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166
루실리온은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은 내 손을 꼭 맞잡은 채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눈 부신 빛 따위는 아무런 걸림돌도 되지 않는 사람처럼.
‘묘하네…….’
무섭지는 않았다.
루실리온이 내게 이상한 짓을 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다만…….
그래, 조금 당황스러운 면은 있다. 어릴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이 맞잡음에 어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면 말이다.
“도착했어요.”
그의 말에 천천히 눈을 뜨자 어느새 눈이 아플 정도로 번쩍였던 빛은 사라져 있었다.
보이는 것은 반쯤 무너져 폐허가 된 건물이었다.
옛 신전이라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님을 증명하듯, 무너진 건물 잔해들 사이에는 벽화가 있었다.
태양을 기리는 듯한 벽화였다.
“여기가 그 옛날 신전이야?”
“네.”
사방이 온통 무너진 잔해들 뿐이라서 조금 갑갑하게 느껴졌다.
뭣보다 지하 성터로 가는 입구가 보이지 않았다. 용케 이 상태로 더 안 무너졌구나 싶은 생각마저 들 정도다.
“길은 알아?”
“아뇨, 아르마가 나머지는 알아서 하라고 하더군요.”
“위치만 알려 줬다는 거구나.”
“네.”
루실리온이 느리게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기껏 쉬는 날일 텐데 이렇게 번거롭게 해서 미안해.”
“미안해할 거 없습니다.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니까요.”
“……응.”
오히려 그래서 더 미안하다는 걸 알고는 있을까?
“이건 그 별지기를 쫓아내기 위해서 하는 일인가요?”
“그건, 아니야.”
별지기를 쫓아내는 방법은 모른다. 아르마는 내가 그저 행복해지면 된다고 했으니까 그걸 믿고 있을 뿐이다.
‘모르는 사람들의 적대감은 높아졌지만, 그뿐이니까…….’
처음에는 강제로 이뤄진 호의였을지는 몰라도 내가 쌓아 온 인연도 분명히 있다.
변하지 않는 이들을 보면서, 그렇게 믿기로 했다.
“나는, 늘 행복해지고 싶었어.”
폐허가 된 건물을 천천히 걸으며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근데 쉽지 않더라고. 나는 아주 작고 소소한 일에도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늘 행복을 찾아 헤맸다.
진심으로 웃을 수 있기를 바라며 필사적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행복의 실마리 하나라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근데 그것조차 어려웠어. 내가 행복해지려고 하면, 누군가가 강제로 막는 느낌이었거든.”
“…그랬습니까.”
“응, 근데 그 모든 게 운명이었고 누군가의 손바닥 위였다고 생각하니까 조금…….”
나는 손등으로 뺨을 가볍게 문질렀다. 모든 것이 허무하고 모든 것이 무의미해졌다.
그러나 동시에, 도피처가 생기기도 했다. 내가 불행했던 건 내 탓은 아니었다고.
“그래서 여기 처음 왔을 때, 나는 너무 행복했고…… 이 모든 게 마치 꿈 같았어.”
“지금은요.”
“응?”
“지금 이 상황도 전부 꿈 같나요?”
“응.”
나는 루실리온의 말에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꿈 같다.
나는 행복한데, 어딘가 한구석에서 그 행복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내가 있었다.
“꿈 같아.”
“그렇군요. 언젠가 에이린이 꾸는 모든 꿈이 당신의 현실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루실리온의 말에 눈이 절로 커졌다.
“이미 현실이 됐어.”
“네?”
“나, 꿈은 늘 꾸고 있었거든. 세계를 상상하며 그리는 모든 것들이 내 꿈이었어. 내가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하는 소망을 담은 거였거든.”
결과적으로 나는 그 자리를 얻었다. 샤르네에게 미안한 감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샤르네는 지금이 훨씬 더 행복해 보였다.
“내가 이곳에 있잖아.”
“네,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 꿈은 이미 현실이 됐어.”
더 바랄 것도 없다는 말이다.
부귀영화? 남들이 원하는 부와 명예? 돈이 콸콸 흘러넘치는 삶? 그런 건 별로 바라지도 않았다.
로또 당첨은 내게 꿈인 적이 없었다. 내 꿈은 언제나 현실에 아주 당연히 존재하는 것들이었다.
“현실이요?”
“응, 나는 음. 다정하고 가정적인 아빠, 상냥한 형제들, 맛있는 밥 한 끼나 친구들과 손을 잡고 쇼핑을 하러 가거나 놀러 가는 그런 걸 바랐거든.”
그냥 그런 것들이었다.
근데 정신을 차리니 그 모든 것들이 곁에 있었다.
모두가 날 사랑해 주기를 바란다는 생각은 감히 단언컨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나는 지금 행복해.”
“그런가요?”
“응, 그리고 불안한 것도 사실이야. 순식간에 찾아온 이 행복이 떠날까 봐 무섭거든.”
“순식간이 아니잖아요.”
루실리온이 걸음을 뚝 멈췄다.
고개를 들자 무너진 잔해들 사이로 문이 보였다.
문 옆에는 사자처럼 생긴 석상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건물이 이곳까지는 무너뜨리지 못한 듯했다.
“아주 긴 시간의 힘겨운 노력 끝에 얻은 행복이에요, 에이린.”
“…루시?”
“당신의 지난 노력을 ‘순식간’이라고 표현하면 안 돼요.”
루실리온의 말에 문득, 어린 차미소였던 시절이 떠올랐다.
끊임없이 울면서 끊임없이 상상을 펼치고 끊임없이 나도 모르는 세계를 창조해 나가던 그 시절을.
그리고 아마도 기억을 잊은 채 지나왔을 수많은 서러운 시간들을.
“……응, 그러면 안 되지.”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가볍게 여기는 순간, 그 시간은 정말로 가벼운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맞아, 나는 아주 힘들게 이 행복을 얻었네.”
“네.”
루실리온이 그제야 만족한다는 듯 예쁘게 웃었다.
“착하네요, 에이린.”
맞잡지 않은 반대쪽 손을 뻗은 루실리온이 내 뺨을 가볍게 쓸었다.
‘뭔가, 스킨십이 잦아진 것 같은데.’
정말 살짝 다가와 톡 치고 멀어지는 정도라 불쾌하지도 않아서 뭐라고 하기가 모호했다.
‘근데 볼수록 믿기지 않는 외모란 말이야.’
이런 외모의 남자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하니 뭔가 정말로 꿈 같았다.
아니, 고백받은 것도 아닌데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 그, 여, 여기야?”
나는 확 달아오른 뺨을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며 급히 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네, 여기 같네요.”
루실리온이 나를 보며 설핏 웃더니 굳게 닫힌 문에 손을 올렸다.
새하얀 신성력이 루실리온의 손끝에서 흘러나가더니 이내 빛이 문을 전부 뒤덮었다.
까드득-
그때였다.
건물의 일부가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난 것은.
내가 당황해 루실리온에게 바짝 붙어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여차하면 드래곤의 능력을 써서라도 도망갈 참이었다.
“방금 뭐가 무너지는 소리가 나지 않았어?”
“네, 저도…….”
후두두두-!
뭔가가 무너졌다. 그런데 생각보다 가깝다.
“어?”
루실리온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팔을 뻗어 내 허리를 감싸 순식간에 세 걸음 물러났다.
무너지고 있는 것은, 사자의 형상을 한 석상이었다.
“석상이 오래돼서 무너지는 건가?”
“아뇨, 이건…….”
“크르르릉-”
석상에서 낮은 울음소리가 났다.
등줄기에 소름이 쭈뼛 돋았다. 귀신 들린 석상도 아니고 이게 뭐야.
“크하하하! 드디어 왔구나! 슬슬 세대교체가 일어날 때라고는 생각했지!”
“…아마 그 문지기인 것 같습니다.”
석상을 뒤덮고 있던 회색빛의 돌들이 순식간에 바스러져 내리고 샛노란 눈이 번뜩였다.
꼬리가 네 개나 달린 사자였다.
‘뭔가, 스핑크스 닮았네.’
그렇게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던 등줄기가 한층 가라앉았다.
“이곳에 들어가고 싶은가?”
“네.”
“신록의 거울이 필요한가 보군.”
“네.”
루실리온이 단답으로 대답했다.
내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을 보아하니 아마 긴장한 것이 분명했다.
‘와, 루실리온이 긴장한 모습 처음 보는 걸지도.’
신기함에 그의 옆얼굴을 보고 있으니 괜히 얼굴만 뜨거워졌다.
잘생기긴 진짜 잘생겼단 말이야.
얼굴로 나라를 팔아먹을 사람이 있다고 하는 말을 예전엔 믿지 않았는데, 지금은 조금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럼 내 시험을 통과해야겠지.”
설마 시험이 스핑크스의 문제 같은 건 아니겠지.
뭔가 판타지 세계관이니까 전투나 아니면 마법 대결이나 신성력을 증명하는 뭔가일까?
“시험은 내 수수께끼를 맞추는 것이다!”
“……네?”
반문은 내게서 흘러 나갔다.
“자…….”
설마 아침에는 네 발 점심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인 게 뭐냐고 묻는 건 아니겠지.
“목소리는 같으며 하나이다. 그러나 발이 4개가 되기도 하고 2개가 되기도 하며, 3개가 되기도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다리가 가장 많을 때 가장 약하고 걸음도 가장 느리다.”
짝퉁 스핑크스가 근엄하게 문제를 냈다.
이런 시발…….
“X발, 사람이요…….”
생각해 보니 이 세계는 어린 시절의 내가 만들었다.
어린아이가 할 법한 생각은 그렇게 고차원적이진 못했다.
‘세계도 내가 여기에 올 줄은 몰랐겠지.’
출제자가 와 버렸으니 패자는 정해진 것이다.
내 대답에 사자의 입이 떡 하고 벌어졌다. 곧 턱이 빠져 덜렁거릴 기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