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34
제국의 문맹률은 높은 편은 아니지만, 그가 돌보는 아이 중에선 제대로 글을 쓰는 아이가 드물었다.
특히 이 정도면 정식 교육을 받았다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그가 본 에이린은 서툴기 짝이 없는 어리숙한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였는데 말이다.
[나는 언장님 따님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아라여.]하지만, 그의 아픈 과거를 알고 있는 기이한 아이.
사실 과거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영웅의 가족이 전쟁 중 죽었다는 것은 널리 퍼진 이야기였다.
다만, 그건 자신이 영웅임을 상대가 알고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첩자……는 아니겠지.’
잠시 생각하던 알비온이 고개를 저었다.
시골 영지에서 작게 운영하는 고아원에는 첩자를 보낼 만큼 시간이 남아도는 이는 없을 거다.
알비온은 완전히 세상과 연을 끊고 지내고 있었고 이제 와서 그를 세상에 끌어내 봐야 이득을 얻을 것도 없을 것이다.
전쟁은 끝났고 영웅은 조금씩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었다.
‘설마, 귀족의 아이인가?’
하지만, 수인 일족 중에 귀족이 있던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제국 내에서는 겨우 세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은 수다.
그 안에는 도마뱀 일족은 당연히 없었다.
‘……그렇다고 남대륙에서 왔다기엔 제국어에 더 익숙했지.’
알비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돈과 로브가 없었다. 수인의 마력을 갈무리하지 못하는 아이를 위해서 마련한 것이었다.
“콜린 공작가…….”
확실히 예전에 잃어버린 아이가 있다고 들었다.
‘리히트가 콜린 공작가의 아이라고?’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지도 못했다.
“…콜린 공작가라면 괜찮겠지.”
차후에 아이들을 만나러 가도 괜찮을 것이다.
‘문제는…….’
오늘 자정부터 열릴 지하 옥션이다. 대놓고 팔 수 없는 물건들을 파는 곳.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거래는 인간 거래였다.
‘다행히 VIP권은 구했다.’
그가 밤마다 용병 일을 할 수 있도록 오랫동안 뒤를 봐 준 친구에게 부탁해서 얻어 낸 것이다.
VIP권이 있으면 옥션에 내보내기 전의 상품들을 미리 구매할 권리가 부여된다.
구매할 생각은 아니지만, 미리 구조를 파악하고 아이들을 구출하는 것이 이번 목적이었다.
‘무너뜨리기엔 명월이 너무 거대해.’
옥션을 아예 망쳤다가 그들이 작정하고 자신을 찾으면, 고아원 아이들까지 위험할 것이다.
그러니 알비온의 목적은 오로지 어린아이들의 구출이다.
“슬슬 시간이 됐군.”
그는 혹시나 돌아올 아이들을 위해 돈을 조금 더 놓아두고 회색 늑대 가면과 흰 여우 가면을 챙겼다.
지하 옥션은 기본적으로 신분을 노출해선 안 되기 때문에 가면 착용이 규칙이었다.
비장한 마음가짐으로 알비온은 지하 옥션이 열리는 하룻밤의 화려한 성으로 향했다.
‘…이 정도 규모의 환영 마법이라니.’
마법사 한두 명을 갈아 넣은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지하 옥션에 지하 세계의 왕이라 불리는 ‘명월(明月)’이 얼마만큼의 돈을 갈아 넣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어서 오십시오, 회색 늑대님. 번호표와 입장 팔찌를 받아 주십시오.”
나무 손잡이가 달린, 끝이 둥근 새하얀 팻말에는 ‘182’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실례하겠습니다.”
황색 강아지 가면을 쓴 안내원이 종이로 된 팔찌를 알비온의 왼쪽 손목에 채워 주었다.
“이 팔찌가 있어야 경비견들에게 잡히지 않고 옥션 내부를 돌아다닐 수 있으니 나가기 전까지는 꼭 착용하고 계셔 주시기 바랍니다.”
“알겠네.”
“VIP 입장권에 포함된 특전을 이용하시겠습니까? 상품을 미리 만나 보실 수 있는 시간입니다.”
“그러지.”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근처에 서 있던 다른 안내원이 다가와 그를 지하 옥션의 뒤쪽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
“…….”
알비온은 만나서 안 될 아이를 만나고 말았다.
철창에 갇혀 있던 아이와 허공에서 눈이 마주친 알비온의 걸음이 뚝 멈췄다.
사르르 흘러내린 솜사탕 같은 머리카락과 투명하게 잘 굳은 호박석을 박아 둔 것 같은 영롱함을 지닌 눈동자.
알비온이 소리 없이 탄식했다.
“에이린…….”
“예? 고객님. 혹시 관심 가는 물건이라도 있으신지요.”
“아, 아닐세. 저 아이는…….”
“아, 오늘 막 들어왔습니다. 도마뱀 수인이지요.”
말없이 흔들리던 알비온의 시선이 다시 한번 에이린에게 닿았다. 차라리 잘못 본 것이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득 담아서.
그러나…….
눈이 마주친 분홍색 머리카락의 소녀는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다가 배시시 웃어 버렸다.
정말로 에이린이었다.
뒷골이 당기는 순간이었다.
* * *
“……도마뱀 수인.”
그렇게 읊조리는 알비온의 목소리가 음울했다. 나는 슬쩍 시선을 피한 채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예, 꼬리를 보니 보기 드문 은빛의 도마뱀입니다. 아마 돌연변이가 아닐까 싶습니다만, 희귀하죠. 애완용으로 키우시면 분명히…….”
까드득.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자세히 보니 그가 손에 쥐고 있던 나무판이 산산이 조각나 있었다.
“쯧, 조금 쥐었다고 깨지다니…. 너무 약한 거 아닌가?”
“어, 죄, 죄송합니다. 이게 왜 부서졌지……? 금이라도 가 있었나 봅니다.”
“이걸론 경매 참여는 못 하겠는데.”
“금방 새것으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잠시 구경하고 계시겠습니까?”
“그러지.”
안내원이 멀어지는 것과 동시에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던 알비온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나도 슬쩍 주변 눈치를 살피곤 알비온에게 다가가 철창을 붙잡았다.
“에이린,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그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머릿속이 복잡했던 탓에 편지지를 사러 갔다가 은행으로 가는 길에 붙잡혔다고?
차마 이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로브를 푹 뒤집어쓰고 있으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설마, 벌건 대낮에 지하 옥션의 납품자들이 길거리를 돌아다니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놈들 중에 수인 특유의 마력을 알아볼 수 있는 마법사가 있을 거라는 생각도 못 했고.
‘콜린 공작 말에 괜히 심란해져서.’
입양 제안 따위는 그냥 거절하면 좋았을 텐데.
맞지 않는 옷을 입어 봐야 누군가의 흠이 될 뿐일 테니까.
‘멍청한 나.’
이 정신 나이를 먹고 납치나 당하다니…….
자괴감에 할 말도 없다.
“수인화는 할 수 없나?”
“네….”
돌연변이이기 때문인지 아직 어린 탓인지 자유자재로 조절이 되지 않았다.
“……조금 있다가 올 테니 여기서 얌전히 기다릴 수 있겠나?”
“네.”
“그래, 곧 오마. 절대로 움직이면 안 된다.”
멀리서 흰 팻말을 들고 급히 달려오는 안내원을 보며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알비온이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고객님. 여기 팻말입니다.”
“이번엔 제대로 된 거겠지.”
“네, 그렇습니다. 금이 가 있지 않은지 확인하고 가지고 왔습니다.”
안내원이 특유의 유들유들한 말투로 두 손을 비벼 가며 알비온의 비위를 맞추는 게 보였다.
“그래서 관심 있으신지요?”
그 말에 알비온의 눈썹이 움찔 떨렸다.
“아니, 조금 더 둘러보지.”
“알겠습니다.”
안내원은 VIP 고객들의 이런 변덕이 익숙한 듯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혼자 탈출할 방법은 없겠지…….”
사자나 짐승을 가둘 법한 철창은 단단하게만 보였다.
‘어? 그러면 여기 어딘가에 여주인공도 있는 건가?’
이번에 납치당하는 거였지?
‘소설에 따르면 여주인공도 있었던 것 같은데, 근처에 없네.’
설마 여주인공 대신 내가 납치당하고 뭐 그런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납치를 당하고 그렇게까지 긴장하지 않았던 것은 이번 사태 때 알비온이 이 옥션에서 아이를 전부 구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날 발견해 줘서 다행이야.’
나는 서늘한 쇠창살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주먹을 꽉 쥐었다.
‘은행에 들어가지 않은 것도 다행이었지.’
은행까지 가는 모습을 봤다면 돈도 뺏겼을지 모른다. 가진 게 그것밖에 없는데 말이다.
“무엄하다!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이 땅에 처박아 똥물만 먹여도 모자란 돼지들이!”
어디선가 들린 독설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 검은 옷을 입고 여우 가면을 쓴 덩치가 큰 남자와 마른 남자가 은발 소년의 뒷덜미를 낚아채곤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아, 썅! 진짜 종알종알 시끄럽네. 이 새끼 짜증 나는데 좀 때리면 안 되냐?”
“하? 네 얼굴이 더 짜증 나는구나. 그야말로 수준 낮은 얼굴이다. 쓰레기장에 버려진 곰팡이 슨 썩은 빵도 네놈의 낯짝보다는 낫겠구나. 가면을 쓴다고 네놈의 썩은 빵 같은 낯짝이 가려는 지겠느냐?”
“이 새끼가 진짜……!”
“야, 그만둬. 열심히 떠들라고 해. 주인 만나면 저놈도 현실을 알게 되겠지.”
“하……, 썅.”
그들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내가 있는 철창의 문을 열고 그를 던져 넣었다.
여우 가면을 쓴 마른 남자가 손등으로 성의 없이 철장을 툭툭 쳤다.
“어이, 싸우지 말고 있어라.”
“어이,”라니 삼류 악당 같은 대사에 소름이 주르륵 돋았다. 목소리는 얼마나 느끼한지 모른다.
“참 반반하단 말이지. 어디서 이런 금덩이가 떨어졌는지.”
남자가 내 턱을 우악스럽게 움켜쥐고 이리저리 훑어보며 감상평을 흘리더니 몸을 돌렸다.
“제대로 배워 먹지 못한 놈들은 행동조차 천박하고 저질스럽기 짝이 없군.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내가 저놈들을 전부 짐승 먹이로 던져 줄 거야!”
내가 흘긋 뒤를 보자 흙투성이의 소년이 제 옷을 털며 일어나고 있었다.
“계집, 뭘 그렇게 보느냐? 눈 안 까느냐?”
“…….”
“감히 지금 내 말을 무시한 것이냐? 그렇게 굴다가 혀가 없어지는 수가 있다.”
열두 살쯤 되었을까?
오만한 낯의 소년은 팔짱을 낀 채 코웃음을 치며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등장부터 몰아치는 폭풍 같은 소년에게 적응하지 못하고 얼떨떨하게 입을 열었다.
왼쪽 눈 밑에 자리 잡은 눈물점이 유독 시야에 들어왔다.
“아녀…….”
“쯧, 대답이 이렇게 늦다니. 참으로 멍청한 밀가루 반죽이구나.”
“…….”
불안한 느낌이 싸하게 등줄기를 스쳤다.
은발 소년의 외모는 평범하지 않았고 눈동자는 새빨간 색이었기 때문이다.
‘은발에 적색 눈동자의 소년.’
핏줄이 비치는 창백할 정도로 새하얀 피부, 눈물점과 오만하기 짝이 없는 독특한 말투, 안하무인인 성격.
이 모든 것들은 어딘가에서 들어본 적이 있다.
“멍청한 기사 놈들, 아직까지 이 몸의 위치를 찾지 못하다니. 내가 돌아가면 전부 해고다, 전부 해고! 감히 황족의 핏줄을 이렇게 더럽혔으니 죽여 전시해 버릴 것이다.”
그렇다.
그는 망나니 막내 황자, 에노쉬 샨 오리에드.
그는 시한부의 운명을 타고난 비운의 조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