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41
코끝에 알싸한 알코올의 향이 스쳤다. 병원 냄새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 기분이 묘했다.
“대체 언제쯤 일어나는 거지? 이대로 식물인간이라도 되는 건가?”
귀에 익은 목소리에 정신이 퍼뜩 드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눈은 떠지질 않는다.
사방이 새까맣고 기억은 아득히도 멀게 느껴지는데 이 목소리만큼은 왜 이렇게 생생한지 모를 일이다.
“지금 환자분의 몸 상태는 지극히 정상입니다. 그런 큰 사고가 났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지금은 아주 깊은 수면 상태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학계에 이런 보고는 거의 없었던 탓에……. 뇌파 검사에서도…… 깊은 렘수면……, 마치 긴 꿈을 계속 꾸는…….”
목소리가 드문드문 끊겼다.
누구의 이야기를 하는 걸까? 사고? 내 이야기는 아니겠지. 나는 그냥 잠을 잤을 뿐이니까.
의문이 들었다가도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져 생각을 관두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뭐 하나 마뜩한 것이 없군. 한심하기 짝이 없어. 혼자 살아보겠다고 나갔으면 잘 살기라도 했어야지. 쯧……. 언제까지 이런 상태가 지속될지도 모르겠다는 건가?”
“네, 외람되오나……. 저도 난생처음 보는 증상인지라……, 그저 잠에서 깨우면 될 것 같은데 어떤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마치 잠에서 깨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은…….”
“어이, 의사 쌤. 뒷구멍에 돈 잔뜩 쑤셔 줬잖아? 그러면 쓸데없는 잡소리 말고 살려내. 이렇게 돈 까먹고 뒤지면 누나 새끼 무덤도 전부 파 버릴 테니까.”
“흥분하지 마, ■■아. 누나는 바퀴벌레잖아. 지금도 이렇게 살아 있으니 조만간 일어나겠지. 그렇게 악착같은 인간이었는데 이렇게 병X같이 죽진 않을 거야.”
섬뜩하고 익숙한 악의에 귀를 기울이고 싶지도 않아졌다. 생각은 조금씩 더 아래로 가라앉았다.
‘좀 더 자고 싶어.’
깨고 싶지 않았다.
“……이린.”
꿈에서 깨고 싶지 않다.
“어? 야, 얘 지금 손가락 좀 움직이지 않았어?”
“……에이린.”
두 개의 목소리가 허공에서 겹치는 듯했다.
“에이린!”
그 선명한 부름에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하얀 가운을 입고 있는 붉은 머리의 소년, 칼란 에탐이었다.
“일어났다.”
“형이 그렇게 부르니까 일어나지. 애 자는데 왜 자꾸 깨워?”
다음으로 모습을 보인 것은 칼란 에탐보다 조금 키가 작은 검은 머리카락의 소년, 실리안 에탐이었다.
입가가 절로 허물어졌다.
‘돌아왔구나.’
배시시 웃음을 흘리자 두 소년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표정을 벌겋게 물들이곤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더니 제 입을 가리곤 천천히 다시 고개를 돌렸다.
“너, 그렇게 웃지 마.”
칼란 에탐의 말에 덜컥 겁이 났다. 내가 무슨 말을 잘못한 걸까?
표정이 굳어졌는지 칼란이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다른 데서 웃지 말라고……. 귀여워서 지금 좀…, 실리안을 내동댕이치고 싶은 기분이었어.”
“……그게 무슨 기분인데? 형.”
“있어, 그런 게.”
“나도 마침 형을 창밖으로 던져 버리고 싶은 기분이긴 했는데.”
“뭐? 어디 형한테 버릇없이…….”
두 소년이 눈앞에서 투덕거리기 시작했다.
머리가 멍한 것이 꽤 긴 잠을 잔 것도 같았다.
무슨 꿈을 꿨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이 어딘가 불안하기만 하다.
“어디 다친 덴 없고? 밖에서 누가 시비 안 걸었어? 웬 놈들이 널 노예로 팔려고 했다던데…. 그러게 왜 말도 없이 나가서…….”
칼란이 허리를 숙여 침대에 턱을 턱 하고 올리며 잔뜩 볼멘 목소리로 잔소리를 퍼부었다.
줄줄이 늘어놓는 온갖 걱정과 타박에 입꼬리가 절로 하늘로 치솟았다.
“내 걱정해써…?”
누가 나를 이렇게 걱정해 준 적이 있던가?
전생에도 현생에도 딱히 없었다.
“당연하지! 이렇게 작은 게 잔뜩 풀이 죽어서 집을 나갔다는데 안 하겠어? 집을 나가더라도 미리 나한테 말해 줬으면 거처라도 몰래 얻어 줬을 텐데…….”
“형보단 내게 말하는 편이 뒤처리가 깔끔할 거야. 형은 꼬리가 길거든.”
“헹, 얘한테 맡기면 집 하나 얻는데 근 1년은 더 걸릴걸?”
칼란이 코웃음을 치며 실리안을 무시했다. 입가가 절로 헤실헤실 풀어졌다.
“어쨌든 무사해서 다행이야. 아버지가 싫더라도 다음부턴 나한텐 꼭 얘기하고 나가. 내, 내가 그래도…… 크흠. 오라버니고…… 너 하나 돌볼 능력은 되니까.”
칼란이 민망한 듯 손톱을 세워 뺨을 긁적이고는 얼굴을 붉힌 채 말했다.
“웅…….”
“나도 도와줄 수 있으니까.”
“고마어.”
나는 그렇게 말하며 활짝 웃었다. 가슴께가 간질간질했다.
“우린 가족이니까 말이야.”
“가족?”
“응, 아버지께서 곧 널 호적에 올리신다고 하셨어.”
칼란이 내 손을 살짝 맞잡았다.
“잘 부탁해, 에이린.”
“응. 나두…….”
“나도 빼면 곤란하지.”
실리안이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우리는 마주 보며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얼마 만에 이렇게 웃어 보는지 잘 모르겠지만, 기분은 좋았다.
“아, 그리고 말이야. 그 벌레를 죽이는 약…? 네가 만들라고 해서 만들기는 했는데…… 이건 왜?”
아, 맞다.
구충제가 있었지!
칼란이 벌써 만들었다는 건 시간이 조금 흘렀다는 의미가 됐다.
‘리하르트랑 루실리온…….’
벌써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뿐이랴, 가장 급한 것은 에노쉬와 미르엘 공작이었다.
“나, 요기 오고 얼마나 대써?”
“일주일이야. 네가 일어나지 않는 줄 알고 놀랐어.”
정말 큰일 났네.
“그거… 다 머거써?”
“응, 네가 하라는 대로 다 먹였어. 닷새 전에는 웬 황실에서도 사람이 와서 약 내놓으라길래 일단 줬고…….”
칼란은 말하는 내내 왜 이렇게 해야 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럼에도 내 편지만을 믿고 해 주었다는 것이 조금 놀라웠다.
“다…… 해 줬네……?”
“응, 아버지가 하라고 하셨고…… 네가 한 말이라고 했으니까.”
침대 밑에 앉아 매트리스에 턱을 괸 칼란 에탐이 씩 웃었다.
“너는 우리도 모르는 열매로 아버지를 도와줬잖아. 그러니까 이번에도 분명 우리가 모르는 뭔가를 알고 있구나 생각했어.”
“……응.”
이상하지 않으냐고 물어보려던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다는 대답이 나와도, 아니라는 대답이 나와도 마음이 편하지 못할 것 같았으니까.
“최근에 수도 귀족들 사이에 이상한 병이 돌고 있어. 갑자기 고열이 들끓다가 미치광이처럼 날뛰거나 사람을 무는 일도 있었다는데…….”
“응.”
“네가 알려 준 약을 먹은 사람들이 다 괜찮아졌대. 치료가 늦었는지 정신이 이상해진 사람도 있는 모양인데…….”
“하라부지는…?”
“가주님도 열이 막 오르기 시작할 때 약을 드렸어.”
그 의심병 많은 공작이 순순히 먹었다는 게 조금 신기했다.
“네가 돌아왔다는 얘기를 듣고선 널 보겠다고 오셨다가 아버지랑 이 앞에서 엄청 싸웠어.”
칼란 에탐이 키득키득 웃으며 덧붙였다. 살벌하게 싸웠을 것이 훤히 보였다.
“하라부지, 화 안 나써…?”
“음….”
칼란 에탐이 대답을 망설였다.
심장이 덜컹거렸다.
‘역시 화가 많이 나셨나 보네.’
대답도 안 하고 그렇게 사라졌다가 뻔뻔하게 나타났으니 화가 날 만도 했지만 말이다.
“가주님은 늘 화가 나 있는 상태니까… 그건 잘 모르겠는데.”
칼란 에탐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아…….”
그건 또 그러네.
“그래도 널 꽤 찾으셨어, 아버지에게 지하 옥션에 가 보라고 한 것도 가주님이야.”
“엥? 정말? 카일로가 알려 준 거 아니었어?”
“형, 형은 연구할 때 빼곤 머리통은 장식으로 달고 다녀? 카일로가 누구 오른팔이야?”
“그거야 당연히 가주님…, 아아…, 가주님이 명령했으니 움직인 거구나!”
“그런 거지. 가주님 성격상 대놓곤 말하지 않았겠지만……, 카일로는 가주님의 의지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잖아.”
하긴, 에서도 카일로는 충신 중의 충신이었다. 결코 어떤 일에도 굴하지 않는 충신.
“네가 알려 준 약이라고 하니까 툴툴대시면서도 드시던데?”
“그냥?”
“응, 집안에서 일어난 일은 전부 가주님 귀에 들어가게 되어 있으니까…… 아마, 네가 아버지를 도와줬던 얘기도 들었겠지.”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고 보니 네가 알려 준 그 빨간 열매로 광폭화 억제제를 만들었어.”
칼란 에탐이 씩 웃으며 자랑스럽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