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165
“아가씨, 대신관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응, 갈게.”
멍하니 누워 있던 나는 로랑의 말에 냉큼 몸을 일으켰다.
어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감을 제대로 잡지도 못한 채 하루가 꼬박 지났다.
‘이것도 뭔가 별지기의 나쁜 장난인 걸까?’
리하르트라면 몰라도 신의 가호를 받고 있는 루실리온이 별지기의 나쁜 장난에 휘말린 것 같진 않았다.
그러면 대체 이 모든 걸 어떻게 설명하면 좋단 말인가.
‘둘 다 나를 좋아했다고…….’
사실 리하르트의 이상한 집착은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니까 리하르트가 고백을 해왔을 때, 나는 그렇게까지는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루실리온은 정말로 의외였다.
그는 내게 이성적인 어떠한 뉘앙스도 보여준 적이 없는 터라, 나 역시도 그냥 친구라고만 생각했었다.
‘하긴 어떤 친구를 위해서…….’
다른 세계에까지 찾아와 3년 내내 함께 있어 주겠는가.
그걸 생각하면 루실리온의 감정이 또 납득이 되는 것이다.
‘사랑이라니…….’
누군가와 평생을 함께한다는 생각을 해 보지 않은 건 아니다.
나는 어른이 되고 싶었고 화목한 가정을 가지고 싶었다. 아이도 낳고 싶었고 평범한 삶을 살고 싶었다.
하지만, 사실 주변 상황이 썩 녹록지 않아 포기하고 있던 참이었다.
드래곤인데다가 심지어 다른 세계 사람인데 거기에 공작가의 가주이기까지 하다고?
평범한 가정생활은 물 건너갔다고 보면 된다.
그렇게 생각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에이린.”
응접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루실리온이 싱긋 웃으며 내게 인사를 건넸다.
고민이나 근심, 부끄러움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평온한 얼굴이다.
어제 있었던 일을 곱씹고 신경 쓴 것은 나뿐인 것 같아서 조금 민망해졌다.
“응, 와줘서 고마워.”
“네, 말씀하신 걸 아르마께 기도를 드려 알아 왔습니다.”
“정말? 남아있대?”
“네, 신록의 거울은 옛 신전의 지하 성터에 숨겨져 있다고 합니다.”
“옛, 신전의 지하 성터?”
“네. 신전의 입구를 지키는 파수꾼과의 내기에서 이기면 신록의 거울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내기? 무슨 내기인데?”
“수수께끼라고 했습니다. 어떤 것인지는 알아서 알아내야 한다는 말도 덧붙이더군요.”
루실리온이 설핏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아르마와 뭔가 대화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나로선 지금으로도 충분했다.
“그 정도로 충분해.”
“그래서 잠시 떠났다 와야 할 것 같은데 괜찮으실까요?”
“같이 가자.”
내 말에 루실리온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위험할지도 모르는 곳에 당신을 데려가고 싶진 않습니다.”
“응, 그래도 내 일이니까 갈 거야.”
단호한 내 말에 루실리온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신전에 있는 신성력 포탈을 이용할 테니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근데 날 왜 두고 가려고 해.”
“아르마가, 웃었거든요.”
웃었다고?
그게 왜 문제가 되는 거지?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루실리온은 입술을 몇 차례 달싹거리다가 그냥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루시?”
“네.”
“왜 말을 하다가 말아.”
“아…….”
그가 슬쩍 눈치를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아르마가 웃으면, 항상 뭔가 귀찮고 피곤한 일이 생기거든요.”
도대체 그 신은 자신의 제일 높은 신도에게 무슨 짓을 하면 이런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걸까?
“에이린.”
“응?”
“그곳에 도착하시면 절대 제 옆에서 떠나지 않으실 수 있나요?”
“저기, 다들 잊고 있는 거 같은데 나 일단은 드래곤이거든…….”
웬만해서는 죽지 않는다.
드래곤이 얼마나 강한지는 온갖 역사서에 묘사되어 있을 것이고 실제로 나는 이제 웬만한 일에는 내성이 생겼다.
“그게 아프지 않다는 말은 아니니까요.”
“……응?”
“나는 당신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가 천천히 손을 뻗어 내 뺨을 가볍게 문질렀다.
“설령 그게 당신에게 티끌만큼의 상처를 남기지 않는다고 해도.”
루실리온의 목소리가 한층 가라앉았다. 늘 밝은 표정의 루실리온만 보고 있다가 이렇게 분위기를 잡으니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게 내게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니까요.”
“……주의할게.”
내 대답을 듣고 나서야 루실리온이 눈을 초승달 모양으로 예쁘게 접었다.
“그럼 일단 신전으로 갈까요?”
“응.”
내민 손을 맞잡자 순식간에 새하얀 빛무리가 뭉치더니 통로 같은 것을 만들었다.
그 눈 부신 빛에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이미 신전이었다.
정확히는 텅 빈 신전의 방 중 하나였다.
침대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고 책상과 작은 책장 하나가 놓여 있는 방.
장식도 보이지 않고 책상 의자 침대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삭막한 방이었다.
“여기서 조금 걸으셔야 합니다. 위치를 제 방으로만 찍어 뒀거든요.”
“네 방?”
“네.”
“여기가 네 방이라고?”
“네…….”
내가 두 번이나 반문하자 루실리온도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왜요? 뭔가 불편한 게 있으신가요?”
“그건 아닌데 방에 너무 아무것도 없지 않아?”
아빠의 방도 꽤 삭막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아빠는 그나마 사막이었고 여기는 사막도 아니고 그냥 심각한 가뭄이 나서 땅이 쩍쩍 갈라진 그런 메마른 공간이었다.
“잠만 자는 공간이니까요.”
“응, 그건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책상이랑 침대랑 책장뿐인 건 너무 슬프지 않나.
그렇게 입을 열려다가 괜한 참견이다 싶어서 입을 꾹 다물자 루실리온이 작게 웃었다.
“그럼 뭔가 선물해 주세요.”
“응?”
“에이린이 방에 둘만 한 걸 선물해준다면 둘게요.”
“어……, 그럴까? 근데 그래도 돼? 관리인들한테 말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사실 내가 좋아하는 아기자기한 소품이 어울릴 것 같은 방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인테리어를 잘하는 편도 아니고 말이다.
“에이린이 해 주는 게 좋습니다.”
“그래?”
“네. 볼 때마다 당신 생각도 날 테고.”
갑작스럽게 훅 치고 들어오는 말에 눈이 확 커졌다. 당황한 낯으로 루실리온에게 고개를 돌렸지만, 그는 이미 문을 열고 있었다.
“진짜…….”
“왜요?”
루실리온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저는 지는 게임은 안 하는 주의라서요.”
“이건 게임이 아니라…….”
“그러니까 포기하고 익숙해지세요.”
내가 그를 지나치며 문을 나설 때였다.
내게 속삭이듯 말하던 루실리온이 상체를 숙여 조금 더 귓가에 입술을 바짝 들이댔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제 손을 잡고 있을 테니까요.”
훅, 속살거림이 바람처럼 귓가를 스쳤다. 오소소 본능적인 소름이 돋아 몸을 부르르 떨자 그가 손을 내밀었다.
“가요, 에이린.”
“…손잡고?”
“길을 잃을 수도 있잖아요.”
신전에서 길을 잃기는 왜 잃어.
어이가 없어서 바라보고 있으려니 잔망스럽게 웃은 루실리온이 냉큼 내 손을 붙잡고 앞서 걸었다.
“저는 태어나서 딱히 뭔가에 욕심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갑자기 뭐야?”
“신전에서 배우는 거라곤 소유하는 것보다 나누는 것이 우선이라는 말뿐이고, 그렇게 가르치는 윗놈들은 제 배를 불리는 데 바빴죠.”
루실리온이 느긋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처음 듣는 그의 과거에 조금 호기심이 생겨 입술을 꾹 다물었다.
“네, 전 딱히 욕심나는 게 없었단 말이에요.”
예전에 에서도 이런 묘사를 본 적이 있는 것도 같았다.
주변에 있는 모든 추악한 것만을 보고 자란 탓에 어떤 것에도 마음을 주지 않고 원하지 않게 됐다고.
“근데 딱 한 가지가 탐나게 됐어요.”
“…….”
“평생에 딱 하나에요, 에이린.”
목소리는 여상했고 그는 여전히 같은 보폭으로 느릿하게 앞서 걷고 있었다.
맞잡은 손이 유독 뜨겁게 느껴지는 것은 착각일까?
“그러니까 저는 그걸 얻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거예요.”
“루실리온, 나는…….”
“당신에게 무언가 필요한 순간에 늘 내가 있을 거예요.”
그건 달콤한 고백보다는 선전포고에 가깝게 들렸다.
그러니 포기하라고.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탐욕이라는 감정을 처음 느꼈는데, 나는 아주 탐욕스러운 인간이었나 봐요.”
그는 성인군자와 같은 표정으로 음울하게 말했다. 평소의 루실리온과는 한층 다른 모습이었다.
긴장을 꿀꺽 삼킬 때였다.
그의 걸음이 뚝 멈췄다.
“도착했어요, 에이린.”
그가 언제 그랬냐는 듯 생글생글 웃으며 굳게 닫힌 문을 활짝 열었다.
안에는 차마 눈 뜨기가 힘들 정도로 빛을 뿜어내는 포탈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