.”
지금은 황태자가 된 그 황자보다도 대신관이 된 그 재수 없는 놈보다도, 리하르트 콜린이.
바로 자신이, 에이린을 가장 먼저 알아보았다.
“에이린 바보.”
리하르트가 작게 중얼거렸다. 어차피 닿지 않을 말임을 알기에 작은 서운함을 표출해 보는 것이다.
“포기 안 할 거야.”
좋아하는 걸 포기할 필요는 없잖아.
“네가, 그대로 내 도마뱀이어도 좋았을 텐데.”
이뤄지지 않을 소망을 어둠에 숨에 음습하게 읊조린 리하르트가 에이린의 손을 한 차례 꾹 잡았다 놓았다.
한참이나 물끄러미 에이린을 내려다보던 리하르트가 침대를 한 바퀴 돌아 침대 반대쪽에 누웠다.
침대가 살짝 출렁이는 느낌이 들었는지 에이린의 몸이 살짝 뒤척이더니 리하르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거 좀, 힘드네.”
에이린에게서 좋은 냄새가 났다.
은은한 꽃향기였다. 이 나라에 흐드러지게 핀 꽃의 냄새다.
‘머리가 아프다고만 생각했는데…….’
짜증 나는 냄새가 에이린과 섞이니 다소 기분이 좋아지는 것도 같았다.
리하르트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잠이 잘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것과는 다르게, 생각보다 잠은 순식간에 몰려왔다.
이내 어두컴컴해진 방 안에는 고른 두 사람의 숨소리만 퍼져나갔다.
* * *
‘으응…….’
머릿속이 가볍고 개운했다. 아주 오랜 시간 잠을 잘 잔 느낌마저 들었다.
‘조금 춥나…….’
데굴데굴 굴러 반사적으로 누군가의 품에 기어들어 갔다가 흠칫 놀라 눈을 번쩍 떴다.
“헉….”
눈을 뜨자 아직 새근새근 자고 있는 리하르트가 있었다. 아침부터 눈이 부신 미모였다.
‘…내 눈.’
나는 손을 들어 눈두덩을 꾹 눌렀다가 애벌레처럼 꼬물꼬물 움직여 슬쩍 뒤로 물러났다.
살짝 눈을 뜨자 아직도 리하르트는 잠을 자고 있었다.
‘심장아…….’
저 잘생긴 얼굴을 어쩌면 좋니.
진짜 누가 이 애를 짓궂은 사람으로 볼 거야.
‘근데 벌써 아침이야?’
머리가 너무 개운하다 했다.
꼬르르륵-
꼼짝없이 굶은 탓인지 배도 고팠다. 누가 수면제를 탄 것도 아닌데 너무 잘 잤다.
‘배가 불편하기는 했지.’
풍랑까지 몇 번 만나서 밤에도 배가 흔들리면 계속 깨서 상황을 살피곤 했다.
리하르트는 자도 된다고 하지만, 미친 듯이 흔들리는 배 안에서 잘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을 거야.
“세계가 달라지니 내가 좋다는 사람도 있네.”
내가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고, 무시하지 말아 달라고, 그렇게 얼굴을 붉히며 고백하는 사람이 있었다.
‘행복하네.’
응, 행복해.
이런 소소한 일상과 행복을 늘 바랐던 건데 그게 너무나도 쉽게 손에 들어왔다.
‘아니, 쉽진 않았을지도.’
물끄러미 리하르트를 바라보고 있는데 리하르트가 눈을 끔뻑였다.
“안녕, 좋은 아침이야.”
리하르트가 멍한 얼굴로 눈을 한 번 더 깜빡였다. 아직 상황이 파악되지 않은 표정이었다.
내가 생긋 웃자 그제야 리하르트가 눈을 크게 뜨곤 몇 차례나 눈을 깜빡이다가 입을 벌렸다.
“에, 에, 에이린?!”
리하르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부스스한 머리를 보며 내가 작게 웃음을 터뜨리자 리하르트가 손바닥으로 머리를 꾹 눌렀다.
“왜. 왜 보고 있었어…….”
“너무 잘 자기에…, 미안해.”
“깨워 주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푹 숙인 리하르트가 웅얼거렸다.
“미안, 배 안 고파?”
내가 팔을 뻗어 설렁줄을 붙잡으며 묻자 리하르트가 귓불까지 새빨갛게 붉힌 채 고개를 끄덕였다.
“리하르트.”
“……응. 배고파.”
“좋아, 일단 식사부터 하자.”
“응, 일단…… 나. 머리 좀 만지고 올게!”
리하르트가 후다닥 제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마법은 어디에다 두고…….”
그만큼 당황한 것이 보였기에 나는 가볍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설렁줄을 흔들어 식사를 준비해 달라고 부탁한 나는 옷을 갈아입으며 리하르트를 기다렸다.
리하르트는 음식이 다 나오고서야 간신히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시뻘건 얼굴을 한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