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168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계단을 다 내려가니 굉장히 복잡해 보이는 길이 끝없이 이어졌다. 어두컴컴하기까지 한 터라 솔직히 조금 무서웠다.
다른 것보다 벌레가 튀어나올까 봐.
여기저기서 사사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데, 또 빛을 비추면 아무것도 없곤 했다.
그게 도리어 공포로 다가왔지만 말이다.
“길을 다 아는 거야?”
“아뇨.”
루실리온이 너무 성큼성큼 걸어가기에 의아한 듯 묻자 그는 대번에 머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신전의 구조란 대개 비슷비슷하니까요.”
“그런 거야?”
“네.”
그가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루실리온의 말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넓은 공터 같은 방이 나왔는데, 그 한가운데에 거울이 놓여 있었다.
초록빛을 띄는 오묘한 거울이었다.
“에이린, 찾던 게 저게 맞나요?”
“잘 모르겠어. 실물은 본 적이 없어서……. 근데 맞지 않을까?”
딱 생긴 게 내가 신록의 거울이다, 하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말이다.
“가져가면 되겠군요.”
“근데… 신전의 성물이라면서 가져가도 되는 거야?”
“네.”
“어……, 그래…?”
너무 당당한 대답이라 도리어 내가 말을 잃었다.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고 있노라니 루실리온이 말을 덧붙였다.
“신록의 거울은 오늘 이후로 후세에 전해지는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말고 가져가세요.”
“왜?”
“제가 전대 대신관으로부터 전달받지 못했으니 본래라면 평생 모르고 있을 물건이었을 테니까요.”
“아…….”
그 논리가 영 틀리진 않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영 들어맞지도 않는 것 같아서 잠시 멈칫했다.
“애초에 아마 아는 사람도 많지 않았을 거울일 겁니다. 그 말은, 이게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는 없을 거라는 말일 테고요.”
“……그렇겠지.”
“언젠가 마법도, 신력도 없어지는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에이린의, 예전 세계처럼요.”
루실리온의 말에 눈이 절로 커졌다. 설마 루실리온이 그때의 일을 꺼낼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탓이다.
언젠가 이 판타지 같은 세계도 어쩌면 내가 살던 현대처럼 조금씩 변해 갈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런 건 언젠가 사라질 산물이에요. 그러니 중간에 소실되었다 한들, 문제 될 건 없습니다.”
루실리온의 말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누군가가 저와 같은 방법으로 대신관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으니까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건, 언젠간 잊혀지게 되어있습니다.”
누군가가 그 말을 더 이상 전하지 않거나 전할 수 없게 되었을 때요.
덧붙이는 목소리는 무척 깊어서 루실리온이 하루 이틀 이런 생각을 한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에이린의 이전 세계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많은 걸 보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응.”
루실리온은 느리게 걸어가 신록의 거울을 들어 올렸다.
루실리온의 손이 닿자 영롱한 빛을 뿜어내던 거울이 이내 서서히 빛을 잃었다.
루실리온이 내게 신록의 거울을 내밀었다.
“에이린, 여기요.”
“으응, 고마워. 근데 이렇게 가져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 결국 여기저기 도움만 요청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쓰게 웃으며 중얼거리자 루실리온이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살짝 헝클었다.
“에이린.”
“응.”
“당신이 쌓아 온 인연 또한, 당신의 능력이고 힘입니다.”
루실리온의 말에 눈이 절로 커졌다. 설마 그에게 이런 말을 들을 줄은 예상하지도 못했던 탓이다.
“……그건 그냥 이런 도움을 받을 의도는 아니었어.”
“그래도 에이린은 저를 구했고 에노쉬를 구했고 망할 마법사 놈도 구해 주었습니다.”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누군가의 삶이 바뀔 수도 있는 일을, 내가 바꿀 수도 있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넘기고 싶지 않았다.
“네, 이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니 돕는 거고 다른 사람들도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이니 돕는 거겠죠.”
“……너 진짜 말 잘하는구나.”
“대신관은 아무래도 말로 먹고사는 직업이기도 하니까요.”
신관들이 들으면 졸도할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구나 싶었다.
나는 신록의 거울을 품에 안은 채 키득키득 웃었다. 그러고 보면 시간이 참 많이 흘렀다.
“우리 만나고서 아주 많은 시간이 지난 것 같아.”
“그러게요.”
“그러고 보면 내가 힘들 때마다 네가 곁에 있었던 것도 같고.”
때때로 위험할 때마다 루실리온이나 아빠를 떠올리는 내가 있기도 했다.
‘음, 이거 너무 의존적인가.’
드래곤이라고 한들 여전히 과한 능력을 제어하는 건 서툴렀다.
“앞으로도 생각해 주세요.”
“응?”
“힘들 때마다, 괴로울 때마다, 저를 가장 먼저 떠올리면 좋겠어요.”
루실리온이 내 손등을 살포시 붙잡더니 손등에 입술을 꾹 누르며 말했다.
“너 말야, 고백은 나중에 한다고 하지 않았어……?”
“그랬죠.”
“근데 이런 스킨십은 되는 거고?”
“그래야 에이린이 제게 빨리 함락될 테니까요.”
생글 웃으며 읊조리는 말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진짜 못하는 말이 없어.
“너, 진짜…….”
“네, 에이린.”
“……하.”
고개를 푹 숙이며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정말 훅 치고 들어오는 데 뭐 있다.
“저는…….”
“응?”
“에이린과 평생 함께해 줄 수 있어요.”
루실리온이 말했다.
뜬금없는 말에 잠시 미간을 좁힌 채 말을 곱씹으려니 그가 마저 입을 열었다.
“아주 긴 시간을 살아갈 너와 같은 시간을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야.”
“……!”
생각지도 못한 말에 눈이 절로 커졌다.
갑작스럽게 변한 말투와 진중한 목소리는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았다.
아주 먼 미래의 일은, 아니…….
어쩌면 그리 머지않은 미래의 일은 생각한 적이 없었다. 따지자면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 더 옳을 터다.
조금씩 주름이 늘어가며 세월이 생기는 주변 사람을 보며 그런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했다.
드래곤은 끔찍할 정도로 오래 산다. 수많은 문헌에서도 갖가지 구전에서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아마 백 년 뒤에 이 땅에 홀로 서 있는 건 나뿐일 것이다.
내가 아는 사람은 누구도 없고 나는 여전히 변하지 않은 얼굴로 서 있겠지.
“널 혼자 두지 않을 수 있어.”
“…….”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내가, 반신이 되면 가능한 일이야.”
“반신…….”
그게 가능한 일이던가?
아니,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리하르트는 신에 필적할 정도의 능력을 가졌다는 묘사를 한 기억이 있다.
“아르마가 허락만 해 준다면, 난 영원히 그의 신도로 남겠지.”
죽지 않는 신도.
아르마로선 어쩌면 환영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끝이 언제인지도 모르는 삶을 살겠다고?
“왜?”
나는 이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무리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한들, 왜 영원에 가까운 삶을 살겠다는 거야?
나는 지금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아득해서 숨이 턱 막히는데 말이다.
“말했잖아. 너랑 같이 있고 싶다고.”
“그러니까 그건, 네 삶이 끝날 때까지만 함께해도 되는 일이잖아. 그때까지만 함께해도 너는 내게 질릴 거야.”
“관심을 가진 뭔가에 질려 본 적은 없어.”
“그게 수백 년 수천 년이 되면 이야기는 달라져.”
“달라지지 않아.”
“…….”
“네가 날 잘 몰라서 그래. 나는 한 번 집착하고 가지겠다고 마음먹은 건, 수만 년이 지나도 놓지 않을 자신이 있거든.”
근거 없는 당당함에 말문이 절로 막혔다. 내가 입을 꾹 다물자 루실리온이 해사하게 웃었다.
언제나와 같은, 근심 걱정 따윈 전부 날려 버리는 미소였다.
“생각은 천천히 해도 괜찮아.”
“…….”
“근데 마지막엔 날 선택하면 좋겠어.”
그거 생각하는 의미가 있기는 하냐고.
어이없는 요구에 내가 헛웃음을 터뜨렸지만 루실리온의 난공불락 같은 미소는 허물어질 기미가 없었다.
“내가 인간으로서 너와 평생을 함께한다고 해도…….”
루실리온이 입술을 달싹였다.
“삶이 끝나는 날, 아마 나는 혼자 남는 너를 보며 후회할 거야. 널 혼자 남기고 싶지 않아서.”
감동적인 말에 심장이 울렁거렸다.
“그리고, 네가 언젠가 나를 잊고 살아갈 것에 분노하겠지.”
“어…?”
“네가 날 잊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거라고 생각하면 무덤에서도 일어나고 싶을 테니…….”
아니, 이게 무슨 말이람.
감동적인 루트로 잘 나아가던 대화가 갑자기 이상한 곳으로 확 튀었다.
“그냥 평생 같이하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나한테 생각할 시간을 주는 의미가 있어?”
“아뇨.”
단호한 대답이 초승달처럼 접히는 눈매와 함께 튀어나왔다.
“아마 천 년이든 이천 년이든 따라다니면서 마음에 드실 때까지 예쁜 짓을 하겠죠.”
“……내가 너한테 먼저 질릴지도 몰라.”
“그럼 에이린을 설레게 할 다른 모습으로 또 나타나 볼게요, 뭐.”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
“가지고 싶은 건 원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주의라서요.”
푸른 눈동자가 잔망스럽게 반짝였다. 내가 작게 한숨을 내쉬자 루실리온은 슬쩍 내 손을 잡아 왔다.
우리는 손을 잡은 채 함께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