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171
“다 모았다.”
나는 막 수확을 끝낸 청화무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 두 번은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뭐야, 드디어 끝냈어?”
“네.”
“그 마녀도 가끔 이상한 짓거리를 한단 말이지. 이딴 게 뭐가 맛있다고.”
청화무를 가볍게 손에 쥔 설표가 작게 읊조렸다.
“오늘 저녁에 갈 거야?”
“네.”
“네가 바라는 게 그다지 대단한 진실이 아닐 수도 있는데?”
“그냥, 왜 제가 아빠가 아니라 개망나니한테 갔어야 했는지 그게 알고 싶을 뿐이에요.”
설표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마도 별거 아닐 수 있겠죠. 그래도 모르는 것보단 나아요.”
모른다는 것은 평생을 그 알지도 못하는, 어쩌면 별것 아닐 수 있는 진실에 얽매여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알게 되면, 세상이 천지개벽을 했다고 해도 언젠가 납득할 수 있는 사실이 되는 것이다.
설표가 품에 안은 고양이의 배를 이리저리 문지르며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는데, 마녀야. 이제 약속은 지키는 게 낫겠어.”
하악질하는 고양이를 가볍게 제압해 배를 가볍게 긁어 주며 설표가 말했다.
“마녀?”
그 순간이었다.
눈앞이 새하얗게 번지더니 이내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스스로를 퍼플이라고 말했던 그 드래곤이었다.
“날 마녀라고 부르는 건 관두라고 했을 텐데, 고양아.”
“누가 고양이야? 위대하신 설표님한테.”
“너 역시 징그럽게도 오래 사는군.”
그녀가 썩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으로 설표를 한 차례 흘겨보더니 느리게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기어이 이걸 다 모았군.”
그녀는 애초부터 기대도 안 했다는 듯 혀를 차곤 말했다.
“그렇게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싫었나?”
“네.”
망설임 없이 흘러나온 단호한 내 대답에 퍼플의 몸이 잠시 휘청거렸다. 그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직설적이군, 좀 다르게 말할 생각은 없었느냐?”
“좋다고 말할 순 없잖아요…….”
싫어서 필사적으로 굴었는데 말이다.
“딱히 당신이라는 개체가 싫어서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가족들과의 시간을 뺏기는 게 싫은 거죠.”
당신이 아니라 누가 내게 이런 제안을 했어도 그랬을 거다.
어쩌면 그들에겐 별거 아닌 짧은 시간일지도 모른다. 오백 년은 말이다.
하지만, 내게는 앞으로 100년도 안 될 그 시간이 너무나도 소중했다.
“그래, 약속을 지켰으니 알려 주지.”
약속은 약속이니까 말이다.
그녀는 어딘가 좀 아쉬운 표정으로 내게 말하곤 손가락을 튕겨 내가 모아 둔 재료를 전부 가져갔다.
“이 재료들은 과거를 비추는 거울을 만들 수 있지.”
“과거를 비추는 거울……?”
“그래.”
“청화무랑 이 열매가요?”
“청화무랑 농익은 열매 쪽은 내 간식이다.”
어, 재수 없어.
내가 눈을 끔벅거리자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라고 공짜 노동은 사양이다.”
“넵.”
그건 뭐 이해하는 바이긴 한데, 그래도 그간 한 고생을 생각하면 조금 내키지 않는 것도 있다.
“딱 한 번, 원하는 과거를 볼 수 있지. 너는 네 탄생을 보고 싶다고 했으니 거기부터 보면 되겠지.”
그녀가 가볍게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신록의 거울과 재료들이 한데 뭉쳐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뭉친 것들이 하나의 빛무리가 되어 내 손바닥 위로 내려앉았다.
신록의 거울은 본래의 녹색은 어디로 갔는지 새파랗게 변해 있었다. 거울의 표면은 마치 수면이 일렁거리는 듯했다.
“보고 싶은 걸 상상해라. 그러면 볼 수 있을 거야.”
나는 두 손으로 거울을 꼭 쥔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 생각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내가 태어나서부터 있었던 일을 보고 싶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새파란 빛이 나를 집어삼킨 듯했다.
* * *
찰랑―
어딘가에서 물이 출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물에 들어가 물의 흐름을 귀로 담아 듣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물이 쫙 빠지며 빛이 쏟아졌다.
막혀 있던 숨통이 확 터지는 기분에 눈을 번쩍 뜨자 시야가 트였다.
“아직 살아 있었군.”
누군가가 나를 품에 안고 있었다.
샛노란 금안을 번뜩이며 나를 내려다보는 그녀는…….
‘퍼플?’
문득 내가 왜 여기에 왔는지가 떠올랐다. 과거를 보기 위해서 왔었지.
“이런 운명을 보여 주다니.”
그녀는 낮게 혀를 차며 나를 짜증 나는 눈으로 내려보았다.
“이 저물어 가는 시대에 설마하니 어린 해츨링이 태어날 줄이야. 그것도 축복할 이 하나 없는 이 삭막한 터에서.”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람이 훅 불어왔다. 오래되고 묵은 흙내음이 코끝을 스쳤다.
눈동자를 굴리자 수없이 세워진 비석이 보였다. 이것은 죽음이다. 죽은 자들을 매장하는, 묘지였다.
나는 잠시 말문을 잃은 채 가만히 그것을 눈에 담았다.
내가 끄집어내진 것으로 보이는 무덤은 땅이 움푹 파여 있었다. 나는 숨을 삼켰다.
“네가 날 불렀다.”
내가 불렀다고?
“정확히는 살고자 하는 네 본능이 나를 불렀겠지. 세상에 드래곤이 남아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려무나.”
그렇지 않았으면, 네가 아무리 위대한 드래곤이 될 씨앗이라고 한들, 저 뱃속에서 썩어 갔을 테니까.
“난감한 일이야.”
그녀는 나를 한쪽 팔로 성의 없이 안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오래 살면 때로는 보기 싫은 것도 보게 되곤 하지. 겨우 태어난 것뿐인 네 운명이 벌써 아주 엉망진창이구나.”
그녀는 내가 모르는 뭔가가 보이는 듯 한참이나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대로 두면 분명히 운명에 휩쓸려 금세 죽고 말겠지.”
그녀는 잠시 고민하는 듯 내 뺨을 가볍게 톡톡 치며 중얼거렸다.
“드래곤은, 좋은 부모를 만나야 한다고들 하지. 나 역시 기억도 안 나는 오래전에는 그랬다.”
눈을 가늘게 뜬 그녀의 몸에서 마력이 은은하게 흩어졌다.
무언가를 살피듯 한참이나 눈을 감은 채 뭔가를 하던 그녀가 이윽고 눈을 떴다.
“이렇게 해도 죽고 저렇게 해도 죽는, 네 가련하고 불쌍한 운명이 선택할 길은 하나뿐이구나.”
그녀가 그렇게 한마디 하더니 이윽고 느릿하게 묘지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다시 시선을 깜빡이자 순식간에 배경이 바뀌어 있었다.
눈앞에는 술에 거나하게 취한 개망나니가 있었다. 그는 술에 취한 탓에 뺨과 코가 온통 붉었는데, 최면이라도 걸렸는지 눈에 생기가 없었다.
“네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구나. 내가 해 줄 건 그 운명에 널 무사히 맡기는 일뿐이겠지.”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운명을 벗어나기 위해서 운명 속에 집어넣어야 한다니 이 얼마나 모순된 일인지.”
개망나니는 그때도 멍하니 굳은 채 입만 헤벌리고 있었다.
“이 아이는 부모 없이 자라야만 제 운명을 바꿀 기연을 얻겠구나. 드래곤은 잘못된 인연을 만나 죽는 일도 흔했다. 근데 이렇게 썩어 빠진 것에 해츨링을 내 손으로 맡기게 된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며 중얼거리는 퍼플의 표정엔 짜증이 그득했다.
“하지만, 내가 보는 미래는 이렇게 해야만, 이 작은 것의 미래가 평탄하고 행복해진다고 하니…….”
그녀는 손가락을 두어 번 튕기며 개망나니의 앞에 흔들었다. 손가락을 튕길 때마다 개망나니의 어깨가 크게 떨렸다.
“그렇다고 한들, 이런 인간 말종에게 맡긴다는 게 뼈 아픈 일이지.”
그녀가 말하며 천으로 감싼 나를 개망나니의 품에 넘겼다.
“기억해라, 이 아이는 네 아이다.”
개망나니가 멍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이 언젠가 네 목을 베겠지만, 그때까지 잘 키워 보는 게 좋을 거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개망나니가 나를 품에 끌어안았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시야가 서서히 어두워졌다. 눈앞이 흐릿해지며, 마치 밤이 찾아오듯이.
“원망은 말거라, 네 삶은 온통 가시밭길이니 이대로 네 부모에게 간다고 한들, 함께 망가질 수밖에 없으니.”
그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머릿속이 완전히 암전됐다.
다시 눈을 뜨자 그날 그 모습 그대로, 그녀가 서 있었다.
“이제 좀 속이 시원하느냐?”
“…….”
뺨이 뜨거웠다. 손을 들어 양 볼을 꾹꾹 누르자 손이 금세 축축해졌다.
“어느 날 꿈을 꿨지. 드래곤인 내게 꿈이라니, 놀라울 정도로 신기한 일이었어.”
“꿈…….”
“처음 보는 특이한 복장을 한 어린 인간이 나타나 내게 살려 달라고 했다. 그 목소리를 따라 홀린 듯이 간 곳에 네가 있었지.”
왜 눈물이 나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어린 인간’이 누군지는 알 것 같았다.
어린 차미소일 것이다.
아마도 영혼이 되어 아직 태어나지 못했을 내 반쪽.
“널 그 인간에게 보내지 못했던 건 네 운명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왜, 돌아가셨어요?”
그녀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솔직하게?”
“네.”
“널 잉태해서. 약한 인간의 몸으로 널 낳겠다고 버둥거려서.”
단호한 목소리가 아프게도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