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54
“네에…….”
대답하면서도 눈동자를 굴렸다.
‘그래서 뭐 어떡하라는 걸까?’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미르엘 공작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리고 미르엘 공작은 어딘가 불만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우리 사이엔 침묵만이 맴돌았다. 한참 만에 그가 한숨을 내쉬며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부탁이라는 게 무어냐.”
“아, 저 내일 언냐랑 황성에 가두 대여? 선샌밈 온다구 했는데….”
“황성? 거기는 왜 가려고 하느냐.”
“언냐 따라가려구여! 거기에 그때 같이 납치된 칭구도 이써여.”
미르엘 공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어렵지 않게 안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걸 그다지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도.
‘안 되려나….’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내 고개와 함께 바짝 서 있던 꼬리도 아래로 축 처졌다.
“안 대면 갠차나여…….”
“누가 안 된다고 했느냐! 너는 내가 말도 안 했는데 왜 매번 지레짐작을 하느냐?”
그야 표정이 영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이었는걸.
미르엘 공작의 말에 한층 우울해졌다.
“아, 아니다…. 수업이야 하루 정도 미루면 그만이지! 이틀 미뤄도 된다. 다녀오거라.”
미르엘 공작이 냉큼 말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곤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대여?”
“그래.”
“하라부지가 최고에여!”
활짝 웃자 미르엘 공작이 그대로 주먹을 들어 원탁을 힘껏 내리쳤다.
무려 대리석으로 된 원탁을.
“하, 라부지……?”
쿠웅-
옆에서 나는 굉음과 날리는 먼지에 나도 모르게 멍하니 그를 부르자 그가 흠칫 놀라 나를 보았다.
“벌레가 있었다.”
“벌레여……?”
“그래, 다리가 열 개나 달린 시커먼 게 징그럽게도 기어 다니더구나.”
“윽…….”
그건 진짜 싫다.
그래도 주먹으로 원탁을 쪼개네……. 그것도 대리석을…….
살짝 말문이 막혔다.
“그래 묻고 싶은 건 그게 다였느냐?”
“네!”
“몸은 좀 괜찮고?”
“네.”
열이 나서 쓰러졌던 것에 비해선 생각보다 건강했다.
‘밥을 든든하게 먹어서 그런가?’
생각하니 슬슬 조금씩 허기가 지는 것도 같다.
‘헉, 이러다 진짜 돼지가 되겠어.’
나는 고개를 살살 흔들었다.
“오늘 디저트가 제법 맛있는 거라고 하던데…… 어떠냐, 한탕하고 갈 테냐?”
티타임을 갖자는 걸 누가 이렇게 도박하는 것처럼 권하는 거야.
“조아여!”
물론 거절하지는 않았다.
* * *
최근 공작저에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보통은 사람들이 그리 찾지 않던 ‘도마뱀’을 닮은 인형이나 조각이 종종 돌아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흔한 도마뱀이 아니라 은색 비늘을 가진 특이한 도마뱀의 형상이었다.
“들킬 뻔했네…….”
그리고 샤르네는 정확히 그 중심에 있었다.
샤르네는 조금 전 할아버지에게 허락받았다고 말을 전해 온 에이린을 생각하며 흐뭇하게 웃었다.
“아, 굿즈들 이제 꺼내야지.”
샤르네가 조심스럽게 옷장을 열자 그 안에서 온갖 잡동사니가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에이린에게서 방 안에 덕지덕지 붙은 온갖 물건을 숨기기 위해서 샤르네가 전부 옷장에 때려 박아 넣었던 것이다.
“으아아악! 사진이 구겨졌잖아! 액자에 넣는 걸 깜빡한 사진인데……!”
무려 에이린이 활짝 웃는 움직이는 사진의 종이 끝이 살짝 구겨져 있었다.
급히 물건들을 다 꺼낸 샤르네가 구겨진 부분을 꾹꾹 눌러 편 다음 미리 준비해 둔 사진첩에 조심스럽게 사진을 넣었다.
“하앍…… 진짜 너무 귀여워…….”
에르노 에탐과 함께 에이린을 처음 만났을 때 샤르네는 에이린에게 한눈에 반하고 말았다.
‘거의 운명이었어…….’
아이를 본 순간 심장이 바닥에 쿵 떨어지는 줄 알았다.
분홍색 머리카락을 살랑살랑 휘날리며 해맑게 웃는 아이가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니!
게다가 눈동자 색까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벌꿀색이었으니, 싫어할 수가 없었다.
“으으, 에이린이라면 내가 평생 붙어서 진정제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텐데…….”
아쉽게도 에이린은 폭주의 전조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물론 건강함이 최고이긴 하지만…….’
샤르네가 생각하며 입술을 툭 내밀었다.
필요할 때만 찾는 이 가문 사람들을 보다가 에이린을 보고 있노라면 그 순수함에 흐물흐물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역시 오는 게 아니었을지도…….”
미르엘 공작인 그녀의 할아버지가 어머니와 살던 작은 오두막을 찾아와 회한이 가득한 표정으로 한참이나 자신을 끌어안고 있어서 조금 울컥한 마음이 들었던 터라 따라오긴 했다.
‘하지만, 이 미친놈들 사이에서 내가 어떻게 하라고…….’
한 사람은 시도 때도 없이 화를 내고 웃다가도 언제 돌변해서 검을 뽑을지 모르고 또 한 놈은 연구에 미쳐서 제게 진정 능력을 알아보고 싶으니 피 좀 줄 수 있냐고 하질 않나, 또 한 사람은 재수 없는 얼굴로 존댓말을 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
‘내가 쓸모없어져도 찾아 줄 사람은 에이린밖에 없을 거야…….’
다 자신의 능력을 보고 몰려드는 하이에나와 다름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최근 그 연구에 미친 놈이 새로운 광폭화 억제제를 발견하면서 그녀를 찾는 발길도 꽤 줄어들었다.
부작용이 있어서 여전히 자신을 찾는 사람이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남자 싫어…….”
자신이 컨트롤할 수 없다면 남자는 곁에 두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 샤르네는 뭘 해도 안심이 되는 폭신폭신하고 귀여운 여자 친구가 가지고 싶었다.
“에이리이인…….”
커다란 은빛 도마뱀 쿠션을 끌어안으며 샤르네가 웅얼거렸다.
이것은 일명 ‘에이린 굿즈’였다.
처음 시작한 것은 물론 샤르네였다.
에이린이 갑자기 사라지고 견딜 수가 없어서 주변에 탐문을 해서 에이린이 변했다는 도마뱀 모양의 쿠션을 만들었다.
그때 가문에는 수인에 대한 끔찍한 혐오와 에이린을 욕하는 목소리가 훨씬 컸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마일라가 첩자였음이 밝혀졌다.
‘아마 그 음흉한 외삼촌의 짓이라곤 생각하지만…….’
심증만 있고 확증은 없었다.
어쨌든 채 일주일이 되지 않아 순식간에 에이린에 대한 혐오 여론이 동정 여론으로 돌아섰다.
에이린이 자라면서 가스라이팅을 당했다거나 마일라가 에이린을 돌보는 척하며 교묘하게 학대했다든가 하는 동정 여론이 생겨났다.
샤르네도 보란 듯이 귀엽게 만든 은빛 도마뱀을 들고 다녔고 일부러 미르엘 공작에게 작은 도마뱀 인형을 선물하기도 했다.
의외로 미르엘 공작은 그 인형을 한구석에 잘 세워 두기까지 했다.
여론이 그렇게 돌아서니 에이린을 안쓰럽게 생각했던 이들이 조금 더 힘을 얻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에이린이 돌아온 것이다.
그것도 인간의 형태로 꼬리를 살랑거리면서.
그때부터 ‘에이린 굿즈’가 세상에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샤르네를 비롯해서 은밀한 음지에서 ‘에이린 굿즈’가 판매되기 시작했고 이걸로 쏠쏠하게 부수입을 얻는 사람들도 생겼다.
물론, 샤르네도 그중 하나였고.
“하, 이 움직이는 사진은 한정판으로 팔아야겠어…….”
호랑이 사탕을 들고 갸웃하며 제 쪽으로 몸을 휙 돌려 주는 사랑스러운 모습은 사실 혼자만 간직하고 싶었다.
‘하지만 스페셜 굿즈를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이 판매 점수를 높일 수밖에 없었다.
스페셜 굿즈란, 분기마다 진행하는 구매 및 판매 마일리지 점수로 구매할 수 있는 굿즈였다.
거기엔 퀄리티 높고 귀한 것들이 많이 나와서 모두 그것을 구매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고 있었다.
좋은 제품을 판매하거나 구매할 때 쌓이는 마일리지 점수가 있는데, 그걸 모아서 살 수 있는 물건들이 있다.
‘저녁 식사 먹고 다녀와야겠다.’
수도의 시장 구석에는 공터가 있는데 그 공터 중 하나에 밤마다 작은 건물이 나타난다.
사람들 사이에서 ‘마켓’이라고 불리는 이 건물은 일주일에 딱 세 번, 화요일, 수요일, 토요일 밤 9시 이후에만 나타나곤 했다.
그리고 이 마켓에는 판매자 등록만 하면 누구나 자신이 만든 굿즈를 올려 두고 판매 가격을 적어 둘 수 있었다.
굿즈 가게를 방문할 땐 모두 가면을 착용하고 신원을 특정할 수 없는 옷을 입고 오는 것이 원칙이었다.
꼭 에이린 굿즈만 있는 게 아니었다. 사실 에이린의 굿즈는 아직 일부에 불과했다.
에르노 에탐이나, 미카엘 콜린, 바이엔 다르키스나 샤를로테 파샨느 등 사교계를 후끈하게 달구는 많은 인물의 굿즈가 있었으니 말이다.
샤르네는 지갑을 꺼내 그 안에 있는 금색 포인트 카드를 가볍게 빛에 비추었다.
이 포인트 카드는 누적 포인트 금액에 따라 그 모습을 바꾸는데, 브론즈, 실버, 골드, 플래티넘, 다이아, 그리고 은빛이 도는 핑크-누가 봐도 에이린의 색상이다-로 색과 모양이 변한다고 한다.
샤르네도 나름대로 열심히 활동했지만, 아직 골드였다.
이 포인트 카드는 현금을 내면 굿즈를 구매할 수 있는 포인트를 1:1 비율로 적립해 준다.
그리고 포인트로 물건을 사면 해당하는 금액의 1%가 마일리지로 적립됐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올린 물건이 팔리면 1%의 마일리지가 또 적립됐고.
‘반드시 사고 말 거야……, 은빛 수정 도마뱀……!’
샤르네가 주먹을 꼭 쥐며 다짐했다.
1:1 크기에 무려 실제 에이린의 수인화 모습과 똑 닮았다는 물건이었다.
스페셜 굿즈 중에서도 가장 비싼 50만 포인트나 하는 덕분에 쉽게 사기가 어려웠다.
‘끙…….’
그리고 오늘은 토요일.
마켓의 문이 열리는 날이었다.
“아, 슬슬 에이린이랑 식사할 시간이지.”
오랜만에 둘이서 식사를 한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빨리 가야지.’
샤르네가 준비를 마치고 재빨리 일어나 함께 식사하기로 한 정원으로 향했다.
정원이라고 하지만 실내 정원인 터라 온실에 가까웠다.
“에―이린!”
그러나 한껏 산뜻한 기분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식당에 들어간 샤르네의 걸음은 뚝 멎을 수밖에 없었다.
“…….”
“……너도 초대받았냐?”
초대받은 자리엔 저와 같은 꼴을 당한 것이 분명한 불청객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