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45
“……이게 뭐지?”
“감각을 조금 둔하게 해 주는 차입니다. 중독성도 없고 신체에 무해한 진정제로 보시면 됩니다.”
“……퍽도.”
“세월이 지나고 시간이 흘러 역사를 잊을 정도로 흐릿해졌다고 한들, 엘프의 피가 섞였으니 감각이 예민하실 텐데요.”
그의 보라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안광을 빛냈다.
피부를 찌릿찌릿하게 달구는 살기가 닿았음에도 상대는 움직임조차 없었다.
“네가 어떻게 그걸 알지?”
“명색이 정보 길드입니다, 제가 모르는 건 거의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뭐……?”
“아, 콜린 공작 부인의 어린 시절을 담은 초상화와 사진도 몇 장 있는데…….”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누군가가 그의 손에 서류철 하나를 가져다주었다.
그가 서류철을 가볍게 휙휙 넘기더니 한 페이지를 활짝 열어 보였다.
사랑스러운 표정의 소녀가 활짝 웃는 사진과 어린 시절 초상화가 여러 장 있었다.
“1억 로스트.”
콜린 공작은 지금 한 가지 확신을 얻었다.
이 사내가 지금 가면 아래에서 활짝 웃고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
“참고로 저희는 원본 이외의 사본을 두지 않기 때문에 이게 유일합니다.”
턱을 괸 채 한참이나 그것을 살펴보던 콜린 공작이 심각한 낯으로 입을 열었다.
“……사지.”
“역시, 애처가 콜린 공작 각하시군요. 통 큰 구매 감사합니다.”
그가 서류철을 탁, 접으며 말했다.
“그래서 두 번째는?”
“아이를 찾고 싶네.”
“아이? 어떤 아이를 말입니까? 첫사랑과 결혼에 성공하신 공작께 사생아가 있을 것 같진 않은데요.”
“에이린이라는 수인 아이다.”
로브를 쓴 사내의 손이 뚝 멈췄다.
“에이린…….”
“그래, 도마뱀 수인이고 아직 성장기에 있는 새끼다. 여자아이고 키는 이 정도에, 머리카락은 분홍색이다. 비늘은 은색인 것 같더군.”
콜린 공작이 앉은키의 가슴 부근 정도를 손으로 가리켜 보이며 설명을 이어갔다.
“또한, 수인 특유의 마력을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해서 좋지 않은 곳에 있을 확률도 있다. 마지막으로 흔적을 발견한 곳이 지하 옥션이다.”
“그렇군요…….”
콜린 공작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상대의 반응이 심드렁했던 탓이다.
“어렵나?”
“그럴 리가요.”
설핏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돌아왔다.
“그럼 이대로 진행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알아내는 대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알겠다. 금액은?”
“…….”
상대는 이해할 수 없이 고요하게 잠시 침묵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10억.”
“……뭐?”
“10억 로스트입니다. 물론 아까 구매하신 초상화 값이 포함된 금액이고요.”
“……바가지도 이런 바가지가 없군.”
“저희는 임무 난이도와 의뢰인분의 재정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가능한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공작께는 10억이 그리 큰돈이 아니지 않습니까.”
콜린 공작이 잠시 고민했다.
10억과 편안한 밤을 맞바꿀 수 있다면 그는 충분히 10억을 낼 용의가 있었다.
‘게다가 아이도 찾아야 하지.’
지금으로선 아이를 찾기에 적합한 선택지가 명월 외엔 없었다.
“실패는 용납하지 않는다.”
“물론, 만족할 수 있는 결과를 내도록 하겠습니다.”
“돈은 조만간 인편(人便)으로 보내지.”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가 배웅하듯 그에게 허리를 굽혔다.
“이쪽입니다.”
콜린 공작이 점원을 따라 문밖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 또다시 풍경은 뒤바뀌었다.
그가 처음 방문했던 술집이었다.
“방문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고객님.”
천연덕스러운 점원의 인사말과 함께 콜린 공작은 집으로 돌아갔다.
* * *
“으, 답답해. 대장님인 척하기 너무 힘들어요.”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던 명월의 길드장…, 인 척을 하고 있던 의문의 사내가 가면과 로브를 벗어던졌다.
“근데 10억이라니, 아무리 공작이라고 해도 바가지가 너무한 거 아닌가요, 대장님?”
“너무하긴. 적당한 값을 부른 거뿐이잖아? 상대도 오케이 했으니 그뿐인 거지.”
키득키득, 사나운 목소리가 까득, 뭔가를 깨물어 삼키며 대답했다.
“이미 같은 의뢰를 세 건이나 받았잖아요? 대체 그 에이린이라는 게 누군지 아세요?”
“글쎄, 돈줄은 확실하지. 내 돈줄도 막아 버려서 문제지만.”
“지하 옥션이 아깝긴 했죠.”
“아, 근데 말이야……, 이디스.”
아무도 없었던 책상 앞 의자에 서서히 모습이 드러났다.
주변 풍경에 자신을 감춘 채 숨어 있던 카멜레온이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내듯이.
“그 망할 도마뱀 새끼!”
흥분한 그가 주먹으로 책상을 거칠게 내리쳤다.
“어디에 있는지 정보만 알려달라고 했으니 내가 죽여도 되는 거지? 내가 죽여도 되는 거잖아?! 그 짐승 새끼 때문에 공들여 놨던 내 놀이터가 망가졌다고!”
“안 됩니다.”
“그럼 사지 중에 두 개만 뺏자, 응? 그 정도면 되잖아. 목숨은 안 뺏으니까!”
잔뜩 흥분한 목소리에 보좌관, 이디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또 눈이 풀리셨군.’
저렇게 된다면 사실 말릴 수가 없어진다.
성정이 잔악하기 짝이 없는 그는 명월의 길드장을 하기에 아주 걸맞은 사람이었지만, 때때로 제어가 힘들었다.
“일단 계획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좋아좋아, 그 얼굴이 일그러지는 꼴이나 한번 보자고. 나, 파충류 정말 좋아하잖아.”
천진하게 활짝 웃은 그가 자리에서 폴짝 뛰어 일어났다.
그가 장식장으로 다가가 문을 활짝 열자 그 안에 박제된 수많은 파충류와 동물이 가득했다.
전시된 박제의 뒤에는 사진이 한 장씩 놓여 있었다. 겁에 질린 채 간신히 웃고 있는 인간 형태의 수인들이었다.
“은빛의 도마뱀이라니 아주 기대돼.”
“컬렉션으로 삼는 건 참아 주세요.”
“그럼 비슷한 걸 찾아오든가.”
그가 전시장 안의 박제를 느릿느릿 쓸며 씩 웃었다.
“만나는 게 기대되네.”
* * *
“에이리이이인!”
울상인 낯으로 뛰어온 여주인공이 나를 힘껏 끌어안았다. 나도 모르게 휘청거리다 함께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 언냐……?”
“허어엉, 갑자기 없어졌다고 해서 놀랐어……. 저 인간…, 아니 외삼촌은 얼마나 성질을 부리던지…….”
훌쩍거리는 울음소리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여주인공의 등을 토닥거렸다.
“언냐, 보구 시퍼써.”
“나도오오! 나도! 나도오!”
여주인공이 흥분해서 콧김을 훅훅 뿜으며 내 말에 심각하게 동조했다.
“으아, 진짜 맨날 아저씨들만 상대하다가 네가 있으니까 너무 살 것 같아.”
“어……?”
이게 정말 여주인공인가?
이미 서로 굉장히 깊이 친해져서 ‘여주인공이 최고~♥’라고 하면서 해롱해롱한 상태여야 하는 게 아닌가?
‘리하르트나 루실리온은 성인이 되어서나 만났지…….’
어린 시절의 스토리는 대부분 공작가에서 부둥부둥당하는 흐름이었으니까 말이다.
“그, 오, 오라버니들 이써짜나…?”
“오라버니? 아, 그 연구실 구석에 박힌 사회 부적응자랑 검술에 미친 놈?”
“…어?”
“하, 귀여운 너랑은 너무 달라…. 걔네는 그냥 귀찮았어. 귀여움이라곤 조금도 없어선……. 하, 역시 귀여운 게 최고야.”
여주인공, 샤르네가 한참이나 내 뺨을 만지작거리더니 일어나 내게 손을 내밀었다.
“미안해, 만나서 너무 반가웠나 봐. 다시 만나서 너무 좋아.”
나를 일으켜 준 여주인공이 나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무사히 돌아와 줘서 고마워.”
“……응.”
그 간지러운 인사말에 나는 서툴게 웃었다.
샤르네가 포옹을 풀기 전 아주아주 작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닥거렸다.
“할아버지도 너 엄청 기다렸어.”
그건 좀 무서운데.
벼르고 있었다는 말 같잖아.
“화이팅!”
뭐가 화이팅인데.
사람 불안하게 해놓고 저렇게 도망을 가네.
후다닥 멀어지는 여주인공을 보다가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돌려 앞을 보았다.
미르엘 공작이 굳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여……. 하라부지.”
일단 웃어 보자.
나는 활짝 웃으며 어색하게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