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164
“아, 어…… 부탁할 일이 있어서. 근데 그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것 좀…….”
그만두면 안 될까.
정말 부끄럽다. 서로 어엿한 성인이 되었는데 아직도 과거의 그 호칭을 들고 있으려니 말이다.
“그냥 에이린으로 충분해.”
“하지만 그렇게 부르면…….”
루실리온이 물끄러미 나를 보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참을 수 없을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어요?”
“참아? 뭘 참아?”
“뭐든요.”
빙긋 웃는 그 목소리에 몸이 절로 멈칫했다. 말투는 다정하고 목소리도 상냥한데, 약간 등줄기가 섬찟한 기분이었다.
“주인님으로 계시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고 이대로 있을 수 있잖아요.”
“…….”
“‘주인님’은 제가 모셔야 할 존재니까 하극상도 일어나지 않을 테고.”
루실리온의 말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한 터라 미간은 절로 찌푸려졌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그냥, 정말 제가 주인님을 에이린으로 호칭해도 되는 건가 해서요.”
“…안 될 게 뭐가 있어. 너 아까부터 좀 이상하다.”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루실리온이 낮게 웃으며 내 손을 가볍게 붙잡은 채 허리를 숙였다.
소파에 엉거주춤 앉아 있던 내 코앞까지 그의 몸이 바싹 달라붙었다.
“에이린.”
루실리온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바싹 붙어 귓가에 속삭이는 이름 하나가 어쩐지 오싹한 기분을 들게 했다.
“에이린.”
“…왜, 왜……?”
코앞까지 다가온 루실리온은 꽤 피로해 보였다.
눈 밑은 조금 퀭했고 피곤한 듯 눈가에는 옅은 주름이 자리하고 있었다.
“보고 싶었어요.”
루실리온이 상체를 조금 더 숙이더니 앉은 내 어깨에 제 이마를 가볍게 문질렀다.
“나, 나도 보고 싶었어.”
“정말요?”
내 대답에 그가 반색하며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바닥을 마주하곤 손가락에 깍지를 끼더니 그대로 손을 맞잡아 버렸다.
“에이린.”
“왜…….”
내가 널 에이린이라고 부르겠다는 건.”
루실리온의 말이 갑작스럽게 짧아졌다. 어색함에 당황한 사이 그가 훌쩍 다가왔다.
그가 내 목덜미에 바싹 입술을 가져다 댔다. 피부에 직접 닿지는 않았지만, 숨결만큼은 아주 뜨겁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런 욕망도 숨기지 않겠다는 뜻이야.”
“루실, 리온……?”
이건 또 무슨 일이야.
내가 새하얗게 질린 낯으로 루실리온을 바라보자 루실리온은 이윽고 언제 그랬냐는 듯 깔끔하게 물러섰다.
입술이 닿은 것도 아닌데, 숨결의 뜨거운 열기만은 여전히 목덜미에 남아 있었다.
“너…….”
“에이린.”
“…….”
“네가 허락한 거야. 알았지?”
루실리온이 빙긋 웃더니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맞은편 소파에 가 앉았다.
“그래서 무슨 일로 오셨나요?”
“어? 그…….”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당황스러운 기분에 목덜미를 꾹꾹 누르다가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뭔가 방금 지나간 것이 현실이 아닌 것만 같아서 있는 힘껏 고개를 붕붕 저었다.
앞을 보자 루실리온은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상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아, 그게…….”
“응.”
그래, 그는 언제나와 같은 다정한 표정으로 상냥하게 대답했다.
“신록의 거울, 이라는 게 필요한데…… 혹시 알고 있나 해서.”
“신록의 거울?”
루실리온이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그가 고개를 저었다.
“들어 본 적이 없는데, 혹시 어디서 들으셨나요?”
“그게 크루노 삼촌한테 물어보니까 대대로 대신관한테 전해지는 성물이라고 해서…….”
“아, 저는 전달받은 바가 없는데요.”
“삼촌 말로는 네가 정식으로 대신관이 된 게 아니라서 전달받지 못한 거라고 하더라고.”
“전 대신관은 이미 죽었을 테니 찾을 곳이 없다는 거군요.”
그는 차마 내가 전하지 못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올렸다.
그래도 알던 사람이 죽은 거라서 불편하게 여기지 않을까 싶었는데.
“왜요?”
루실리온이 나를 보곤 웃었다.
“대신관이 죽었다는 걸 알고 있었구나 싶어서.”
“당연하죠, 그가 죽은 사실은 이미 예전에 알고 있었어요. 추모 요청도 왔었고.”
아, 전 대신관이었으니 그런 예우를 갖춰 달라고 연락할 수도 있겠구나.
“물론, 거절했지만요.”
“어?”
“제가 준 돈으로 사치와 향락에 빠져 있다가 죽었는데 양심상 어떻게 추모를 하겠어요.”
그럴 마음도 없는데 말이에요.
어깨를 으쓱이는 루실리온의 얼굴을 보며 나는 뺨을 긁적였다.
“돈을 줬었구나.”
“물론이죠.”
“기껏 돈을 받았으면 운동 좀 제대로 하고 살지.”
안타까움에 작게 중얼거리자 루실리온이 웃었다.
“그랬을 사람이라면 애초에 돈도 주지 않았겠죠.”
“어?”
“아무것도 아니에요, 신록의 거울이라는 건 한 번 알아봐야 할 것 같아요.”
루실리온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오늘 기도실에 들어가서 알아보고 내일 제가 찾아뵈러 가도 될까요?”
“응, 나는 괜찮은데… 넌 바쁜 거 아니었어? 신도 모으기로.”
“어느 정도 해결됐습니다.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퍼지고 모이기를 기다리면 될 것 같아요.”
루실리온이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저게 날 위한 선의의 거짓말인지 진짜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묻기에는 조금 겁이 났다.
“고마워, 그럼… 잘 부탁할게.”
내가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나자 루실리온도 함께 일어났다.
“그렇게 겁을 먹으시면, 어떡해요.”
“겁, 안 먹었는데?”
“오들오들 떠시는 게 곧이라도 잡아먹힐 토끼처럼 보이는걸요.”
루실리온의 노골적인 말에 눈을 끔벅이자 그가 가볍게 웃었다.
“괜찮아요, 허락할 때까진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예요.”
“허락하면, 뭘 하고?”
“그땐…, 허락을 받았으니까요.”
루실리온의 표정이 한층 화사해졌다. 이보다 더 화사할 수는 없을 정도로 말이다.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온다면 분명 저런 표정을 하고 있을 것이다.
“너, 나 좋아해?”
“모르셨나요?”
“알겠어?”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위해서, 10만 명 신도 모으기 같은 귀찮은 리스크를 짊어지진 않아요.”
“그건 친구 사이로…….”
내 말에 루실리온이 작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에노쉬도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긴 하지만, 제가 그를 위해서 네게 했던 것처럼 하진 않을 걸요.”
“……대체 언제부터.”
“주인님이 날 처음 물 밖으로 건져 줬던 날.”
루실리온이 성큼 다가와 내게 바싹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날부터, 나는 이미 당신 거였어요. 말했잖아요, 주인님. 이라고.”
그 호칭이 그런 의미였는 줄 내가 어떻게 알겠어.
“부담을 줄 마음은 없어요. 다만……, 제가 없는 사이에 새치기를 한 놈이 있는 것 같아서.”
루실리온의 눈꼬리가 둥글게 휘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새치기라니 누구…… 아.”
리하르트와의 일을 말하는 건가? 근데 바로 어제 있었던 일인데 루실리온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곤란하게 했다면 죄송해요.”
루실리온이 순순히 사과를 건넸다.
“에이린.”
“어……?”
“제가 고백해도 그렇게 매정하게 거절할 건가요?”
루실리온의 직설적인 말에 잠시 머릿속이 새하얗게 번졌다. 내가 입술을 뻐끔거리자 루실리온은 설핏 웃었다.
“내가 에이린을 곤란하게 했군요.”
그렇지, 아무래도 정면에서 그런 말을 들으면 뭐라고 할 수가 없으니까.
“데려다줄게요.”
“어? 아니, 괜찮은데…….”
“제가 그러고 싶어서요. 그러면 안될까요?”
눈꼬리를 축 내리깔며 풀죽은 강아지처럼 읊조리는 목소리엔 처연함마저 담겨 있었다.
말문이 턱 막힌 터라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냐, 괜찮아. 같이 가자.”
내가 손을 내밀자 루실리온이 냉큼 손을 맞잡았다. 언제 울적한 표정을 했냐는 듯 생글거리며 그가 응접실을 나섰다.
“에이린.”
“응?”
“제가 한 말은 믿어도 괜찮아요.”
“무슨…, 말이야?”
“저는 신의 가호를 받고 있으니까 별지기의 힘이 통하지 않을 거예요.”
루실리온의 말에 눈이 절로 커졌다.
“그러니까 제 말은 솔직하게 믿어도 괜찮아요.”
“…믿어, 갑자기 왜.”
“에이린이…….”
루실리온이 나를 흘긋 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될까 봐요.”
“…….”
“그냥 그게 걱정이 좀 됐어요.”
내가 누군가의 말을 들으면 한참이나 망설인다는 걸 알기라도 하는 걸까?
누구에게도 티를 낸 적이 없는데. 누구에게도 알려지게 한 적은 없다.
하지만, 은연중에 불안은 있었다.
저 세계의 가족들처럼 갑자기 친절해졌다가 그게 사실은 전부 거짓이었다고 말하면…….
그 말을 지금 가족들에게 듣는다면, 맹세컨대 나는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것이다.
내가 살아온바 절망은 멀리 있지 않았다.
절망은 늘 내 가까이에 있었다.
그리고 내게는 그때를 호시탐탐 노리는 별지기가 있다.
“에이린.”
“응.”
“너는 유일하게 날 이용할 권한을 얻었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손을 꽉 붙잡은 루실리온이 입술을 달싹였다.
“네 앞을 가로막는 건 전부, 내가 없앨 테니까.”
덧붙이는 목소리는 무척 단단해서, 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실리온과 돌아가는 길은 아주 적막하고 조용했으나, 불안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