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170
“열매를 달라고?”
“으응…….”
“한동안 코빼기도 비추지 않더니, 필요할 때만 와서 열매를 달라고?”
에노쉬의 말끝이 길게 늘어졌다.
눈을 뾰족하게 치켜뜨고 다리를 꼰 채 퍽 오만하게도 팔짱까지 끼곤 에노쉬가 나를 비웃었다.
나는 슬쩍 눈치를 살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 자주 연락을 할 걸 그랬나.’
하지만, 요즘 너무 바빴다.
정신이 없어서 같이 사는 아빠와도 제대로 얼굴을 마주하질 못하는데 무슨…….
“대충 서운해서 그렇다는 군요, 에이린.”
“서운하긴 누가 서운하다고 그러나! 이 몸이 이런 반죽 좀 못 만났다고 서운해할 사람인 줄 알아? 애초에 넌 접견 허락한 적도 없는데 왜 여기에 있느냐!”
“그냥.”
왜 왔는지 모를 루실리온이 여유롭게 찻잔을 기울였다.
탁-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찻잔을 내려둔 루실리온이 아주 느리게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친우의 얼굴을 볼까 해서요.”
“친우는 무슨! 너 같은 친우를 내가 언제 뒀다고 그러느냐!”
“무슨 서운한 말씀을.”
그가 빙긋 웃었다.
그 여유로운 표정이 아마도 에노쉬를 짜증 나게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열받는 표정이었다.
“전하.”
곁에 있던 릴리안 데이지가 가볍게 타박하자 에노쉬가 팔짱을 끼곤 고개를 홱 돌렸다.
“미안해, 에노쉬.”
“맨날 미안하지.”
“이번 일이 마지막이야. 약속! 이제 아무 데도 안 가. 이번 일만 끝나면.”
“어제도 재밌는 모험을 하고 왔던데 뭐.”
“……아.”
이미 루실리온에게 별 이야기를 다 들었는지 에노쉬의 눈동자엔 불만이 가득했다.
내가 원망스러운 눈으로 루실리온을 흘기자 루실리온이 생긋 웃었다.
“친구 사이에 비밀이 어딨겠습니까, 에이린.”
“나 골려주려고 그런 건 아니고?”
“네?”
내 말에 루실리온이 서운하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제가 에이린을 곤란하게 할 리가 없잖아요.”
“…….”
“존경하는 황태자 전하를 곤란하게 했으면 곤란하게 했지.”
“너……!”
아, 나를 골릴 의도는 아니었고 에노쉬를 골릴 의도는 맞았다? 내가 헛웃음을 흘리자 루실리온이 슬쩍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앞으론 주의할게요, 에이린.”
풀이 죽어 읊조리는 목소리에 눈을 가늘게 뜨자 루실리온이 멋쩍은 듯 애꿎은 찻잔만 매만졌다.
“네가 원하는 열매, 주고는 싶은데 그 나무에서 꽃이 피지 않은 지는 오래됐어.”
팔짱을 낀 에노쉬가 대답했다.
“내가 아직 어릴 때만 해도 꽤 멋진 꽃을 피우는 나무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더는 봉오리를 맺지 않더군.”
에노쉬가 작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려 커다란 창이 있는 발코니 쪽을 보았다.
“아마도 저것도 지친 거겠지. 어쩌면 속에서부터 썩어들어갈 수도 있고.”
“내가 한 번 봐도 될까?”
에노쉬가 눈을 가늘게 떴다가 이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한다면.”
그가 그렇게 대답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릴리안이 일어났고 내가 일어나자 루실리온도 따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득, 아주 어린 시절 우리의 모습이 떠올랐다. 예전에도 이렇게 넷이 모여 잡다한 얘기도 하곤 했는데 말이다.
키는 불쑥 크고 각자의 위치도 크게 달라졌다.
그랬는데도 이렇게 다시 마주 앉아 있을 수 있다는 게 조금 신기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뭐야, 왜 웃어?”
“옛날 생각나서.”
“아아, 어릴 때도 이렇게 놀곤 했죠.”
릴리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에노쉬도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과거를 떠올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지.
“야.”
“응?”
“적당히 좀 싸돌아다녀. 같이 있어도 부족한데.”
“……나보다 더 바쁘잖아?”
에노쉬의 말에 어이없다는 듯 읊조리자 그가 대번에 얼굴을 확 구겼다.
“추억을 많이 남겨주고 싶답니다.”
“야, 루실리온 대신관!”
“네, 에노쉬 황태자 전하.”
“아, 공경심을 좀 기르지 않겠어? 난 곧 황제가 될 거라고.”
“네, 존경하는 황태자 전하.”
“진짜 너 재수 없다.”
그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구었다. 이러나저러나 사이가 좋은 것 같다니까.
티격태격하는 그들을 따라 도착한 곳은 황성의 정원이었다. 정원 한가운데에 새하얀 나무가 있었다.
새파란 이파리를 한 아름 끌어안고 있는 나무는 아름다웠으나,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새가 없어.’
열매가 없으니 새가 없고 꽃이 없으니 벌과 나비가 꼬이지 않았다. 마치 이대로 굳어 박제된 것만 같다.
“그란 푸르스는 사시사철 푸른 이파리를 가지고 있지만, 매년 이맘때쯤엔 항상 열매를 맺었거든.”
에노쉬가 나무 옆에 서서 말했다.
‘새하얗고 예쁜 나무 옆에 잘생기고 예쁜 애들이 있으니 화보네.’
사진기가 없는 게 아쉬울 정도다. 어떻게 저렇게 완벽하게 자란 거지? 놀라울 정도다.
“근데 이제 자라지 않아. 식물학자도 불러봤지만, 잘 모르겠다더군.”
“으음, 그렇구나.”
육안으로 나무를 봐도 이상한 부분은 없는 것 같았다.
‘아빠도 딱히 별다른 방법을 찾지 못했다고 했고…….’
난감하다, 정말.
“이런 나무가 어디 다른 데 있지는 않겠지?”
“들어보지 못했다.”
“그렇겠지.”
아무래도 국목이 괜히 국목이 아니니까 말이다. 그것도 황실에 있을 정도면 어지간히 귀한 돌연변이겠지.
“아가야!! 나-츄-르-줘!”
콰앙-!
냐아아아악!
굉음과 같은 목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한 순간 무언가 코앞에 묵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고양이의 비명 같은 소리와 함께.
“……설표님?”
“와, 너 진짜 이상한 데 있구나. 그냥 들어오려다가 여기저기에 결계가 처져 있어서 난감했지, 뭐야.”
설표가 전혀 난감해 보이지 않는 표정으로 말했다.
“츄르 줘, 다 먹었어.”
“엄청 많이 줬잖아요. 그리고 그 검은 고양이 뭐예요?”
“주웠어. 어쨌든 경호원이니까 너한테 해 끼치면 안 되잖아? 그리고 츄르는 다 먹었다니까?”
“고양이가 무슨 해를 끼친다고……. 아휴, 진짜…….”
“미야아아악!”
괜히 알려줬다.
그날의 그 선택이 이렇게 후회될 줄이야. 어차피 열매를 얻지 못하면 다른 수를 쓸 수밖에 없는데 말이다.
“줄게요.”
“좋아.”
“이거 열매 얻을 수 있게 해 주면요.”
에라 모르겠다 싶어서 나는 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열매?”
인간의 모습으로 귀를 쫑긋거리던 설표가 고개를 돌려 새하얀 그란 푸르스를 보았다.
“뭐야, 굉장히 그리운 나무가 있네.”
설표가 뻣뻣한 나무껍질 위로 손바닥을 올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미 오래전에 전부 없어진 줄 알았는데.”
“오래전에, 전부……?”
“기운을 많이 잃었네.”
딱딱한 나무를 이리저리 매만지던 설표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뭐가 문젠지 알아요?”
“뭐가 문젠지 아냐고?”
“네, 이 나무의 열매가 필요해서…….”
“아, 열매.”
이리저리 더듬거리던 설표가 씩 웃었다.
“열매 자라게 해주면 츄르 줄 거야?”
“줄게요.”
“흠, 이게 그 도마뱀과의 약속이야? 그러지 않아도 그냥 죽여 준다니까.”
설표가 키득키득 웃으며 나무 기둥에 손을 얹은 채 눈을 감았다.
“이 나무는 겨울나무야. 가을에 꽃을 맺어 겨울에 열매를 맺는 나무.”
설표의 손에서 새하얀 기운이 흘러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순식간에 주변의 공기를 얼려 결정으로 만들었다.
“이런 곳에서 살면 확실히 갈수록 건강이 나빠질 수밖에 없지.”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의 손에서 흘러나간 냉기를 나무가 순식간에 빨아들였다. 가히 게걸스러울 정도로 빠르게 흡수되는 터라 그가 그렇게 냉기를 뿜는데도 전혀 춥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냉기를 품은 나무가 순식간에 꽃봉오리를 맺더니 이내 열매를 맺었다.
푹 익은 열매는 바닥으로 떨어지기까지 했다.
나는 급히 손을 뻗어 그 터지기 직전인 열매를 소중히 품에 안았다.
‘이제 설익은 열매 하나만 있으면…….’
나는 설표의 몸을 가볍게 흔들었다.
“잠깐만요! 나 저거! 덜 익은 거 좀 따 주세요!”
“응? 좋아. 근데 이거 걔가 가져다 달라고 했던 재료?”
설표가 순식간에 뛰어올라 척 보기에도 덜 익은 열매를 내 품에 안겨 주며 물었다.
“네.”
“흠……, 그것도 참 웃기는 마녀야.”
설표는 내가 가져간 재료를 곱씹으며 뭔가를 떠올렸는지 잠시 코웃음을 쳤다.
“뭔가 과거라도 보여주기로 약속했나 보지?”
“어…….”
설표의 말에 절로 말문이 턱 막혔다.
고개를 끄덕이려다 주변에 있는 세 사람의 시선이 신경 쓰여 간신히 목에 힘을 주었다.
“이 나무는 최대한 춥게 관리해 주면 좋아. 뭐, 가끔 와서 돌봐 줄 수도 있겠네. 아주 그리운 나무거든.”
“예전엔 많았나요?”
“많았지. 인간들이, 예쁘다고 장식하겠다고 전부 베어 버리지만 않았어도…….”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마 지금도 겨울에는 이 나무의 꽃이 흐드러지게 핀 걸 볼 수 있었을 거야.”
그는 먼 산을 보는 듯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이내 생긋 웃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약속.”
“네.”
나는 그에게 산더미 같은 츄르를 만들어 주곤 열매를 조심스럽게 보관함에 넣었다.
‘남은 건 청화무네.’
그것도 며칠 지나지 않아 자랄 테지.
“도와줘서 고마워, 다들.”
내가 활짝 웃으며 말하자 에노쉬가 코웃음을 치며 제 콧잔등을 벅벅 문질렀다.
“그래, 넌 이 몸이 있어서 고마운 줄 알아야 해.”
“네네.”
나는 서툴게 웃으며 에노쉬를 냉큼 끌어안았다. 물론 반대쪽 팔론 릴리안도 함께.
그러자 에노쉬가 몸을 파드득 떨더니 인상을 찌푸리곤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애도 아니고…….”
“어머, 저는 좋기만 한데요. 전하.”
릴리안의 웃음기 서린 목소리에 에노쉬가 “누가 싫댔나.”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이제 거의 다 끝났네…….”
드디어 이 긴 진실을 알,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