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6
“……재밌네.”
에르노 에탐이 창문 너머로 느릿느릿 걸어가고 있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았다.
볼 일이 있어서 잠깐 복도를 지나는 중에 들려온 목소리는 그의 발걸음을 멈추기엔 충분했다.
‘저 애는 분명히…….’
이번에 미르엘 공작의 뒤통수를 제대로 때린 아이였다.
‘도서관까지 와서 고아원 목록을 보고 있을 때부터 신기하긴 했지만…….’
에르노 에탐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보통 에탐 가문에 태어났으면 어떻게든 에탐의 끝자락이라도 붙어 있으려고 하는 이들이 많다.
에탐 가문은 손이 귀하고 그렇기 때문에 방계라도 주어지길 바라는 자들이 많다.
그런데도 방계의 아이가 굳이 집을 나가겠다고 고아원 목록을 볼 때부터 퍽 신기했었다.
작은 호기심이 일었고 에르노 에탐은 그 호기심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반지를 떨어뜨려 봤다.
만약, 아이가 반지를 가져오지 않으면 그것으로 호기심은 끝이었을 터였다.
아이에게는 갈 곳이 없다.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둥근 머리통을 책에 박은 채 더듬더듬 글씨를 읽어 나가는 아이의 뒷모습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 아이가 떨어뜨린 반지를 가져다주면, 저 작은 것에게 잠시 돌아올 곳을 내어 주자고 생각했다.
반지를 주워 오지 않으면 그냥 거기서 끝이었을 터였다.
어디까지나 재미를 위한 가벼운 놀이.
“혹시나 했지만, 설마 정말로 집을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을 줄이야.”
그가 키득키득 웃었다.
‘게다가 그 반지에서 느껴진 기운은 분명히…….’
순간이지만 늘 머리를 깨질 듯 아프게 했던 광폭화의 증상을 환기하는 듯한 청량함이 느껴졌었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제 호기심을 무시하지 않은 것은 그래서였다.
이번 해에도 꽤 제법 재밌는 일을 벌이려고 했었는데, 회의가 중간에 멈췄다.
에르노 에탐은 텅 빈 벤치를 물끄러미 보았다.
[야, 엄마랑 아빠가 집 없는 애랑은 수준 떨어지니까 놀지 말래.] [넌 부모도 없고 집도 없고 성도 없고 심지어 친구도 없네? 대체 있는 게 뭐야?] [너 나 때리면 돈 줘야 대, 알지? 울 엄마가 때리면 비해 보상인가? 한다고 했어.]때로는 아이들의 말이 더 날카롭고 아프다.
아이들은 눈치를 볼 줄 모르고 솔직했으며 악의를 숨길 줄 몰랐으니 말이다.
고개를 푹 숙인 아이는 풀이 죽어 보여서 곧 울음을 터뜨릴 거라고 생각했다.
“큭…….”
그가 가볍게 벽을 두드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거기서 제 얼굴만 한 바위를 들고 뒤뚱뒤뚱 걸어가 그걸 내던질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뭐, 궁금한 것도 있으니 상을 줘 볼까.”
그가 느리게 멈췄던 걸음을 재개했다.
“자식 교육도 제대로 못 한 놈들에겐 벌이 있어야겠군.”
무릎을 끌어안은 작은 등과 고개를 숙이고 있던 머리통이 왜 한 번씩 아른거리는지 알 재간이 없었다.
* * *
신년 회의가 다시 열린 것은 회의가 중단됐던 날로부터 정확히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너.”
“네!”
“나와라.”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가 미르엘 공작의 앞에 다소곳이 섰다.
“그래, 그때 네 계획까지만 들었었지. 나간다는 이유가 뭔지나 들어 보자.”
“추쌩의 비미리여…….”
“그래, 그걸 한번 말해 보라고 하지 않느냐.”
어쩐지 오늘따라 관중석……, 아니 회의실이 더 뜨거운 느낌이었다.
‘사람이 조금 많아진 건 착각인가?’
마치 한창 재밌을 때 끝난 막장 드라마 다음 화를 보러온 아줌마들 같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시답잖은 생각에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도 집 나갈 만반의 준비는 다 했으니까.’
혹시 인간화가 풀릴 때를 대비해서 도마뱀이 들고 갈 수 있는 보석류도 몇 군데 숨겨 놓고 왔다.
무사히 나갈 경우엔 그 보석을 전부 회수해서 보따리에 싸서 나갈 생각이었고.
“저가, 사시른여…….”
그때였다, 등 뒤로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사실은 그 아이가 내 따님입니다. 이렇게 밝힐 때가 됐군요. 그렇지?”
“네, 마자여……. 사시른 제가 따……알……? 넹?”
바짝 긴장한 나머지 들려온 말을 고스란히 따라 하던 나는 뒤늦게 이상함을 감지하고 굳어지고 말았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에르노 에탐이 특유의 느긋한 걸음으로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눈앞에서 초원을 거니는 배부른 맹수에게 언제 먹힐지 모르는 먹잇감이 이런 기분일까?
“아가, 제대로 말해야지. 네가 내 아비다, 하고.”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전혀 그렇지 못한 내용을 내뱉었다.
저기, 그렇게 말하면 내일 아침에 태양은 볼 수 있나요?
나는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말을 애써 누르며 눈동자만 도록도록 굴렸다.
“어서.”
정말로 하라고?
그의 단호한 눈빛과 채근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힘없는 나는 까라면 까야지.
“네, 네가 내 아비다…….”
“큭, 하하하!”
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를 들은 그의 웃음소리가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질 나쁜 농담하지 말고 물러나라. 지금 네가 나설 자리라고 생각하는 게냐?”
미르엘 공작의 음산한 목소리에 털이 쭈뼛 섰다.
보는 것만으로도 무서운 눈빛을 받으면서도 에르노 에탐의 입가는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눈은 웃지 않았다.
“하하, 재밌는 얘기를. 가주님께서 사는 내내 제가 언제 자리 보고 나섰던 적이 있나요?”
“네놈은 근신에서 풀려난 지 얼마나 됐다고……!”
“아, 수첩에 가볍게 메모하는 것도 기억력 증진에 제법 좋다고는 하더군요, 가주님.”
미르엘 공작의 말을 가볍게 씹은 에르노 에탐이 말했다.
내 20년의 눈칫밥 경력이 말해 준다, 저건 100퍼센트 돌려 까는 것이다.
로맨스 판타지로 따지자면 우아하고 기품 있는 사교계의 화법이다.
방금 말한 저건 기억력이 나쁘다고 돌려 까는 거……,
“에르노 에탐……!”
“그리 다정히 부르지 않으셔도 제 청력은 꽤 좋습니다. 가주님의 기준으로 생각하시면 안 되지요.”
그리고 이건 너는 몰라도 나는 너처럼 귀 안 먹었다고 고상하게 돌려 까는 것이다.
미르엘 공작의 꽉 쥔 주먹 위로 힘줄이 툭 튀어나왔다.
툭 드러난 힘줄 위로 활활 끓는 용암이라도 흐르는 것만 같다.
에르노 에탐은 정말 미친놈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웃는 낯을 한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따박따박 말을 받아치는데 그게 다 뼈가 있다.
“또 시작이군, 저번 신년 회의는 왜 조용한가 했네.”
“중간에 끊겼으니까요.”
“그래, 그렇지. 이게 없으면 신년의 시작이 아니지. 에르노 님은 매년 저렇게 기행을 벌이시니…….”
“이번엔 저 애가 타깃인 모양이야.”
“그런가 보군.”
“저 애만 불쌍하게 됐어, 또 1년도 안 돼서 질릴 거요.”
“1년은 무슨, 반년이나 가면 다행이지.”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말싸움을 시작하자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꽤 또렷하게 들렸다.
살짝 고개를 돌리자 나와는 제법 거리가 있는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이 몸에 빙의하고 난 뒤로 이상하게 청력이 좋아진 것 같아.’
현대의 문명 기기와 멀어진 덕인가? 조금 의아할 따름이다.
근데 이런 일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구나.
‘하긴, 소설 묘사만 봐도…….’
에르노를 천하의 미친 사이코패스로 설명하곤 했으니 일단 정상은 아닐 것이다.
에서 에르노 에탐은 여주인공을 어쩌다 양녀로 들이게 되는데, 여느 육아물과는 다르게 그다지 달달한 부녀는 아니었다.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더 여주를 안달 냈지.
뭐랄까, 그냥 필요에 따라 서로를 이용하는 비즈니스 관계처럼 느껴졌다.
“반년? 글쎄요, 전 석 달 봐요. 작년엔 에르노 님이 남색에 빠졌다면서 신년 회의에 남자를 옆에 끼고 와선 가주님이 폭주하셔서 회의장이 초토화됐었잖아요. 그래 놓고 그게 한 넉 달 갔죠?”
“하긴, 가주님도 쓰러지고 난리도 아니었지.”
“그래도 그만둘 때 에르노 님이 놀이 상대한테 준 돈이 작은 섬 하나를 살 정도였다던데?”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내 귀가 쫑긋 서는 이야기였다.
‘아하, 이건 그러니까 공작을 엿 먹이기 위한 행동이구나.’
이제야 갑작스러운 그의 기행이 속 시원하게 이해가 됐다.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에 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만약 내가 그의 욕심에 가짜 딸 노릇을 하게 되면 당장 쫓겨나지도 않고 나중에는 돈도 받아서 나갈 수 있는 건가?’
길어야 반년이라고?
이건 너무…….
꿀인데!
장단에 맞춰 주면 무려 섬 하나를 살 수 있을 정도라고 하지 않은가.
‘난 아직 어리니까 그거의 반 정도만 돼도…….’
평생 떵떵거리며 먹고 사는 데 지장은 없을 거다.
나는 눈을 반짝 빛내며 익숙한 듯 상황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럼 뭐해요, 그깟 돈 다 필요 없으니 옆에만 있게 해 달라고 한동안 가문이 얼마나 시끄러웠는지…….”
“근데 사실 전 이해해요, 그때 에르노 님이 얼마나 다정하셨어요. 필요한 거 가지고 싶은 거 그 계절에 없는 과일까지도 원하면 전부 구해 왔잖아요. 솔직히 그때 끔뻑 속지 않은 사람 있나요? 일단 전 아니에요.”
오?
꽤 로맨틱했나 보구나.
하긴 에서도 그는 늘 필요할 때 사람을 그렇게 이용하고 가볍게 놓아 버리곤 했다.
사이코 재질이 어디 가진 않았겠지.
“크흠, 뭐 그동안에 벌인 일과 비교하면 최고의 사기이긴 했지.”
“사실 저 얼굴로 저한테만 다정하게 군다면 성격 다 알고 있으면서도 속지 않을 수 없을 거 같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무래도 이런 미친 사이코패스가 오로지 나한테만 다정하다면 홀릴 수밖에 없지.
‘물론 나는 다년간의 망할 형제들 덕에 그런 거짓된 애정에는 맷집이 생겼지만.’
그놈들도 한때는 다정하게 굴었다가 중요한 순간에 나를 엿 먹이고 비웃었으니까 말이다.
덕분에 인간 불신도 생겼다.
“그래서 제 계획은 들어 주지 않으실 예정이신지.”
내가 뒤쪽의 흥미로운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도 앞에선 계속 실랑이가 있던 모양이었다.
“내가 언제 네놈에게 발언권이라도 줬느냐!”
“공평과 평등이 가주님께서 추구하시는 방향이 아니던가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수첩에 메모하는 습관은…….”
그는 정말 사람의 속을 긁는 데 대단한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것도 재능이라고 한다면 말이다.
“좀 닥치거라!”
“제 올해 계획은 뒤늦게 재회한 내 따님에게 좋은 아버지가 되는 거라고 할 수 있겠군요.”
에르노 에탐은 꿋꿋했으며 표정에 조금의 변화도 없이 제 계획을 여상하게 읊조렸다.
“좋은 자식이나 되어 보거라, 이 패륜 놈아!”
“저런, 자식 농사 실패하셨군요.”
싱긋 웃는 미소가 톡톡 튀는 레몬보다도 더 상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