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27
“이제 와서 후회라도 하시는지요? 당연히 제가 알려드릴 이유는 없습니다.”
“내가 원하면 그거 하나 못 알아볼 줄 아느냐!”
“그럼 예민한 사람 성질 긁지 말고 따로 알아보시던가.”
꽤 오랜 시간 광폭화에 시달린 듯 에르노 에탐의 얼굴은 어둡고 날이 서 있었다.
광폭화의 증상이 올라오기 시작하면 온몸은 용암처럼 뜨거워지고 심각한 두통과 근육통에 밤잠을 이룰 수도 없을 터였다.
“애초에 칠칠치 못하게 네 물건을 관리하지 못해서 벌어진 일 아니냐!”
“……쓸데없는 일에 신경을 쓰시는 것 같은데요.”
서늘한 시선이 미르엘 공작에게 닿았다. 그는 어딘지 조금 초조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크흠. 그래서, 그 애는 찾았느냐고.”
“쫓아내고 나니 퍽이나 신경이 쓰이시는 모양입니다.”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지, 쫓아내긴 내가 언제 쫓아냈다고 그러냐.”
“애 앞에서 그러고 윽박지르는 게 쫓아내는 게 아니면 뭔지.”
코웃음을 치는 목소리에 미르엘 공작의 시선이 한층 사나워졌다.
“내가 하루 이틀 그러더냐! 다른 에탐의 아이들도 그렇게 자란다!”
에르노 에탐이 피곤한 낯으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따님.’
* * *
“나는 일이 있어서 계속 함께 있어 줄 순 없다.”
일주일이라는 긴 시간 만에 우리는 수도로 돌아왔다.
‘이렇게 멀었을 줄이야…….’
앉아 오느라 허리가 깨질 것만 같았다.
‘숨어서 왔으면 이미 난 죽었어.’
리하르트와 알비온은 어떻게 피곤한 기색 하나 없는지 의아할 정도다.
“이곳에 여관을 잡았다. 식사는 웬만하면 방에서 하도록 하고 밖으로 나가는 일은 삼가도록 해라.”
알비온은 그야말로 걱정이 가득한 듯 우리 둘을 침대에 앉혀 놓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사탕이나 먹을 걸 준다고 해도 따라가면 안 되고 일단 허름한 옷차림으로 접근하는 놈들도……, 그리고 돈은 절대 많이 들고 다니면 안 되고 골목길 같은 곳도 절대로…… 이거는 통신구이니 필요할 때 연락을 하면 되고……, 마지막으로 신변이 위험할 때는 이 보석을 깨라. 내가 바로 이곳으로 달려올 수 있도록 장치를 해 두었다.”
거의 두 시간이 넘는 연설에 리하르트와 내 정신이 비몽사몽 할 때쯤 알비온은 불안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도에서 가장 치안이 좋은 여관이지만 밖으로 나갈 땐 여기 이 로브를 쓰고 눈에 띄지 않도록 돌아다니거라.”
“…….”
“…….”
“대답은?”
“네, 네!”
“알겠다고, 원장님…….”
리하르트가 피곤한 얼굴로 흐물흐물 침대에 무너지며 말했다.
그러고도 불안한지 몇 번이고 당부한 알비온이 한참 만에 뭉그적거리며 여관을 벗어났다.
“뱀뱀아, 이리 와.”
알비온이 사라지자마자 리하르트가 반색하며 푹신한 침대의 한쪽 편을 내어 주며 말했다.
긴 여정으로 제법 피곤했던 탓에 나는 순순히 이불 속에 꼬물꼬물 들어갔다.
그러자 리하르트가 내 목까지 이불을 푹 덮어 주곤 옆에 털썩 누웠다.
“아, 좋다. 이렇게 있으니까 여행하러 온 것 같고 좋다, 그치?”
키득키득 웃는 소년의 얼굴이 가족 여행이라도 온 듯한 천진한 낯이었다.
“근데 수도까진 왜 오자고 한 거야?”
“약쏙 지키려구…….”
“약속?”
“응, 엄마랑 아빠 찾아 주기로 해짜나…….”
움찔 내 등을 토닥여 주고 있던 손이 사뭇 굳은 것만 같다.
하지만,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지쳐 있던 탓일까? 나는 그걸 돌아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수마는 순식간에 나를 집어삼켰다.
* * *
“너도 날 버리려고?”
색색거리며 잠든 에이린을 내려다보는 시선이 옅은 배신감으로 넘실거렸다.
“안 돼, 누구 마음대로. 너한텐 나밖에 없잖아, 나한테도 너밖에 없어.”
리하르트 콜린이 작게 중얼거렸다.
“너만, 날 피하지 않았어.”
에이린만이 원장님 다음으로 제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짐승도 인간도 전부 자신의 손길을 피하는데, 이 아이만큼은 순순히 제 손바닥에 올라탔다.
제 손길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내가 살렸으니까, 넌 내 거야. 나랑 평생 같이 있어야 해.”
색색 규칙적인 숨소리가 울려 퍼졌다.
“네가 내 유일한 가족이잖아. 온전히 나만의 것이야. 날 버린 가족보다 내가 찾은 가족이 더 좋아. 너도 그렇잖아.”
그러니까 이제 와서 진짜 가족을 찾는다고 한들, 달라질 건 없을 거다.
에이린의 손을 꽉 붙잡은 리하르트 콜린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늘 불면증처럼 잠들기 힘들었던 밤이, 에이린의 온기가 있으면 편안한 밤이 되었다.
분명 누구도 모르겠지만.
이윽고 서로의 손을 붙잡은 두 아이가 고른 숨을 내쉬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쏟아지는 햇살에 기다렸다는 듯 정신이 들었다.
‘완전히 잠들었네…….’
몸을 일으키려던 나는 손이 아직 잡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몸에서 힘을 뺐다.
고개를 살짝 돌리자 순진한 낯으로 새근새근 잠을 자는 리하르트가 보였다.
‘잘 자네.’
정말 ‘미친 또라이’라고 불리면서도 늘 인기투표에서 5위 안에 들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는 슬쩍 손을 뻗어 리하르트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살짝 쓸어올렸다.
‘콜린 공작가가 어디에 있더라….’
소설에는 약도 따위가 나와 있던 건 아닌 터라 수소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긴 했다.
‘얘를 데리고 나가긴 좀 그렇고…….’
여기서 기다리라고 해 봐야 말을 듣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눈을 뜨면 분명히 따라오라고 할 게 분명했다.
밤새 알비온이 잠시 들렀다 간 것인지 몇 가지 갈아입을 옷과 생필품, 그리고 소량의 돈이 탁자 위에 가지런히 올라가 있었다.
정말, 알비온은 분명 좋은 아빠가 됐을 텐데 말이다.
‘좀 미안하긴 하지만…….’
몰래 나가야겠다.
나는 느슨해진 손에서 슬쩍 내 손을 빼내곤 살금살금 내려와 옷과 로브를 들고 욕실로 향했다.
‘꼬리도 잘 숨겨야지.’
로브 안쪽으로 넣으니 다행히 티가 나진 않았다.
‘대체 이건 언제 사라지는 거야……?’
외출할 때마다 불편해 죽겠다.
‘그나저나 멋있다…….’
어제는 너무 피곤해서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는데, 여관이 무슨 호텔 수준이다.
‘아마 제일 비싼 여관에 비싼 방을 내어 준 거겠지.’
이 방 안 풍경에 대한 묘사를 본 기억이 있었다. 여주인공이 때때로 일이 있으면 묵었던 여관이 분명했다.
‘호텔 같다고 하더니 정말 호텔 같네.’
실제로 호텔은 사진으로밖에 본 적이 없지만, 그런 느낌이었다.
‘돈도 없을 텐데.’
알비온은 버는 돈을 족족 고아원에 쓰거나 아니면 다른 고아원에 기부하곤 해서 형편이 썩 넉넉하진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그가 영웅이라는 사실을 독자 외에는 아무도 몰랐다.
‘그래도, 여주인공을 만나면 구원받겠지.’
제 딸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여주인공을 위험에서 구하는 것으로 알비온은 구원받는다.
[……제대로 지키지 못해서 미안하다.] [네? 무슨 소리예요, 기사님은 절 지켜 줬어요. 사지 멀쩡하게 가족들의 품으로 돌려보내 줬잖아요.] [그래도 여자애 팔에 상처가…….] [영광의 상처라고 아세요? 그런 거예요. 고마워요, 기사 아저씨. 절 살려 줘서……. 그때, 그 순간에, 아저씨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어요.] [……!]약간 마음의 짐을 더는 정도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 뒤로도 여주인공과 알비온은 가끔 편지를 주고받는다.
그리고 우연한 계기로 여주인공이 알비온의 딸에 대한 실마리를 흘리면서 알비온은 딸의 무덤을 찾는다.
‘뭐, 내가 끼어들 틈은 없지.’
조금 이용하게 된 게 미안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나는 회색빛의 로브를 푹 눌러쓰고 아직 잠을 자는 리하르트에게 짧은 쪽지를 쓰곤 여관을 나섰다.
‘일단 돈이 필요한데…….’
현금을 꺼내려면 일단 은행을 가야 하는데, 에르노 에탐이 날 아직 찾고 있다면 위험한 게 아닐까?
알비온이 주고 간 돈을 조금 챙기기는 했지만, 이걸로 개인 마차를 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3만 로스트…….’
공용 마차가 아닌 개인 마차를 타는 건 좀 비싸다고 들었는데.
소설에선 통상적인 1인의 한 끼 식사가 6천 로스트 정도라고 했었다.
‘일단 물어보자.’
여관을 나선 나는 슬쩍 주변을 살폈다.
수도의 중심에 나와 보는 것은 그때 계좌를 개설하러 나왔을 때를 제외하곤 처음이었다.
‘엄청나게 크네…….’
에르노 에탐이 곁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세상이 이렇게 크고 넓었던가?
‘와, 빵 냄새.’
고소한 냄새에 코를 킁킁거렸다.
꼬르르륵-
대차게 울리는 뱃고동 소리에 저도 모르게 배를 부여잡았다.
민망함에 주변을 봤지만, 다행히 나같이 작은 아이를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 이른 아침 가게를 열고 장을 보느라 바빠 보였다.
‘배고프네…….’
밥을 먹지 않고 나온 탓이다.
나는 슬금슬금 빵집에 다가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빵에 시선을 주었다.
먹음직스러운 갓 구운 빵들이 가득했다.
‘하나 정도는 먹어도 되겠지?’
3만 로스트나 있으니까 말이다.
“어? 귀여운 꼬마 손님이네. 빵 사러 온 거니? 들어오렴.”
“아, 네.”
빵집 안으로 들어가자 고소한 냄새가 진동했다.
먹음직스러운 빵이 어찌나 많은지 몰랐다.
‘1천 로스트에서 6천 로스트까지 다양하네…….’
그렇게까지 부담되는 수준은 아니었다.
나는 돈을 꼭 쥔 채 빵집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전부 먹음직스럽게 생겼지만 유독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 있었다.
종류별로 있는 스콘이었다.
한 개에 3천 로스트지만, 내 주먹만 한 크기라서 충분할 것 같았다.
“요거 주세여! 딸기쨈 스콘!”
“잠시만 기다리렴, 갓 구운 거로 주마.”
“네에!”
나는 스콘을 들고 냉큼 가게를 벗어났다.
꼬르르륵-
스콘을 크게 한 입 베어 물려는데, 어디선가 우렁찬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어찌나 큰지 나도 모르게 고개가 돌아갔다. 골목길 바로 앞 쓰레기통에 쪼그려 앉아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회색 로브를 뒤집어쓰고 몸을 한껏 웅크린 사람은 내 시선을 느꼈는지 움찔 몸을 떨었다.
나는 애써 시선을 돌리며 다시 스콘을 베어 물었다.
웅크린 몸이 한층 더 움츠러들었다.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길바닥 거지한테 전부 적선할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아니긴 한데.’
그럼 보질 말았어야지, 멍청한 나!
나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몸을 돌려 빵집에 들어가 스콘을 두 개 더 샀다.
그리고…….
“저기, 오다 주워써. 너 머거.”
혹시나 동정이나 적선이라고 기분 나빠할까 봐, 어디 소설에서 본 것 같은 장면을 흉내 내보았다.
그 순간, 땅만 쳐다보고 있던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새파란 눈동자가 내게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