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40
나는 내게로 뻗은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숨을 삼켰다.
눈앞에 있는 것이 꿈만 같아서 차마 잡을 수가 없었다. 잡으면 사라질 꿈이라면 고통스러우니까.
“시간이 필요하다면 생각할 시간을 주마.”
“…….”
“하지만, 고민도 생각도 내 곁에서 하렴, 따님.”
“…….”
“따님이 갑자기 사라져서, 놀랐다.”
기억하고 있던 다정한 목소리에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주먹을 꽉 쥐었다.
그가 내민 손은 여전히 내 앞에 있었고 나는 여전히 그 손바닥 위에 내 손을 올리지 못했다.
“놀이…자나여…….”
“무슨 소리니?”
“아바지두, 따님두…… 다 놀이자나여. 아바지가 질리면…, 난 떠나야 하자나여.”
그런 거라면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전전긍긍하는 삶은 언제나 힘들었다.
사랑받기 위해서 행동하는 것도 지쳤다. 그러나 전생의 나는 모든 순간을 그렇게 살아갔다.
회사에서도 대학에서도 남들 입맛에 맞는 삶을 살았다. 상대가 좋아할 법한 ‘나’의 모습을 꾸며 내면서.
하지만, 그게 얼마나 피곤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친구는 많았지만, 진짜는 없었다. 꾸며 낸 모습으론 얕고 넓은 관계만 유지할 수 있었으니까.
“……그렇지.”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어깨가 크게 떨렸다.
“분명히 처음에는 그랬다.”
아냐, 그렇게 말하면 마치 지금은 아니라는 것처럼 들린단 말이야.
“하지만, 나는 네 생각보다도, 그리고 내 생각보다도 네게 진심이었던 모양이야.”
“…….”
“네가 날 아버지라 부르고 모두가 도망치는 그때 따님만이 정면으로 달려와 날 구했다. 그 순간부터 어쩌면 나는 널 진짜 자식으로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구나.”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친자식도 미워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이다. 배 아파 낳은 자식조차 진심으로 원망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이었다.
“저는… 징그럽구 못쌩긴 도마뱀이에여…. 아바지, 도마뱀 시러하자나여…….”
에르노 에탐이 파충류를 싫어한다는 사실은 소설에서 몇 번이고 언급이 되었다.
내 말에 에르노 에탐은 한쪽 눈썹을 쓱 치켜들었다.
“아닌데.”
“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동물이다.”
“……네?”
“애초에 네가 수인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나는 짧게 숨을 뱉었다.
“하지만, 미리 말해 주기를 바랐다. 그렇게 알고 싶진 않았으니까.”
“……아.”
“하지만, 따님도 두려웠던 거겠지.”
두려웠다.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한순간의 꿈이 깨질까 봐.
뭐, 결국은 마일라에 의해서 강제로 깨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저는 인간화도 제대로 못 해여….”
“남대륙에서 널 가르쳐줄 수인이라도 잡아 오마.”
“비밀두 마는데…….”
“뭘 하든, 날 뒷배로 두고 움직이렴. 따님은 무엇이든 앉아서 호령하면 된다.”
나는 벌벌 떨리는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내게 가족은 없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그는 내 느려터진 움직임에도 묵묵히 기다렸다.
“저 여기에 이써도 대여…?”
“그래.”
짧은 대답이었지만, 내겐 확약처럼 들렸다.
이윽고 내가 그의 손바닥 위로 손을 올렸을 때 에르노 에탐은 내 손을 꽉 붙잡곤 나를 품에 안아 올렸다.
“내가 요기 있는 거… 어떠케 아라써여?”
“네 주변에선 항상…….”
그가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청량한 냄새가 난단다.”
그렇게 말한 에르노 에탐이 나를 품에 힘껏 끌어안았다.
‘청량한 냄새?’
옷자락에 코를 박고 킁킁거렸지만, 딱히 냄새가 나진 않았다.
“가출은 재밌었니, 따님?”
“……아녀.”
“그래. 두 번째 가출은…, 미리 말하고 하려무나.”
서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나직하게 경고했다.
‘말하고 가출하면 그게 가출이야……?’
외출이지.
“잘 돌아왔다, 에이린.”
“……다녀왔습니다.”
나직한 대답에 그가 내 등을 가만히 토닥였다.
안심했던 탓일까?
눈앞이 금세 가물가물해졌다. 등을 토닥거리는 따뜻한 손길과 함께 내 머리는 에르노 에탐의 어깨에 툭 떨어졌다.
‘루실리온…, 기다리기로 했는데.’
그것이 마지막 생각이었다.
* * *
“테렘.”
에이린이 잠든 것을 본 에르노 에탐이 허공에 읊조렸다.
그러자 어딘가에서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후드를 눌러쓴 채 에르노 에탐의 앞에 부복했다.
테렘.
에탐 가문의 뒤에서 오랫동안 그들을 보좌한 집단으로 어떤 더러운 일도 완벽하게 해내는 이들이었다.
에탐 가문의 그림자이며, 오로지 자신들이 정한 주인과 자신들이 정한 차기 주인의 명령만 듣는 오만한 존재이기도 했다.
“전부 쓸어.”
“예, 소가주님.”
에르노 에탐이 가장 싫어하는 호칭을 아무렇지도 않게 읊조린 검은 복면의 사내가 모습을 감췄다.
에르노 에탐은 테렘을 쓰지 않는다. 평소에는 제가 거주하는 방 근처로 오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에탐 가문을 이을 마음이 없는 에르노 에탐으로선 테렘을 쓰지 않는 것은 미르엘 공작에게 향하는 반항이었다.
그런 그가 불문율 같던 그 규칙을 깼다.
그렇기에 테렘의 수장, ‘칸’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에르노 에탐이 그들을 사용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공작위를 계승하는 것도 염두에 두었다는 의미가 되었으니까.
‘저 아이 때문인가?’
그들이 그렇게 노력하고 옆에 따라다녀도 멱살을 붙잡아 똥통에까지 던지던 그 미친 소가주가 자신들을 사용한 것은.
‘그렇게 찾아도 나오지 않았는데…….’
칸 역시 테렘과 함께 아이에 대해 수소문했었으나 찾지 못했었던 터였다.
‘어디에 숨어 있다가 나왔는지 신기할 정도군.’
목석같던 소가주를 움직인 것이 겨우 새끼 수인 한 명 때문이라니 믿기질 않았다.
칸은 다른 테렘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빠르게 에르노 에탐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생각해 보니 네게 가문을 주면 되겠구나, 따님. 그러면 가문 때문에라도 집을 떠나겠다는 생각을 못 할 테니 말이야.”
그가 들었으면 테렘 전체가 통탄했을 에르노 에탐의 나직하게 읊조리는 소리를 듣지 못한 채로.
* * *
“……하아.”
에노쉬를 황실까지 데려다주고 바로 돌아온 루실리온이 하얀 숨을 뱉었다.
“주인님…….”
그가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해 두고 간 보호막은 깨졌고 주변 잔디는 이리저리 짓밟힌 채였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발자국은 도망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그 말은 즉, 에이린은 자신을 찾아온 누군가를 순순히 쫓아갔다는 말이 됐다.
“기다리겠다고 하셨으면서…….”
그가 고개를 젖혔다.
제법 노력해서 달려온 보람이 전혀 없어졌다.
“거짓말은 너무합니다.”
짧은 숨을 뱉은 그가 고개를 숙였다. 새하얀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눈앞에서 휘날렸다.
“내 주인님께선 어디로 가셨을지…….”
그가 느리게 눈을 내리깔았다.
“조금 짜증 나지만, 오랜만에 기도라도 하러 가 봐야겠습니다.”
루실리온이 아쉽다는 듯 몇 차례 발끝으로 에이린이 있었을 자리를 문지르다가 몸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고 했다.
뒤를 돌자 여우 가면을 쓰고 날이 상한 검을 든 커다란 남자가 길을 막고 있지만 않았다면.
“이건 뭐야? 반반하게 생긴 게 어디서 기어들어 왔는진 몰라도…… 나쁘지 않겠는데.”
루실리온이 빙긋 웃었다.
“제가 지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서 비켜 주시면 좋겠군요.”
“이 형님도 기분이 별로 안 좋단다. 상급품 몇 개가 도망을 갔거든. 게다가…….”
“아, 됐습니다.”
“그래, 이해가 빨라서 좋군. 좋아, 좋아. 말만 잘 따르면 나쁘게는…….”
“꿇으세요, 감히 누구 앞에서 머리를 그렇게 높이 쳐들고 계시는지.”
루실리온의 새파란 눈동자 안에서 새하얀 빛의 고리가 생겨나는 것과 동시에 덩치 큰 여우 가면의 사내가 무릎을 꿇었다.
루실리온은 그제야 시선이 맞는 사내를 보며 빙긋 웃었다.
“신도께서는 회개하는 게 좋겠군요.”
“무, 무슨…… 이 망할 애새끼가……!”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가면 사실 선이고 악이고 나눌 것이 없죠.”
루실리온의 작은 손바닥이 축복을 내리는 사제처럼 사내의 머리 위에 툭 내려앉았다.
“뭐 하는 거야……!”
새하얀 빛이 사내의 머리를 뒤덮었다. 찰나의 시간이 지난 후에 루실리온이 손을 뗐다.
“평생 참회하세요, 오늘 하루 제 앞에 섰던 것을.”
태산 같던 사내의 눈이 풀리더니 이내 입이 헤 벌어졌다.
“헤헿……! 차, 참, 참회……. 흐헤헤헿, 흐히히히…… 참회에에…….”
머릿속이 새하얀 백지가 된 듯 사내가 입을 벌리고 히죽히죽 웃기 시작했다.
루실리온이 느린 걸음으로 자리를 벗어났다.
얼마 되지 않아 하룻밤의 꿈처럼 자리 잡고 있던 환상의 성은 비명과 피비린내로 가득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