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177
“저, 결혼하기로 했어요.”
쨍그랑―!
쨍그랑―!
식기가 떨어지는 소리가 퍽 크게도 들렸다.
“……겨, 겨, 결혼이라니 누가?! 누가!”
누구긴 누구겠어.
내가 지금 말했는데.
딱히 가족을 모아 두고 발표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때마침 곧 황성에서 있을 신년 연회 때문인지 우연히 대부분 본가로 돌아와 있던 참이다.
소리를 친 것은 의외로 칼란 에탐이었다. 물론 실리안 에탐이나 샤르네도 믿기지 않는 눈을 하고 있었다.
“겨, 결혼해……?”
샤르네의 목소리가 퍽 메어 있다 싶었는데 눈시울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렇게 갑자기……?”
“어, 언니……?”
“그런 얘기 한 번도 없었잖아…… 어떤 놈팡이야…… 잘 막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샤르네가 제 손톱을 질겅질겅 물어뜯으며 말했다. 샤르네의 표정이 금세 울상이 되었다.
대체 뭘 막았는데.
“결혼이라니…….”
고개를 들자 크루노 삼촌이 ‘네가……?’ 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저건 좀 열받네.’
내가 뭐 어때서.
팔짱을 끼고 노려보고 있노라니 크루노 삼촌이 금세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슬쩍 고개를 돌리자 이미 알고 있었던 아빠는 그다지 미동이 없었…….
우지끈―
손에 쥐고 있던 나이프가 정확히 반으로 접혔다.
“이런, 실수. 손에 힘을 너무 줬구나.”
두 번 실수했다간 사람 몸도 반으로 접겠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시선을 굴렸다.
“축하해. 어떤 사람이야?”
아크레아 고모가 드디어 정상적인 반응을 해 주었다. 반가움에 반짝 눈을 빛내자 그녀가 미간을 좁혔다.
“왜? 황태자 전하라도 돼?”
“아뇨, 그냥 대신관이에요.”
“……뭐?”
“대신관이요…….”
“……대신관은, 결혼이, 안 되지 않던가?”
아크레아 고모가 떨리는 눈동자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런, 거예요?”
고백받을 때 그런 얘기는 전혀 없었는데. 내가 떨리는 시선으로 아빠를 돌아보았다.
아빠도 그런 말은 없었잖아.
“뭔가 생각이 있겠지. 너희도 그만 날뛰고 앉아라.”
아빠가 가볍게 대꾸하며 칼란과 실리안을 향해 말했다.
“하지만 결혼이라니, 아버지도 허락하신 거예요?”
“그래.”
“왜요! 아직 어린데……!”
아니, 그렇게 어리진 않은데요.
입술을 뻐끔거리던 칼란이 나를 가만히 보다가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불퉁한 얼굴은 여전했다.
모두가 한 마디씩 축하를 건네주고 난 뒤 좌중이 숙연해졌다.
“우리 가주님 결혼식이니 꽤 성대하게 해야겠는걸.”
넬리아 고모가 가볍게 웃으며 분위기 전환을 시도했다.
나는 가만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알고 있어, 알고는 있는데 너무 갑작스러우니까…….”
칼란 에탐이 제 머리를 벅벅 문지르며 말했다.
“축하해! 네가, 앞으로도, 평생 행복했으면 좋겠어.”
“응, 고마워.”
내가 활짝 웃자 칼란 에탐이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손등으로 거칠게 제 얼굴을 문질렀다.
“나도 형이랑 동감이야. 에이린은 세상 누구보다 행복해졌으면 해. 너도 많은 고민 끝에 결정했겠지.”
실리안 에탐의 말에 절로 입가가 부들부들 떨리더니 둥근 호선을 그리고 말았다.
“응, 고마워. 오라버니.”
“에이리이인…… 나 자주 놀러 가도 돼……?”
“으응? 나 여기에 계속 살 거야.”
“정말?”
“응, 대신관이라곤 하지만 딱히 작위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신전 들어가서 살 수 있는 노릇도 아니니까.”
내 말에 샤르네가 울먹거리는 표정으로 나를 확 끌어안았다. 나도 마주 안아 주자 그녀가 서툴게 웃었다.
“그럼 됐어. 축하해, 에이린.”
“응, 고마워.”
결혼이라는 게 그렇게 축하를 받을 만한 일이라는 건 아직 실감이 나지 않지만 말이다.
“에이린.”
“네, 아빠.”
“원한다면 그놈 버리고 언제든 돌아와도 된단다.”
아빠의 커다란 손이 내 뺨을 가볍게 쓸었다. 나는 아빠의 품에 안겨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기분을 꾹 참으며 나는 애써 웃었다.
하나같이 모두 다정하고 따뜻해서, 여전히 꿈만 같은 현실이었다.
“다들 좋아해요.”
내 말에 식탁에 앉은 이들의 눈이 커졌다.
울먹거리는 얼굴을 가만히 지켜보던 이들이 몰려와 내 뺨을 이리저리 문지르며 꼬집는 것만 아니었어도…….
꽤 훈훈한 식사 시간이었다.
* * *
“―라는 일이 있었는데 어떻게 된 일이야?”
“아하, 올해까지만 하고 때려치울 겁니다. 대신관.”
루실리온이 해사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결혼은 역시 내년 봄쯤에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어떤가요? 에이린.”
“난, 뭐 상관없는데…….”
“황성 연회장을 빌려서 성대하게 해요. 모두가 에이린을 기억하도록.”
“음, 그것도 좋을 것…….”
콰앙―!
티 테이블이 크게 흔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잔뜩 골이 난 에노쉬가 있었다.
“사람을 앞에 두고 없는 취급을 하네?”
“아냐, 보고하러 온 건데…….”
“누가 황성 연회장 빌려준다고 했던가?”
“안 빌려주나요……?”
루실리온이 눈꼬리를 아래로 축 늘어뜨리며 물었다. 에노쉬가 손가락으로 루실리온을 가리켰다.
“형.아…….”
“혀, 혀, 형…… 누, 누가 형……. 으아아악!”
루실리온이 잔망스럽게 달싹인 한 마디에 에노쉬가 체통도 내던지고 비명을 지르며 응접실을 뛰어다녔다.
“형아?”
“빌려줄 테니까 좀 그만해애애애!”
“네, 알겠습니다.”
루실리온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을 싹 닦고는 날 보며 생긋 웃었다.
“진짜…….”
“매번 존경을 가지라고 하신 건 당신이 아닙니까.”
“내가 언제 이런 존경을……!”
에노쉬가 으득으득 이를 갈다가 얼굴을 푹 숙였다.
“됐다, 됐어. 그나저나 언제 결혼하나 했더니 이제 하는군. 너치곤 고백이 제법 늦었네.”
“……알고 있었어? 루실리온이 날…….”
“알고 있었는데.”
“언제부터?!”
“꽤 오래됐지. 내가 납치됐다가 아프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나. 왜, 그놈이 날 몇 번인가 고쳐 줬잖아.”
에노쉬가 고개를 까딱이며 루실리온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때 왜 날 도와주냐고 물었더니 네가 슬퍼하는 얼굴을 보기 싫어서, 라고 했거든.”
“……아.”
그렇게 오래됐다고?
내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루실리온을 바라보자 루실리온이 눈을 반달로 접어 보였다.
“사람이 그런 마음을 가지는 이유가 왜겠어. 그 사람이 좋으니까 그렇지.”
에노쉬의 말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렇게 오래된 줄은 몰랐다.
“그래도 잘됐네. 우리도 결혼할 거거든. 내년 봄에.”
“내년 봄은 우리가…….”
“그거 알지? 제국 국법상, 황족의 결혼 이후 1년은 결혼 금지인 거.”
“…….”
에노쉬의 이죽거리는 얼굴에 루실리온의 눈이 서슬 퍼렇게 달아올랐다.
‘루시를 저렇게 감정적으로 만드는 것도 에노쉬 말고는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의미에선 의외로 사이가 아주 좋은 게 아닌가 싶었다.
“봄엔 우리가 할 테니 여름에 하시죠. 황태자 전하.”
“그럴 수는 없지. 봄이라고 약속했거든, 릴리랑.”
슬쩍 릴리안을 보자 그녀는 가만히 웃고 있었다. 양보해 줄 생각이 없는 건 그녀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다른 나라 가서 하죠, 에이린.”
“아, 너희 둘은 내 결혼이 끝나고 1년 뒤까지 제국에서 못 나가. 막아둘 거거든.”
루실리온의 시선이 서슬 퍼레져서는 에노쉬를 노려보았다. 나는 루실리온의 옷자락을 살짝 당겼다.
“루시, 우리는 그 후년에 해도 괜찮잖아.”
“에이린…….”
루실리온이 작게 내 이름을 불렀다.
“뭐, 결혼 축하한다. 그리고 결혼이 끝나면 계승식이 있을 거야.”
에노쉬가 살짝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계승식이 있다는 것은 그가 곧 황제가 된다는 이야기였다.
“정말? 세상에, 축하해.”
“뭘, 원래 받아야 하는 걸 받은 것뿐인데.”
“아, 듣자 하니 곧 마탑주 자리도 바뀐다고 들었어요.”
릴리안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렇구나, 리하르트가…….’
리하르트에겐 돌아가서 편지를 써야지.
“결혼 축하해요, 에이린.”
“응, 언니도요.”
“너도 저거 데리고 살려면 힘들겠다, 반죽아. 집착이 장난 아니던데.”
“황태자께서 할 말인가요?”
릴리안 데이지가 생긋 웃으며 반문했다. 에노쉬가 움찔 어깨를 떨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저 둘도 여러 가지 있었던 모양이다.
“난 슬슬 일하러 가야 해서. 더 있다가 가도 돼.”
“네, 그럼.”
“……남의 응접실에서 이상한 짓은 하지 마라.”
“저도 가 볼게요, 에이린.”
두 사람이 인사를 건네곤 응접실을 벗어났다.
“그래서, 우린 왜 안 가는데?”
“그냥 이러고 있고 싶어서요.”
루실리온이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내리쬐는 햇살 아래에서 손을 맞잡고 있으려니 기분이 묘했다.
“좋네요.”
“응.”
“에이린.”
“응.”
“에이린 덕분에 제가 사람처럼 살 수 있었어요. 아니었으면 평생 혼자서 고독하게 살았겠죠.”
루실리온의 손바닥이 내 뺨을 가볍게 감쌌다.
“당신이 날 구원했으니, 앞으로 나는 남은 인생 전부를 써서 당신을 구원할게요.”
“……루시.”
“에이린이 외롭지 않도록. 살아갈 긴 시간 동안 무너지지 않도록. 고독해지지 않도록.”
루실리온의 얼굴이 바짝 다가왔다.
“절 선택해 줘서 고마워요.”
“나도…….”
나는 루실리온의 멱살을 붙잡아 내 쪽으로 휙 당기며 말했다.
“고마워.”
냉큼 입술을 그에게 박치기했다가 후다닥 떨어졌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루실리온의 눈이 살짝 커졌다가 이내 휙 둥글게 휘어지더니 내 팔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날 이렇게 도발하고 도망가면 어떡해요, 에이린.”
루실리온이 나를 끌어안은 채 소파에 드러누웠다.
엉거주춤 그의 다리 위에 걸터앉은 모습으로 뺨을 붉히자 그가 내 상체를 끌어당겼다.
“이건, 에이린 탓이에요.”
웃는 루실리온의 표정이 어쩐지 신이 나 보였다.
단단하게 뒷머리를 붙잡은 그가 나를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굳게 닫힌 입술을 벌리고 들어와 입 안을 헤집는 감각이 생경했다.
세상이 하얗게 번졌다.
루실리온과 꼭 닮은 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