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174
지난 2년간, 루실리온은 정말 하루도 빠짐없이 내 집에 드나들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단숨에 구해다 주었고 힘들 때는 항상 곁에 있었다.
“루실리온, 나는…… 누군가를 평생 사랑할 자신이 없어.”
누군가와 가정을 만들고 평범하게 살고 싶기는 했다. 한때 그게 목표였던 적도 있다.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
나는 드래곤이고 루실리온은 평범한 인간인데.
내가 그 긴 시간 동안 한 사람에게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게 가능할까?
반대로 루실리온이 그 긴 시간 동안 내게 같은 마음을 유지할 수 있을까?
‘왜 소설 같은 데 보면 드래곤은 변덕의 생물이라고도 하고…….’
게다가…… 시간이 지나면 나도 내가 어떻게 바뀔지 확신할 수 없는데.
“괜찮아, 내가 널 사랑할 테니까.”
“난…… 네 마음도 믿을 수 없어.”
얼마나 굳건한 마음이든, 내가 살아가게 될 시간은 사람의 마음 따위는 얼마든지 꺾일 수 있는 아주 긴 시간일 테니까.
“내 마음이 변했다고 느낀다면 그땐 날 죽여도 돼.”
무서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내가 황당함에 그를 바라보자 루실리온이 해사하게 웃었다.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대체 어떻게 그렇게 확신을 할 수 있어?”
“네가….”
루실리온의 입술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나를 정해진 운명에서 끄집어내 준 그 순간부터, 내 마음은 정해져 있었어.”
루실리온이 단호하게 말했다.
“네가 날 만났을 때 줬던 그 빵이, 내게 있어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야.”
나는 멍하니 바라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좋아해, 널 혼자 남게 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네 삶이 끝나는 그 날까지…… 내가 곁에 있을게.”
그게 얼마만큼 긴 시간이 될 줄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걸까?
나조차도 가늠이 되지 않아서 두려울 정도인데.
“아주아주, 긴 시간이 될 텐데?”
“응.”
“그사이에 내가 널 싫증 내거나 네가 날 싫증 내거나 네가 후회하게 될 수도 있어.”
“그럴 일은 없어.”
루실리온의 단호함에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너는 평범하게 살 수 있어. 언젠가 네가 홀딱 반할 사람이 생길지도 모르고…… 정해진 운명만큼만 살고 죽을 수도 있어.”
“…….”
“루실리온은 아주 대단한 사람이니까…….”
루실리온이 가볍게 웃었다.
눈꺼풀을 살짝 아래로 내리깐 루실리온이 짧은 숨을 뱉으며 입을 열었다.
“맹약을 해도 좋고 속박을 걸어도 괜찮아요. 에이린이 절 믿을 수 없다면 제 심장을 줄게요.”
“……너.”
“그러니까 일단 에이린이 절 믿어 줬으면 좋겠어요.”
그러자 내 손등 위에서 빛나던 빛의 고리가 모습을 감췄다. 루실리온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이린, 저는 내일부터 일주일간 일이 있어서 먼 곳에 다녀올 거에요.”
“……먼 곳?”
“그러니까 대답은, 그때 들려주세요. 일주일 뒤에.”
“…….”
루실리온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것이 그의 배려라는 것을 알지만 순간 심장이 덜컥했다.
루실리온이 내게서 물러나는 건 처음 있는 일이다.
‘그러고 보니…….’
최근 2년은 특히나 더 옆에 붙어 있었지. 정말, 대신관의 일은 제대로 하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내가, 만약에 거절하면?”
“……으음.”
루실리온이 내 말에 조금 난감한 빛을 띠는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러더니 이내 입가를 풀며 가볍게 웃었다.
“거기까진 생각한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네요. 동방에 머리를 전부 깎고 들어가는 새 종교가 생겼다는데, 거기나 가 볼까 싶기도 하고.”
“뭐?”
“소문을 듣자 하니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산중에 틀어박히는 신기한 종교라고 하던데요.”
나는 입술을 뻐끔대다가 문득 루실리온의 대머리 모습을 상상하곤 흠칫 떨며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거기에 들어가면 강제로 동굴에 들어가게 해서 수행을 시키는 터라 한동안은 속세로 나오지도 못하게 한다고 하니…….”
“…….”
“그러니까 한동안은 에이린을 괴롭히지 않을 수 있을지도요.”
루실리온이 눈을 아래로 슬쩍 내리깔고 우수에 찬 시선으로 퍽 애잔하게 중얼거렸다.
처연미가 흘러넘치는 그 모습에 말문이 턱 막혔다. 그런 내 모습에 루실리온이 웃었다.
“에이린이 정말로 싫다고 한다면, 그렇게 할 거예요. 에이린의 주변 사람이 전부 죽어서 에이린이 외로워질 때까지요.”
“……뭐?”
“그리고 나중에 외로워진 에이린의 앞에 다시 나타날 거예요. 에이린의 약해진 틈을 노리러.”
생각지도 못한 말에 눈을 크게 뜨자 루실리온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언젠가 에이린이 절 받아들일 때까지 그러겠죠.”
루실리온은 언제나처럼 웃고 있지 않았다. 살짝 굳은 표정은 어딘가 낯설기까지 했다.
“에이린이 절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루실리온은 가볍게 주먹을 쥐며 입술을 달싹였다.
“이런 생각을 할 정도로, 저는 에이린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되먹지 못한 인간이에요.”
“…….”
“에이린의 상처가 벌어지길 기다렸다가 그 틈을 노릴 정도로요.”
“루실리온…….”
“신을 모시게 된 것도 굶어 죽지 않으려면 신전에서 착한 아이로 있어야 했기 때문이고, 늘 웃는 얼굴인 것도 선량한 척하는 것도 전부 그게 편리하기 때문이에요.”
루실리온의 짙푸른 눈동자가 오늘따라 유독 시퍼렇게 보였다. 어쩐지 난생처음 루실리온을 제대로 마주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에이린의 앞에선 다정하려고 노력했는데, 다정한 저는 그다지 신뢰가 되지 않았나요?”
“아냐…….”
“저는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일 수 있어요. 에이린의 위협이 될 만한 거라면 뭐든지.”
“…….”
루실리온은 문득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죄송해요, 다만 저는……. 늘 웃고 있다고 해서 마음까지 가벼운 건 아니라고, 그걸 말하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루실리온이 언제나처럼 빙긋 웃었다. 그게 오늘따라 어쩐지 조금 서툰 미소처럼 보였다.
“일주일 뒤에, 찾아올게요. 에이린.”
루실리온이 느리게 몸을 돌렸다.
“내가!”
루실리온이 테라스 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 나는 배에 힘을 주며 힘껏 입을 열었다.
루실리온이 멈칫하며 몸을 돌렸다.
“이번에는…… 내가, 찾아갈게.”
“……에이린?”
“늘 루실리온이 찾아와 주니까. 대답을 할 때만큼은 내가 찾아갈게.”
루실리온의 눈이 살짝 커졌다가 살포시 작아졌다.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네, 기다리고 있을게요.”
“응, 제대로 고민하고 대답할게.”
“네.”
“그……!”
확, 밝아져 해사하게 웃는 루실리온의 표정을 보고 있노라니 심장이 이상했다. 잘생긴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이상할 일이다.
“어딜 가는지 몰라도 조심히 다녀와.”
“다녀오겠습니다.”
루실리온이 이내 테라스를 빠져나갔다.
그가 시야에서 보이지 않게 된 후에야 나는 간신히 한숨을 푹 내쉬며 난간에 기대어 주르륵 미끄러져 주저앉았다.
“진짜, 뭔가 치사하네.”
늘 물렁물렁하기만 하던 루실리온이 설마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사랑이 뭔데…….’
인연을 맺고 평생의 가족이 된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일까?
‘평생……?’
그게 가능할까?
“에이린?”
한참을 난간에 기대어 주저앉아 있는데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어느새 아빠가 테라스로 들어와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나? 열이 나는 것 같은데, 이만 집에 돌아가서…….”
“아빠.”
“그래, 아가. 또 그 별지긴지 뭔지가…….”
“나 청혼받았는데요.”
쨍그랑―!
아빠의 손에 들려 있던 와인 잔이 산산이 조각나며 와인이 붉은 핏물처럼 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아빠가 죽여 버리고 오마.”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아빠가 휙 몸을 돌렸다.
나는 급히 아빠의 팔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아빠아아……!”
폭주하는 아빠를 말리는 데 한참이나 걸렸다는 건 그다지 비밀은 아니었다.
* * *
“하아…….”
연회가 끝나고 방에 돌아와 침대에 털썩 드러눕자 허공에 새하얀 빛이 샘솟았다.
문득 손등을 맴돌던 반지 같던 빛의 고리가 떠올라 어깨가 흠칫 떨렸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빛 사이로 천진한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안녕, 애기야.”
“아…… 아르마 님.”
“뭐야, 뭐야. 그 실망한 얼굴! 선물 주려고 왔는데 너무하네!”
“선물이요…?”
내가 눈을 끔뻑이자 아르마가 해사하게 웃었다.
“예전에 별지기는 내가 잡아서 죽였다고 했지?”
“네…… 그랬죠.”
“그리고 예전에 내가 선물을 주겠다고 했었잖아.”
“아…….”
예전에 루실리온이 차미소의 세계에 대가를 치르고 간섭했다는 그 일의 연장선인 건가?
“오늘 너는 꿈을 꿀 거야.”
“꿈이라면…….”
“네가 꿨던 꿈 중에 아마도 가장 행복한 꿈이겠지. 무사히 정착한 걸 축하해, 애기야.”
새하얀 빛무리가 내 몸을 느리게 감싸 안았다. 아주 따뜻한 빛무리였다.
“그러니까 이건 내가 주는 생일선물이란다.”
그와 동시에 참을 수 없는 졸음이 쏟아졌다. 시야가 암전된 것은 순식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