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36
“머가?”
“…그녀에게 뭐라고 써야 할지 모르겠다. 이 몸과 그녀는 아직 친구… 같은 그런 관계라서 말이다.”
“몰라.”
“뭐?”
“나두 처음이라 몰라. 하고 시픈 말을 하면 대자나?”
“음… 하고 싶은 말이라. 일리 있는 조언이구나, 반죽.”
반죽, 반죽, 시끄럽네.
확 기절시켜 버릴까.
나는 그를 흘겨보곤 편지지 한 장을 꺼냈다. 에르노 에탐에게 쓸 편지였다.
나는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긴 펜을 작은 주먹으로 쥐고 삐뚤빼뚤한 글씨를 적어 내려갔다.
살짝 옆을 보자 에노쉬도 심각한 낯으로 천천히 편지를 적고 있었다.
나는 최대한 짧게 할 말을 적고 편지를 반으로 접고 그 안에 파편을 넣은 뒤 다시 한번 반으로 더 접었다.
그다음 편지 봉투에 넣고 옷의 소맷자락에 구기듯 밀어 넣었다. 혹시나 들키지 않기 위해서.
나중에 알비온에게 부탁해야지.
“야, 반죽. 이 몸의 편지가 어떤지 한 번 읽어보아라. 이 정도면 그녀가 내게 답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나?”
에노쉬가 내 손에 거의 편지를 욱여넣었다.
엉겁결에 편지를 받은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편지를 보았다.
나도 모르게 입을 떡하니 벌렸다.
이게 무슨 스토킹 편지야?
편지만 봐서는 눈치 없는 에노쉬가 싫다는 릴리안 영애를 쫓아다니며 오만하게 군다고밖에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편지만 보면 쌍방도 아니었네…….’
누가 봐도 에노쉬의 일방적인 짝사랑에 가깝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스토리는 본 기억이 없다.
오만무도한 병약 황자가 성격이 더럽다는 얘기는 봤지만, 이 애가 누군가를 좋아한단 얘기는 처음이었다.
“어디 문제가 있으면 한번 가감 없이 지적해 보아라. 이 몸이 특별히 허락하마.”
“전부.”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뭐?”
“전부 문제야.”
무슨 연애 편지를 이렇게 쓴단 말인가.
내가 아는 게 별로 없지만, 이 편지가 0점이라는 사실은 알 것 같았다.
“이 애 조아하는 거 마자?”
에노쉬가 주인공이 아닌 소설이었으니 당연히 이런 세세한 사정까진 나오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릴리안?’
이것도 낯이 익은 이름이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이상하단 말이야……, 어떤 건 이상할 정도로 선명하고 어떤 건 이상할 정도로 떠오르지 않아.’
누군가 기억의 문을 강제로 여닫는 것처럼 말이다.
“정말 이게 하고 시픈 말이야?”
“……그래.”
“이거 아냐. 진심을 담아서 솔찍하게 말하지 안으면 조은 답은 얻지 모태.”
“…진심은 담을 수 없다. 진심을 담으면 분명…….”
무언가 말을 하려던 에노쉬가 갑자기 작은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더니 미친 듯이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야, 갠차나……?”
“콜록, 콜록…… 쿨럭…….”
거칠게 기침을 하던 에노쉬의 손에 벌건 핏물이 묻어났다.
“크흑…….”
그거로도 부족한지 에노쉬가 심장을 부여잡고 몸을 공벌레처럼 바싹 웅크렸다.
“아아악! 흐윽…….”
가슴 쪽을 부여잡은 그가 비명을 터뜨렸다.
“에노시! 안 대, 곧 마중이 올 꺼야.”
옥션이 시작하면 알비온이 움직일 거다. 나는 급히 에노쉬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뜨거워.’
펄펄 끓는 물에 손을 집어넣은 것만 같다.
“하윽, 하윽…….”
에노쉬의 호흡이 거칠고 빨랐다. 숨소리의 반이 쇳소리가 섞인 듯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간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였다.
“이러지 마…….”
대체 내 앞에서 다들 왜 이러는 거야?
평탄한 날이 없는 것만 같았다.
“제발…….”
나는 에노쉬의 머리를 엉거주춤 끌어안은 채 눈을 질끈 감았다.
“누구라도 좋으니까 여길 나갈 수 있게 도와줘…….”
버릇처럼 눈을 감고 소원을 빌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런데도 늘 꽉 막힌 벽을 향해 눈을 감고 두 손을 맞잡았던 어린 날처럼.
그 순간….
사아아악-
청량한 무언가가 귓가를 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허공에서 빛무리와 함께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어.”
“……아?”
“하윽…….”
“주인님…?”
“루실리온?”
눈이 절로 커졌다.
갑자기 하늘에서 철창 안으로 뚝 떨어진 루실리온이라니?
루실리온은 튜닉을 걸친 가벼운 외출복 차림이었다.
“여기서 모해……?”
“……주인님께서 말도 없이 사라지셔서 찾고 있었어요.”
“아…….”
“그러는 주인님께선 이런…….”
루실리온의 푸른 눈동자가 느리게 가라앉더니 서서히 가늘어졌다.
“불결한 곳에서 뭘 하고 계시나요?”
“……잡혀, 왔는데…….”
민망해진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더듬거리며 대답하자 루실리온이 입꼬리가 살짝 굳었다. 그가 느리게 주변을 훑었다.
‘저게 정말 아홉 살 맞아……?’
인생 3회차라고 해도 의심하지 않을 자신 있다.
“어딘가에서 도와달라는 목소리가 들린 것 같더니…… 여기였어요.”
눈이 절로 커졌다.
마음속으로 도와달라고 했지만, 그게 어떻게 루실리온의 귀에 들어가서 루실리온이 여기까지 올 수가 있었지?
“절 부른 게 주인님이었어요?”
내게 다가온 루실리온이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있는 나와 눈을 마주하며 물었다.
“……아마도.”
“역시 주인님께선…….”
루실리온이 의미심장한 말을 하더니 천천히 시선을 내려 내가 끌어안고 있는 에노쉬를 보았다.
“얘가 위험해……, 당장 나가야 대는데….”
철장이 단단해도 너무 단단하다. 내 걱정스러운 시선을 발견한 듯 루실리온이 나직하게 말했다.
“주인님께서 원하신다면…….”
루실리온이 무릎을 꿇은 채 빙긋 웃으며 에노쉬의 이마에 손바닥을 올렸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새하얀 빛이 새어 나와 에노쉬의 이마에 스며들었다.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았던 에노쉬의 호흡이 고르게 바뀌더니 정신을 잃었던 눈꺼풀이 천천히 열렸다.
“임시방편이에요, 선천적으로 약한 몸은 제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응, 나갈 수 있을까?”
“주인님께서 원하시기만 한다면… 그게 무엇이든 가능하게 만들겠습니다.”
루실리온이 내 작은 손등에 깃털처럼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정말 이유를 모르겠어.’
겨우 빵 하나 줬다고 사람을 얻을 수 있었다면 나는 평생 내 사람을 얻기 위해 고생했을 리가 없다.
꿍꿍이는 분명히 있겠지만…….
“고마어, 도아줘서….”
인사할 건 해야지.
내 인사에 묘한 표정으로 나를 보던 그가 활짝 웃었다.
“네, 주인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웅크리고 있던 에노쉬도 천천히 정신이 드는지 내 품에서 벗어났다.
“이제 가실까요?”
루실리온이 한 손으로 철장을 붙잡으며 반대쪽 손을 내게 내밀었다.
“응.”
루실리온이 붙잡고 있던 쇠창살이 새하얀 빛에 휩싸이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에노쉬를 보았다. 에노쉬는 창백한 낯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꽉 쥔 주먹이 잘게 떨리고 있다. 공포에 질린 것이다.
“…가쟈.”
나는 꽉 쥔 에노쉬의 주먹 위 손등에 조심스레 손바닥을 올리며 말했다.
“……그래.”
한창 옥션이 시작됐기 때문인지 다행히 이쪽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우리는 무대 뒤쪽에 있던 로브를 대충 뒤집어쓰고 살금살금 무대 뒤쪽에서 벗어났다.
사람이 적은 무대 아래쪽으로 기어들어 가려는데, 언뜻 커튼 너머로 눈에 익은 사람이 보였다.
아니, 누군지 알 것 같은 사람이 보였다는 것이 더 옳겠지.
모두가 가면을 쓰고 있었으니까.
‘……붉은 드래곤 가면.’
소설 묘사에 따르면 이 가면을 쓴 주인은 단 한 명이었다.
이 땅 위에서 감히 드래곤의 이름을 쓸 수 있는 존재.
에르노 에탐.
그가, 지하 옥션 회장에 있었다.
손등에 턱을 괸 채 권태로운 시선으로 열기로 달뜬 무대 위를 바라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