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18
오늘은 달이 사라지는 ‘삭월의 밤’이었다. 그리고 삭월의 밤에는 에탐의 피가 잠들었다.
에탐의 누구도 광폭화하지 않고 안정적이며, 예민하지도 않게 깊은 잠에 빠질 수 있는 날이 바로 ‘삭월’이었다.
감당하기 힘든 힘을 얻은 인간에게 드래곤이 마련한 안식의 날.
이날은 직계, 방계 할 것 없이 에탐의 피를 이은 이들의 힘이 가장 약해지는 날이자, 에탐의 경비가 가장 강화되는 날이기도 했다.
에탐의 직계는 모두 이날 자신의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
정확히는 잠만 잔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물론…….
‘나는 멀쩡하네.’
잠이라고는 코딱지만큼도 오질 않았다. 방계는 약간 몸이 나른해지는 정도라고 듣긴 했지만…….
‘난 심지어 쌩쌩하네.’
나른함은 무슨, 전에 없이 팔팔하다.
에탐 가문의 피는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다는 사실만 명확해졌다.
“마일라, 오늘…… 무슨 날잉데? 나 모라.”
“오늘은 에르노 공자님의 생신이세요.”
“……옹.”
에르노 에탐의 생일이라고?
하필 삭월의 밤에?
그런 설정이 소설에 있었던가? 나는 의아한 낯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다음 주엔 생신 연회가 있을 예정이에요. 혹시 선물은 준비하셨나요?”
“아니?”
이런 이벤트가 있었나?
나는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생일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없었는데.
“에이, 아가씨께선 에르노 공자님의 유일한 따님이시잖아요. 제일 먼저 선물을 해드려야죠.”
“웅. 긍데 오느른…….”
삭월의 밤인데?
모두 잠이 든 날에 무슨 선물을 해 줄 수 있다는 거지?
“제가 좋은 방법을 알려드릴까요?”
“먼데?”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애써 미묘한 마음을 누르며 되물었다. 마일라는 언제나처럼 상냥한 표정이었다.
‘근데 진짜 범인이 누구였더라?’
분명히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에르노 공자님께서 늘 착용하시는 귀걸이가 있거든요.”
분명히 그리 비중 있는 역할은 아니었다.
“그게 사실은 구슬 모양인 거 아세요? 그걸 다 모으면 에르노 공자님이 무섭게 변하시는 일도 없을 거예요.”
그저 빚더미에 올라 돈이 필요했던 엑스트라가…….
“제가 그 나머지 파편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어요.”
또한 마찬가지로 비중 없는 엑스트라를 속여서 한창 사이가 벌어지고 있던 여주인공과 에르노 에탐이 가까워지기 위한 하나의 장치.
“아가씨께서 그걸 가지고 오시면 분명히 아가씨를 조금 더 사랑해 주실 거예요.”
……그게 나였던 모양이다.
문득 누군가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별관 뒤쪽으로 사라졌던 마일라가 떠올랐다.
‘왜 몰랐지?’
나는 이마를 짚었다.
‘생각났다, 내가 쫓겨난 결정적인 이유.’
본래 소설대로라면 나는 도마뱀이라는 사실이 밝혀져서 혈족 검사를 받는 중이어야 했다.
혈족 검사는 결과가 나오기까지 최소 한 달 이상이 걸린다.
그리고 소설에서 지금은 내가 유예기간으로 이 저택에 머물러 있을 때였다.
그리고 아마 결정적으로 이 일 때문에 쫓겨난 것이 분명했다.
‘왜 이제야 떠오른 거지?’
이상했다.
수년 동안 봐 온 소설이 어떻게 이렇게 특정 장면만 기억이 나지 않을 수 있는 걸까?
그리고 그 의심을 지우기라도 하려는 듯 머릿속에 소설의 한 장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에 나는 이마를 짚었다.
‘마일라가 범인이었구나.’
나는 거칠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나는 잠깐 고민한 끝에 고개를 저었다. 사실 별로 고민할 건 없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한 거지.
“시러, 이 먼청아.”
나는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그러자 마일라의 눈이 놀란 듯 커졌다.
원작이 아무리 좋아도 내 목숨을 걸고 싶을 정도는 아니었다.
“아가씨, 제가 그렇게 잘해 드렸는데…… 제가 한 말 중에 아가씨께 나쁜 게 있었나요?”
“나도 잘해 조짜나, 먼청아. 그리구 나두 나뿐 거 조은 거 구분할 수 이써.”
“그러다가 제가 실수로 아가씨가 수인이라는 걸 말해 버릴지도 몰라요.”
그 말에는 조금 놀랐다.
내가 수인이라는 걸 마일라가 어떻게 알고 있지? 딱히 들킨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제가 그렇게 오랜 시간 아가씨를 돌봤는데 모를 거라고 생각하셨나요?”
그렇게 말하는 마일라의 표정이 혐오스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다감했던 하녀의 표정이 아니었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하지만, 이상하네요. 원래라면 신년 회의에서 인간화가 풀렸어야 했거든요. 남대륙에서 죄인에게 쓰는 꽤 효과 좋은 약이라고 들었는데요.”
마일라가 언제나처럼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얗게 웃는 얼굴은 내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설마 그것도?’
약간 뒤통수가 얼얼했다.
‘알 게 뭐야.’
어차피 쫓겨나는 건 예정된 일이었고 밝혀지든 말든 내 알 바는 아니었다.
나는 몸을 돌렸다.
“후회하실 거예요.”
“너나 후해해라, 먼충아.”
“내일 아침이 기대되네요.”
“웅, 너 어차피 2주 디에 주금.”
나는 어린애처럼 대꾸하며 방으로 돌아갔다.
실제로도 마일라……, 아니 원작 속에 나왔던 그 엑스트라는 소설 속 악역에게 죽었다.
한 마디로 토사구팽을 당한 것이다.
‘…마일라가 결국 귀걸이는 훔치겠지만.’
그건 원작 그대로 흘러갈 이야기였다. 왜냐하면 그래야 여주인공이 에르노 에탐에게 능력을 써서 돋보일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최소한 적어도 그게 내 잘못이 되지는 않겠지.
하지만, 슬슬 떠날 준비는 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오늘은 여주인공도 없는데.’
여주인공도 에탐의 피를 짙게 타고났기 때문에 오늘 긴 잠에 빠질 것이다.
‘짐이나 싸자.’
나는 한숨을 폭 내쉬며 옆구리에 낀 호랑이 인형을 내려다보았다.
“에휴휴.”
인생은 늘 마음대로 안 된다.
‘호랑이는 데리고 가야지.’
그래도 내가 받은 선물이니까.
물론, 짐을 싼다고 해 봐야 이 인형뿐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다음 날, 마일라는 결국 사달을 내고 말았다.
* * *
“저 애가 정말……?”
“세상에…, 마일라가 보모처럼 저 애를 돌봤잖아.”
“은혜를 원수로 갚는군!”
“감히 에탐 가문에 더럽기 짝이 없는…….”
오늘은 에르노 에탐이 오지 않았다. 당연히 마일라도 없었다.
굶을 순 없으니 하는 수 없이 식당으로 가기 위해 타박타박 걸어가는데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뭔가 일을 또 친 모양인데.’
물론, 그래 봐야 기껏 수인이라는 사실을 정말로 밝힌 것뿐이겠지.
뒷소문이나 뒷담은 익숙한 일이다. 학교에서 겪었던 일에 비하면 그나마 여긴 악의가 없다.
“아가씨.”
그림자가 머리 위로 길게 늘어진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누구야?”
“에탐가의 집사장, 카일로라고 합니다.”
말이 집사장이지, 미르엘 에탐의 오른팔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가 왔다는 건…….’
미르엘 공작의 귀에도 이 사건이 들어갔다는 거다.
“가께여.”
“……무슨 일인지 아시고 있는 모양이군요.”
“저가 귀가 조아서여.”
“……그렇군요.”
내가 순순히 앞으로 걸어가자 카일로가 금세 따라와 앞장섰다. 그는 긴 다리로 나와 보폭을 맞춰 주었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그가 회의실의 문을 열며 말했다.
안에는 미르엘 공작 혼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에르노 에탐과 그 옆을 지키는 여주인공, 그리고 에탐 가문의 가신과 방계를 비롯한 주요 인사들이 있었다.
그리고 회의실 한쪽에 서 있는 마일라가 보였다.
축축하게 젖은 손수건을 들고 눈을 발갛게 물들인 그 모습을 보니 지금껏 잘해 준 것이 배가 아팠다.
‘내가 온갖 정보를 다 알려 줬건만.’
내가 도와주지 않아도 어차피 어떻게든 마일라는 살아남았을 것이다.
‘엑스트라 악역은 필요할 때까진 끈질기게 생존하니까.’
에서 나와 마일라의 존재 이유는 에르노 에탐과 여주인공을 이어 주는 역할이다.
실제로 여주인공은 에르노 에탐의 손을 잡고 그의 광폭화를 억제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쟤는 바본가, 엑스트라는 효용을 다하면 결국 죽는다는 걸 모르네.’
나는 느리게 심호흡을 했다.
“안뇽하세여.”
내 인사에도 누구 하나 대답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괜찮아.’
익숙한 일이니까.
학창 시절 내내 누구 하나 내 인사를 받아 준 사람이 없지 않은가.
아니, 사실 학창 시절뿐만은 아니지.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너, 지금부터 내 질문에 솔직히 답해라.”
“네.”
눈을 매섭게 뜨는 미르엘 공작의 으름장에 나는 끝을 예감하며 순순히 대답했다.
“네가 검은 옷을 입은 사람과 결탁해서 이놈의 귀걸이를 훔쳤다는데 사실이냐?”
“…….”
“그게 어떤 귀걸이인진 아느냐?”
와, 이걸 나한테 뒤집어씌운다고?
황당함에 말문이 턱 막혀서 고개를 들자 서러운 듯 울고 있는 마일라가 보였다.
“네가 수인이라는 사실은 어떻고.”
“…….”
내가 입을 열지 못하자 미르엘 공작이 주먹으로 탁자를 쿵 내리쳤다.
다행히 이번에는 탁자가 반으로 갈라지진 않았다.
“솔직하게 대답하거라! 아니라면 아니라고, 맞다면 맞다고!”
“수인은 마…….”
수인은 맞지만, 귀걸이를 훔치진 않았다고 대답하려는데 기다렸다는 듯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어……?’
언뜻 마일라의 입술 끝이 천천히 호선을 그렸다.
‘뭐야?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퍼엉-!
시야가 훅 낮아지며, 눈앞이 어둑해졌다.
인간화가 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