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38
“주인님.”
“루실, 리온……?”
고개를 돌리자 멀끔한 낯을 한 루실리온이 보였다. 나는 짧게 숨을 뱉었다.
“네, 다급해 보이시기에….”
“아.”
“붉은 드래곤에게 편지도 전해 주었고 흰 여우에게 무사하다는 말도 전했습니다.”
“응, 고마어. 근데 당장 나가야 대.”
“네, 가겠습니다.”
루실리온이 에노쉬를 등에 업었다.
오랜 시간 아팠던 탓에 열두 살인데도 불구하고 열 살인 루실리온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작은 에노쉬가 힘없이 루실리온의 등에 자리했다.
“하, 땀 냄새 나는 하찮은 종자의 등 따위에 업히게 되다니…, 수치도 이런 수치가 없구나.”
이 상황이 돼서도 얘는 이런 말을 하네…….
“어디로 가면 되나요?”
“황성의… 경비대, 아스론…….”
루실리온이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던진 질문에 대답하던 에노쉬가 말을 채 끝맺지도 못한 채 고개를 툭 떨궜다.
“야! 에노시!”
이놈아, 여기서 죽지 마라!
내가 작게 그를 흔들며 불렀지만, 반응이 없다.
루실리온이 또 그 의미불명의 흰빛을 뿜었지만, 아까와는 다르게 큰 효과는 없었다.
“……조금 빨리 가야겠네요, 주인님.”
주변에 사람이 너무 많다.
나까지 데리고 가다간 속도도 늦어지고 들킬 확률도 높아질 거다.
“먼저 가.”
“주인님.”
“난 여기서 너 기다리께. 방금처럼 가마니 이쓰면 대지?”
“……네, 이 막을 두른 건 마력도 아니라 마법사도 모릅니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으니 소리만 내지 않는다면 아마 들키지 않을 겁니다.”
그는 잠시 나와 등에 업은 에노쉬를 번갈아 보더니 짧은 한숨을 뱉었다.
“본래라면 주인님의 곁에 있고 싶지만…….”
그가 느리게 눈을 내리깔았다.
“주인님이 원하시니 다녀오겠습니다. 금방 오겠습니다.”
“응.”
루실리온의 푸른 눈동자가 한층 채도가 높아지는가 싶더니 그가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수풀이 살짝 흔들렸다. 아마 보호막을 친 것과 비슷하게 무언가 눈에 보이지 않는 방법을 사용한 게 분명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나무를 등받이 삼아 주저앉고 무릎을 끌어안았다.
‘무사히 전달받아서 읽었다면 금방 개발하겠지.’
재료를 다 적어 주었으니 배합만 찾으면 될 텐데, 칼란 에탐이라면 금방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나저나 수도에 있어서 그런가? 계속 이상한 일에 휘말리는 것 같단 말이지.
‘그냥 고아원으로 돌아가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로울 것 같긴 하지…….’
리하르트를 떼어놓아야 한다는 게 문제긴 한데…….
‘음, 여주인공이 있을 법한 곳에 가 보라고 할까?’
요는 나한테서 관심이 없어지면 되는 거니까.
‘그나저나 오늘 여주인공은 정말 납치되지 않은 모양이네…….’
어차피 리하르트도 루실리온도 여주인공을 만나면 여주인공에게 푹 빠질 것이다.
그런 운명이니까.
본래도 여기에 납치되는 건 내가 아니라 여주인공이어야 했고 여기서 에노쉬와 안면을 트는 것도 여주인공이어야 했다.
그 뒤로 에노쉬가 죽기 전까지 두 사람은 친구가 된다.
에노쉬는……, 여주인공을 이성으로써 좋아하진 않았었지. 친구로서 귀애는 했었지만 말이다.
‘피곤하네.’
무릎 사이에 막 얼굴을 묻을 때였다.
바스락-
수풀이 스치는 소리에 귀가 쫑긋 섰다. 나는 숨소리도 최대한 죽인 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코너를 돌아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보자마자 숨이 절로 멈췄다.
붉은색 드래곤 가면을 쓴 남자였다.
한 손에는 내가 쓴 것이 분명한 편지 봉투와 편지지를 꽉 움켜쥐고 있었는데, 대차게 구겨진 것이 내 미래처럼 보였다.
그는 성큼성큼 내 쪽으로 가까워졌다.
가면을 쓰고 있는 탓에 표정이 전혀 보이질 않아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나 찾으러 온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에르노 에탐이 그 정도로 열정적인 사람은 아니잖아?
너무 주제넘은 말을 했나?
아닌데, 편지에 딱히 그런 말은 없었던 듯했다.
너무 글씨가 삐뚤빼뚤했나?
아직 손이 작고 획순을 잘 모르는 터라 영어 쓰듯이 어설프게 쓴 건데. 그래도…, 글씨가 큼직하고 삐뚤빼뚤하긴 했다.
태국어와 라틴어를 합쳐 둔 것 같은 느낌이라서 도저히 따라 쓸 수가 없었다.
보고 읽는 건 어떻게 하겠는데…….
‘아니면, 정보 출처를 모른다고 적어서 그런가?’
확실히 출처도 모르는 정보를 신용할 순 없을 테니까 확인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경우 아마 루실리온을 찾으러 왔을 확률이 높았다.
‘…그것도 아니면, 역시 내가 파편을 훔쳐 갔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그래도 그건 방금 돌려줬는데….
그 귀걸이가 아니긴 하지만, 같은 물건이 아니라곤 해도 효과는 똑같을 텐데….
‘대체 왜지…?’
역시 괘씸해서 찾고 있는 건가?
붉은 드래곤 가면의 사내가 점점 가까워졌다. 나는 혹시 몰라서 슬쩍 손을 들어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숨소리도 내면 안 돼.’
에르노 에탐의 예민함은 소설에도 몇 차례나 적혔을 정도였으니 잘못하면 반드시 들킬 거다.
“흔적은 이쪽으로 이어졌는데….”
그의 서늘한 목소리에 눈을 질끈 감았다.
늘 듣던 나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아니다. 차갑게 가라앉아 빙판 위를 맨발로 걷는 듯한 서릿발이 휘날리는 목소리다.
입을 너무 틀어막은 터라 숨이 막혔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온몸을 비틀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그가 근처에서 떠나지 않아서 차마 숨을 뱉을 수가 없었다.
‘안, 안 돼. 이러다 숨이 먼저 막혀 죽겠어.’
눈을 질끈 감고 혀를 깨물었다. 최대한 정신을 깨우기 위해서였다.
‘제발…….’
에르노 에탐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가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갔다.
그가 코너를 돌 때쯤이 되어 나는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을 떼 내고 참고 있던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허억…….”
그나마도 혹시나 그가 듣기라도 할까 봐 최대한 소리를 죽인 채 간신히 뱉어 낸 숨이었다.
그와 내 거리는 몇백 미터가 됐으니 아마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에르노 에탐의 걸음이 뚝 멈췄다.
그가 휙 몸을 돌렸다.
그러더니 다시 내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모자란 숨을 채우던 나는 급히 다시 손을 들어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콰득콰득 짓밟히는 잔디가 어쩐지 나를 보는 기분이었다. 두려움에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았다.
이번에는 완전히 코앞이었다.
“왜…….”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 숨어 있는 거지?”
허공에 흩뿌려진 목소리는 누구에게 닿는지 모를 내용을 담고 있었다.
방금까지는 서늘한 목소리였는데 지금은 어쩐지 잔뜩 누그러져서 융단처럼 한껏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나는 눈을 도르륵 굴렸다.
‘루실리온을 찾나?’
여기에 누가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은 분명했다.
다만, 소설에 적힌 대로의 에르노 에탐이라면 루실리온을 찾기 위해서 이 주변을 난장판으로라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검을 뽑지도 마력을 흘리지도 않고 있었다.
“날 만나고 싶지 않았나?”
“…….”
“내가 네게 무섭게 굴었나?”
“…….”
이거 어쩐지, 루실리온한테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에이린.”
“흡…….”
아차, 나도 모르게 손을 떼고 숨을 크게 들이마셔 버렸다.
아마 이것으로 그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았을 것이 분명했다. 아니더라도 이곳에 누군가 있다는 것은 눈치챘겠지.
‘나인 줄 어떻게 알았지?’
겨우 몇백 미터가 떨어진 곳에서 숨을 한 번 들이마신 것뿐이라고.
‘튈까?’
이대로 뒤를 돌아 도망을 간다면……, 분명히 잡히겠지. 그건 좋은 방법 같진 않았다.
루실리온이 나타나서 눈치 빠르게 사실 숨어 있던 게 자기인 척해 주면 좋을 것 같은데…….
…는 이걸로 납득할 리가 없잖아!
‘에르노 에탐이 바보도 아니고 속을 리가 없나.’
그럼 이 난관을 대체 어떻게 헤쳐 나가면 되는데?
결국 얼굴을 맞댈 수밖에 없는 건가? 그런 거라면 적어도 루실리온이 있을 때 하고 싶다….
“이제, 내가 싫어진 건가……?”
나직한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에이린, 대답해 주렴.”
“…….”
외면하고 있던 목소리를 직시하기 위해 천천히 고개를 들자, 그는 정확히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보호막이, 언제 없어졌지……?’
잠시 든 생각은 에르노 에탐이 내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는 순간 사라졌다.
나는 멍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네가 날 아빠라고 불렀다.”
“…….”
“네가, 내 딸을 하기로 했다.”
“…….”
“내가 널, 따님으로 삼기로 했다. 그게 싫었느냐?”
시선을 마주친 그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여…, 싫지 않아써여….”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에탐의 피는 반의반조차 잇지 못했고 대단한 힘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뭣보다 하찮은 도마뱀 수인이었다.
“그렇다면 내 곁에 있어.”
그가 말했다.
“내가 떠나라고 할 때까지 언제라도 계속…….”
에르노 에탐이 그때처럼 내게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내 곁에 있거라.”
도마뱀이 되었던 내게 손을 내밀었던 그때처럼.
‘……아, 그래서 이 사람은 그때 손을 내밀었구나.’
뒤늦은 깨달음이 뒤통수를 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