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16
에르노 에탐은 모두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를 낸다. 그의 심기를 거스를 때도 그는 그저 웃는다.
웃음이야말로 그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였다.
모두에게 다정하진 않지만, 적의가 없다면 그는 모두에게 같은 톤의 목소리로 같은 거리를 두는 공평한 사람이다.
그 말은 즉, 누구도 특별하지 않다는 의미다.
모두에게 다정한 사람이 누구 하나를 특별히 여기지 않는 것처럼.
그러나 그런 에르노 에탐도 두 아들의 앞에서만큼은 본색을 드러낸다.
두 아들에겐 무표정한 얼굴을 하며 잘 웃지도 않는다.
그 모습이 진짜임을 질리도록 소설을 본 나는 알고 있다.
문틈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이렇게 될 건 알고 있었지만.’
여주인공과 세계관 내 강자가 이렇게 만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곧 여주인공의 활약을 볼 수 있겠지?’
그래도 실제로 둘이 함께 있는 걸 보니까 기분이 조금 이상한데.
나는 문 앞에서 서성이다가 뺨을 긁적이며 들어갈지 말지 잠시 고민했다.
“음.”
한참이나 고민하던 나는 결국 느리게 걸음을 돌렸다.
내가 낄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따님, 왜 안 들어와?”
날 발견한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나는 분명히 내 방으로 돌아가 짐을 마저 쌌을 것이다.
“어, 아바지…, 바쁜 거 가타서여.”
“아니, 별로 바쁘지 않다. 이리 오렴.”
그는 여전히 다정한 목소리로 문을 열고 나와 내게 두 팔을 뻗었다.
분명 목소리는 다정하지만, 진심은 아니다.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다.
“아바지 하라부지한테 혼나써여?”
“내가?”
그가 우습지도 않은 소리를 들었다는 듯 가볍게 미소 지었다.
“글쎄다……. 곧 가주님이 내게 달려올 건 알겠구나.”
그는 씩 웃었다. 짓궂은 악동의 얼굴로.
“네?”
“3, 2, 1, 뒤를 보렴.”
“에르노 에탐! 이 씹어먹어도 부족한 망할 놈이……! 네놈이 지금 무슨 짓거리를 했는지 알기나 하느냐! 다른 놈들은 대가리가 꽃밭이라지만, 네놈 머리에는 아주 마구니가 들어차서는……!”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정말로 미르엘 공작이 검을 뽑아 든 채 모습을 드러냈다.
붉으락푸르락한 얼굴은 그야말로 지옥에서 막 기어 나온 악귀라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 손에 쥔 검이 분노로 요동쳤다. 붉은 불꽃을 뿜어내는 검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저게 드래곤의 유물.’
드래곤의 뼈와 비늘을 세상의 끝에나 존재한다는 미스릴과 섞어 용암불에 달구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검이었다.
에 따르면 에탐 가문에는 드래곤의 유물이 세 개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불꽃을 품고 태어나 어떤 불꽃으로도 녹일 수 없고 흠집도 낼 수 없다는 저 ‘업화의 염’이라는 검이었다.
“가주님, 상황을 좀 가리시지요. 내 따님이 듣기엔 상스럽잖습니까.”
“딸이라니…….”
그제야 미르엘 공작의 시선이 에르노 에탐의 품에 안긴 나에게 닿았다.
그리고 그 아래에 있는 여주인공에게도 닿았다.
“애들 앞에서 제법 어르신다우십니다, 아니면…… 안경이라도 하나 맞춰드릴지요?”
“이, 가는 곳마다 사고만 치고 다니며 내 얼굴에 똥칠이나 하는 천하의 몹쓸 놈이……!”
“저런, 그런 걸 칠할 얼굴이 남아는 계신지.”
에르노 에탐이 그야말로 화사한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감히 가문 명의의 광산을 개인 명의로 빼돌려? 네놈이 생각이 있어? 없어!”
“세월의 흐름에 이빨이 나가신 건 알겠지만, 말은 똑바로 하시지요, 가주님. 저는 제 몫을 받아 간 것뿐입니다.”
“뭐라?”
“예전에 주시기로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기억 안 나십니까?”
“이, 허우대만 멀쩡한 놈이 헛소리하지 마라! 내가 언제 네놈에게 가문 사유지를 주기로 했느냐!”
에르노 에탐의 얼굴이 한층 더 화사해졌다. 그는, 지금 기분이 몹시 나쁜 모양이다.
“했습니다.”
“내가 언제!”
에르노 에탐의 입술 사이로 짧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정확히는 이렇게 말씀하셨죠. ‘네놈이 앞으로도 그따위로 한심하고 하찮은 인생을 살 거라면 내가 죽은 뒤 네놈에게 갈 유산이라고는 저기 있는 뒷산밖에 없을 줄 알아라.’라고 정확히 말씀하셨습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듯한 정확한 음절에 미르엘 공작도 무언가 떠오르는 것이 있는지 새하얗게 질렸다.
“그건 그때 네놈이 거절하지 않았느냐……!”
“생각해 보니 앞으로도 이따위 인생을 살 예정이니……, 그냥 받기로 했습니다.”
그가 해사하게 웃었다.
그야말로 변덕왕다운 말이었다.
즐거움이 가득 담긴 하얀 미소가 그의 입가에 그려졌다.
“대가리에 바람구멍이라도 났느냐? 미친 개소리 말고 당장 돌려놓거라!”
미르엘 공작의 분노에 에르노 에탐이 예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왈왈.”
그 모습을 본 태산 같던 미르엘 공작이 기어코 뒷목을 붙잡았다.
“이, 이놈의 새끼가……!”
“이만 나가 주시죠, 가주님. 난 내 따님과 할 얘기가 있으니.”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에르노 에탐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공간이 늘어났다.
땅이 길어지고 있는 것처럼 미르엘 공작과 우리의 거리가 순식간에 멀어지더니 어느새 공작은 눈앞에 사라지고 없었다.
콰앙-!
바깥에서 굉음이 들렸지만,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에르노 에탐은 평화로웠다.
“이제야 시끄러운 개가 집으로 돌아갔구나.”
에르노 에탐이 여상하게 말하며 침대에 앉아 나를 무릎에 앉혔다.
사방이 침묵에 휩싸였다. 뭘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눈앞에 무언가 불쑥 튀어나왔다.
“안녕?”
눈앞에 화사한 미소를 띤 소녀가 얼굴을 훅 들이밀었다.
여주인공이었다.
‘와아…….’
나는 바짝 긴장한 채 숨을 삼켰다. 그녀는 누가 봐도 사랑스럽다고 생각할 정도로 귀엽고 예뻤다.
피부는 하얬고 뺨은 잘 자란 듯 오동통했으며 홍조를 띤 얼굴에선 한 점의 그늘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응, 안뇽.”
“나는 샤르네라고 해. 여덟 살이고!”
이 여주인공은 여기서 행복해지겠지? 소설에서처럼.
부럽다.
순간 든 생각에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나는 나대로 잘 먹고 살면 되고.’
통장이 두둑해져서 망설일 필요는 거의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에르노 에탐이 확실히 말을 해 주는 것뿐이다.
슬쩍 에르노 에탐을 보자 그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허락했으니 움직여야지.
“난 에이링야. 다섯 쨜.”
“다섯? 그럼 내가 언니네?”
“으음…….”
나이로 따지자면 물론 그렇게 되겠지만…….
내 정신 연령이 약간…….
“언니!”
“…….”
여주인공이 나를 반짝반짝한 눈으로 보고 있다.
“내가 언니지?”
“…….”
뭘 원하는지 알 것 같다.
“응?”
“…….”
아무리 시선을 피해도 반짝반짝한 시선이 떠나질 않는다.
“어, 언니야……?”
입술이 잘 떨어지지 않았지만, 나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 순간이었다.
“꺄아아악!”
여주인공이 나를 덥석 끌어안았다.
‘……어?’
에르노 에탐의 무릎에 앉아 있던 터라 몸이 크게 흔들리진 않았지만, 약간 놀랐다.
“나 예전부터 여동생이 너무너무 가지고 싶었어…!”
“으응…?”
눈을 반짝 빛내는 여주인공이 나를 꼭 끌어안았다.
‘뭐지?’
이맘때의 여주인공은, 살짝 우수에 젖어 있지 않았던가?
기억하기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서 한동안은 우울했다는 묘사를 기억한다.
“와, 부들부들해.”
환하게 웃으며 내 뺨을 매만지는 여주인공을 보며 내 입가도 결국 흐물흐물하게 풀어졌다.
슬퍼하는 것보단 낫지.
나는, 여주인공을 좋아했다.
겨우 활자일 뿐이었지만,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나와는 전혀 다른 슬픔을 겪고, 밝고 당당하게 모두에게 사랑받으며 살아가는 여주인공이 좋았다.
처음에는 단지 라는 제목을 보고 들어온 것뿐이었다.
겨우 여자아이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미운 오리 새끼처럼 살았던 나와 비슷할 것 같아서.
로맨스 판타지 소설은 대부분 해피엔딩으로 끝나니까 자기 위안이라도 해 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던 소설.
“여동생이 최고야…, 할아버님은 왜 여동생이 있다는 얘기는 하지 않으셨담? 네가 있다고 했으면 고민하지도 않았을 텐데. 정말 너무 귀여워.”
부끄럽지도 않은지 후루룩 칭찬을 내뱉는 여주인공을 보며 나는 절로 할 말을 잃었다.
정말 한 점의 어두움도 보이질 않았다.
의 여주인공은 늘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찾는 존재였다.
수많은 단점 속에서도 반드시 장점을 찾아낸다.
‘역시 여주인공은 달라지지 않는구나.’
늘 활자 속에서 활약하며 내 동경의 대상이 되었던 여주인공이 눈앞에서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있노라니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이건, 원작을 직관할 기회인가?’
나는 어차피 에르노 에탐이 질리면 떠나게 되겠지만, 그래도 그때까진 원작을 바로 옆에서 볼 수 있는 기회잖아?
툴툴대고 차가운 데다가 필요할 때만 여주인공을 이용해 먹던 에르노 에탐이 조금씩 여주인공과 함께 식사도 하게 되고 선물도 가져다주게 되는 변화의 시초!
‘물론 끝까지 타 소설처럼 딸바보가 되는 일은 없지만…….’
사실 그런 걸 기대했던 나로서는 다소 아쉬운 전개이긴 했다.
의 이야기가 전개되며 많은 주·조연이 여주인공에게 각자 다른 의미의 사랑을 읊조린다.
하지만, 에르노 에탐은 마지막까지 여주인공을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다.
“네가 외삼촌의 딸 맞지?”
“으응.”
나는 대답하면서도 에르노 에탐의 눈치를 살짝 살폈다.
에르노 에탐은 다행히 조용히 앉은 채 언제나처럼 내 뺨을 조물딱거렸다.
한때 나는 여주인공처럼 되고 싶었다. 여주인공처럼 행동하려고 노력했던 적도 있다.
그렇게 하면, 가족들이 나를 사랑해 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내가 꿈꾸었던 모든 것은 활자 위의 허상이었고 나는 여주인공이 아니었다.
문득, 여주인공과 에르노 에탐의 관계를 조금 더 돈독하게 만들고 싶어졌다.
원작 소설을 뛰어넘고 싶다.
그래서 여주인공이 원작보다 훨씬 행복해질 수 있도록.
“아바지, 저 이제 가께여!”
갑작스럽게 떠오른 계획에 그의 무릎에서 폴짝 뛰어내리자 에르노 에탐의 미간에 미미하게 금이 갔다.
“어디를?”
“방에 가여.”
“벌써?”
“네!”
그는 잠시 침묵했다. 나는 꾸벅 허리를 숙이곤 종종걸음으로 문을 향했다.
“따님.”
“네?”
“어제, 함께 식사하자고 해 놓고 가지 못했는데, 식사는 잘했느냐?”
막 문을 나서던 내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나는 이내 만면에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네! 마시썼어여!”
목표가 생겼으니 조금이라도 더 이 집에 들러붙을 이유가 생겼다.
‘여전히 길어 봐야 반년이겠지만…….’
그래도 그때까진 귀찮지 않은 아이가 되어야지.
“……그래?”
“네!”
언제나처럼 그림 같은 미소를 띠고 있는 에르노 에탐의 입꼬리가 살짝 아래로 내려갔다는 것을, 아쉽게도 이맘때의 나는 눈치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