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57
“네게 준다고 한 적은 없다만.”
“……내가 먼저 골라써여.”
“하지만 내가 먼저 잡았지.”
뭐야, 이 치사한 어른은?
나는 얼굴을 확 일그러뜨리곤 볼을 빵빵하게 불리며 고개를 돌렸다.
‘여기서 화내면 어린애가 되는 거야.’
그래, 세상엔 저런 유치한 어른도 있는 거지.
입은 옷을 보아하니 분명히 귀족이 분명했다.
‘사고 치지 않기로 했으니까….’
다른 거 보자.
나는 아쉬움을 달래며 대충 눈에 들어오는 아무 책이나 꺼내 들었다.
어차피 책이야 읽고 있으면 시간이 지나가는 거니까 말이다.
“그거 그냥 아저씨 보세여, 저 이거 볼 게여.”
“……뭔저씨?”
“아저씨여.”
허, 옆에서 들리는 헛웃음을 못 들은 척하며 나는 책을 책상에 올리고 의자를 낑낑 기어올랐다.
막 자리에 앉아 책을 펼치려는데 그가 내 옆에 책을 내려놓고 내 쪽으로 밀어 주었다.
“당돌하구나.”
“……감사합미다.”
“하지만, 수인이 목줄도 없이 돌아다니는 건 난감한 일이지.”
갑작스러운 말에 등허리가 뻣뻣해졌다. 목소리에서 명백한 적의가 느껴졌다.
“…….”
나는 대답 대신 그냥 꿋꿋하게 책을 펼쳤다. 괜히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기껏해야 애완동물이나 하던 존재가 사람처럼 걷고 돌아다니는 것이 참 신기하기도 하군. 세상이 많이 좋아졌어.”
명백히 사람을 무시하는 말에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난 애안동물 아니에여, 유치한 아저씨. 그렇게 크고 나이도 먹구 애기 데리구 놀리면 조아여? 진짜 한심해여. 아저씨가 귀족이면 다에여?”
“뭐라?”
“바―부.”
베에에-
혀를 쭉 내민 나는 펼쳤던 책을 다시 접고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그냥 여주인공이나 기다리러 가야지.’
내가 미련 없이 도서실을 나가려고 하니 그가 내 뒤를 느릿하게 따라왔다.
“책 안 보나?”
“네.”
“어딜 가지?”
“칭구 보러여.”
“이거 가져가라, 네게 주지.”
그가 내게 내가 아까 관심을 보였던 식물도감을 내밀었다.
“아저씨.”
“호칭이 썩 마음에 들진 않는군.”
“그거 도둑질이에여. 도둑이세여? 남의 물건은 함부로 손대는 거 아니래써여.”
“딱히 남의 물건은 아니다만.”
그는 뭐가 재밌는지 샐그러진 얼굴로 내게 대답했다.
‘약간 정신 이상자인가?’
하긴, 번듯한 사람이 설마 애가 고른 책을 저런 유치한 말을 하면서 안 주겠다고 할 리는 없지.
“왜 따라 와여?”
“나도 내 갈 길을 가고 있는 것뿐이다만.”
“…….”
나는 인상을 확 찌푸리며 아까 여주인공이 사라졌던 복도를 느릿느릿 걸었다.
‘시녀도 안 오고 왜 사람도 안 오지?’
시간이 제법 지난 것 같았는데 말이다. 나는 뒤에서 따라오는 남자를 무시하며 복도를 걸어갔다.
그때였다.
쨍그랑-!
“꺼져! 꺼지라고! 당장 나가지 않으면 전부 죽여 버릴 거야!!”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에노쉬?’
잔뜩 쉬어 버린 목소리로 바락바락 비명을 질러 대는 그는 철창에 갇혔던 오만한 소년이라곤 믿을 수 없이 히스테릭했다.
문이 열리고 우르르 사람들이 나오는 사이 나는 그 틈을 파고들었다.
“이렇게 화만 내시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요. 저는 황자 전하를 도와드리러 온 겁니다.”
“필요 없다고 했다. 이미 일전에 한 번 시도했지만 차도가 없었다. 동정을 할 거라면 꺼져.”
에노쉬의 앞을 가로막고서 대치하고 있는 건 여주인공이었다.
역시 여주인공이다.
모두가 도망칠 때 혼자서 도망치지 않고 잘못된 걸 잘못됐다고 할 수 있었다.
‘원작의 에노쉬는 이런 여주인공을 친구로서 좋아했지.’
아마 곧 감기지 않을까? 하는 찰나였다.
쐐애액-!
쨍그랑-!
무언가가 바람을 가르고 날아와 내 바로 옆을 스쳐 벽을 치고 산산이 조각났다.
“흡…….”
“지금 뭘…, 에이린?”
여주인공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내게 달려와 내 뺨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다행히 파편이 내게 닿진 않았다. 산산이 조각난 물잔을 보며 난 헛웃음을 삼켰다.
“괜찮니?”
“웅, 갠차나.”
여주인공의 눈이 사나워졌다. 그녀가 대번에 눈을 세모꼴로 뜨곤 홱 몸을 돌렸다.
“황자 전하! 지금 위험하게 뭐 하시는 거예요?! 제 여동생이 다칠 뻔했다고요!”
“내가 나가지 않으면 전부 죽이겠다고 분명히 경고…….”
“에노시!”
정말로 싸움이 날 것 같아서 나는 냉큼 샤르네의 뒤에서 빼꼼 모습을 드러냈다.
마지막 기억보다 한층 더 마른 낯으로 그는 침대에 앉아 있었다.
새하얀 이불보를 거칠게 움켜쥔 채 한 손에는 피 묻은 손수건을 들고 있었고 창백한 피부는 생기라곤 없는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반죽?”
“…반죽 아닝데여.”
“무사했었군. 네가 에탐 가문의…… 사생아라고 듣기는 했지만.”
내가 한 차례 고개를 끄덕이자 에노쉬의 눈이 가늘어졌다.
“건방진 건 여전하구나, 못생긴 반죽아. 야, 너. 내가 전부 꺼지라고 했는데 언제 나갈 건데?”
에노쉬가 여주인공을 보며 날을 세웠다. 주먹을 꽉 쥔 여주인공이 내게 몸을 돌렸다.
“에이린, 이만 돌아가자.”
“반죽은 내버려 둬.”
“네?”
샤르네의 반문에도 에노쉬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내 뒤에 있는 사내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아바마마는 왜 오셨습니까.”
아바마마?
누가?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자 내게 책을 줄 듯 말듯 유치하게 굴었던 남자가 문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다.
“아비가 자식을 보러 오는 것에도 문제가 있더냐?”
“……아바, 마마……?”
“그래, 반죽아. 내 아바마마시다.”
“…….”
잠시 말문이 막혔다.
[가서 사고 치지 말고!]미르엘 공작의 호통이 여기까지 들리는 것만 같다.
사고 치지 말랬는데 뭔가 아주 큰 사고를 친 거 같은데.
[그래, 황제를 만나면 대화도 하지 말고 일단 이거부터 던지고 보거라. 책임은 할애비가 지마.]그냥 던지고 튈까?
‘나한테 말도 섞지 말랬는데?’
말을 섞지 않기는커녕 쏘아붙이기까지 했다. 게다가 ‘아저씨’ 취급까지 했다.
내 표정이 창백하게 질려 가는 걸 봤는지 황제는 피식 웃었다.
“에탐 영애는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군. 와 줘서 고마웠네.”
“네, 폐하. 제 사촌 동생은….”
“내가 책임지고 정중하게 돌려보내도록 할 테니 먼저 돌아가게.”
“……하지만, 폐하.”
“두 번 말하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황제가 여주인공의 반문을 가볍게 막아 세웠다. 나도 조금 당황스러웠다.
‘굳이 나를 왜……?’
설마 나를 처분하거나 하려는 건 아니겠지?
“알겠습니다. 이따 보자, 에이린.”
“웅, 조심히 드러가. 언냐.”
“응.”
여주인공이 어두워진 낯으로 나를 한 차례 끌어안곤 미련 가득한 표정으로 에노쉬의 방을 나섰다.
“반죽.”
“반죽 아냐.”
에노쉬가 오만하게 나를 부르며 고개를 까딱였다.
“이 몸에게 가까이 와 봐라.”
“잘 지내써?”
“내가 잘 지낸 것처럼 보이나?”
“음, 아니.”
내 솔직한 대답에 에노쉬의 눈이 살짝 커졌다.
소년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확실히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덩달아 내 맘도 좋질 않았다.
‘일부러 전염병이 퍼지기 전에 다 막았는데…….’
씁쓸한 일이었다.
슬쩍 뒤를 보니 황제의 표정도 썩 좋지 않았다.
‘그나저나 반귀족파가 조용하네…….’
전염병에 관한 소식도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아마 아빠가 신경 써 준 것이 분명하겠지만.
“너 그때 그 하얀 놈 대체 뭐야?”
“하얀 놈?”
“그래! 날 어깨에 짐짝처럼 들쳐 메고 기사단장에게 떠넘기고 간 그놈 말이다!”
루실리온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냥…….”
루실리온을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친구는 아니다, 그렇다고 애완동물이라고 설명하기엔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인처럼 보일 것 같지 않았다.
“아는 사람?”
“이 몸을 살린 게 아니었으면 당장 그 발목을 잘랐을 거다! 감히 어디서…….”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에 나는 작게 웃었다.
“뭘 웃느냐? 못생긴 반죽 같은 것이.”
“너두…….”
흠을 찾아보려고 했던 나는 병약미가 더해져 거의 완벽한 에노쉬의 외모를 보곤 입을 꾹 닫았다.
잠시 침묵이 자리 잡은 틈새를 황제가 파고들었다.
“몸은 어떻느냐, 2황자.”
“어떻냐니요, 맨날 보고 받으시잖아요? 아니면 제 입으로 죽어 가고 있다는 말을 듣고 싶으십니까?”
에노쉬가 주먹을 꽉 쥐었다.
“에노쉬. 그저 나는 오늘 기분이 어떤지 해서…….”
“죽어 가는 기분이 어떻겠는데요!”
이를 꽉 깨물곤 분노가 가득한 쉰 목소리로 에노쉬가 소리쳤다.
“같은 질문을 하루에 수십 번도 더 받습니다, 아바마마에게서까지 듣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 앞으론 주의하마.”
황제는 꽤 짓궂게 나를 대하던 것과는 다르게 에노쉬의 앞에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에노쉬를 물끄러미 보고 있자, 그가 얼굴을 확 일그러뜨렸다.
“왜, 너도 이 몸을 동정하느냐?”
“……음, 응. 아마도.”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에노쉬의 기세가 한층 사나워졌다.
붉은 눈동자에서 불이 뚝뚝 떨어졌다.
“너도 필요 없으니까 당장……!”
“긍데, 불쌍하게 생각하는 건 아냐. 그냥…… 요기에만 앉아 있으면 답답하게따구 생각한 거뿌니야.”
“……뭐?”
“맨날 침대에 앉아 이쓰면 싫자나.”
내가 어깨를 으쓱이자 에노쉬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랑 가치 놀구 싶다.”
그의 침대에 슬쩍 엎드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하찮은 반죽이 별 시답지 않은 말을 하는구나.”
내 중얼거림을 들은 에노쉬가 한참 만에 코웃음과 함께 자그마한 말을 덧붙였다.
그 모습을 황제가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