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62
“저, 저기!”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가려는 릴리안 데이지의 장밋빛 드레스를 움켜쥐었다.
릴리안 데이지의 매서운 시선이 내게 닿았다.
“반죽, 안 오고 뭐 하지?”
“이짜나! 에노시! 요기 예쁜 언냐두 가치 가면 안 대……?”
“뭐?”
내 말에 에노쉬가 눈치 없이 인상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릴리안 영애는 바쁜 사람이다, 허튼소리하지 말고 얼른 와라.”
“아…….”
릴리안 데이지의 입술이 아주 작게 달싹였다가 꾹 닫혔다.
‘여기서 입 닫지 말라고!’
나는 바쁘지 않다!
나는 사실 시간이 된다!
왜 입이 있는데도 말을 못 해!
그리고 에노쉬도 그러는 거 아니야, 네가 해 주는 그게 배려가 아니라고!
“어, 언냐 바빠여?”
하는 수 없이 나는 아직 철이 덜 든 어린애인 척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망울망울하게 그녀를 보았다.
릴리안 데이지가 당황한 듯 나를 내려다보다가 에노쉬를 한 번 보더니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이고, 예쁜 입술 다 터지겠소, 언니.
“저는…….”
“저엉말 안 대여…?”
나는 주먹을 꼭 쥐고 화이팅 자세를 취해 보였다.
그녀는 내 자세를 이해하지 못한 듯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오늘 일은 다 끝냈기 때문에…… 한가합니다.”
릴리안 데이지가 드디어 솔직하게 말했다.
“봐! 에노시, 안 바쁘시대!”
“…정말인가? 그 애가 엉겨 붙어서 억지로 그러는 거라면 괜찮아. 이 반죽이 원래 주제를 좀 모른다.”
사랑의 큐피드 역할을 해 주겠다는 나를 주제 모르는 반죽 취급을 하네.
‘그냥 관둘까.’
저 오만한 놈의 말에 약간 마음이 식었다.
“……그런 거 아닙니다, 한가합니다.”
릴리안 데이지 영애가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
슬쩍 고개를 돌리자 에노쉬가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대답이 없는 시간이 길어지자 릴리안 데이지의 얼굴도 점점 무겁게 아래로 숙어졌다.
‘아니, 이걸 이렇게 망친다고?’
내가 발을 동동 구르는 순간, 루실리온이 성큼성큼 에노쉬에게 다가가더니 그의 등짝을 세게 내리쳤다.
짜악-!
에노쉬의 몸이 펄쩍 뛰었다.
거친 행동에 나와 릴리안의 입도 함께 벌어졌다.
“이게 무슨 짓이냐, 이 무엄한……!”
“대답, 하세요.”
에노쉬의 사나운 기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루실리온이 화사하게 웃었다.
“주인님이 발발 떨고 계시잖아요.”
그러더니 에노쉬의 귓가에 입술을 바싹 들이대곤 속삭였다.
“눈치 좀 챙겨요. 멍청한 황자님.”
티 없이 하얗게 웃는 낯이었던 터라 나도 잠시 넋을 잃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내 청력은 깔끔하게 내 망상을 깨뜨렸다. 청력이 좋은 것도 문제다.
“아, 미안. 조금 놀랐다…….”
다행히 에노쉬는 등짝을 때리면 눈치를 챙기는 모양이다.
게다가 꽤 솔직한 말이 튀어나왔다.
“산책을 하다가 다과를 하는 것뿐인 재미없는 일정이지만…….”
에노쉬가 느릿느릿 다가와 릴리안 데이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대가 괜찮다면 함께하는 건 어떤가?”
“좋아요.”
릴리안 데이지는 다소 빠르게 대답하며 그의 손바닥 위에 제 손을 올렸다.
‘어휴…….’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나저나 에노쉬가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저렇게 바짝 긴장하는 사람이었다니….’
평소에도 이렇게 대놓고 피했다면, 편지에 쓴 것처럼 왜 릴리안 데이지가 눈이 마주치면 왔던 길을 되돌아갔는지 알 법도 했다.
‘나라도 도망간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퍽 마뜩잖은 걸 보는 표정이었을 텐데 가서 말을 걸 용기가 생길 리도 없었다.
‘일단 한 걸음인가?’
에노쉬가 죽은 후에 릴리안 데이지가 흑화해서 황제랑 짝짜꿍하는 것보단… 이게 낫겠지.
‘……죽은 후라.’
나는 기쁜 티를 제대로 내지도 못하고 서툴게 웃고 있는 에노쉬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그 곁에 한결 밝아진 표정을 한 릴리안 데이지도.
‘저렇게 어린애가 죽는구나.’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납치되지 않았던 여주인공은 에노쉬와 엮일 수 없었다.
에노쉬는 여주인공의 치료를 거부했다.
에노쉬의 죽음은 여주인공의 첫 각성을 위한 일이었지만, 그 모든 것이 무산된 지금 에노쉬의 죽음엔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가시죠, 주인님.”
두어 걸음 뒤처진 내게 루실리온이 손을 내밀었다.
내가 엉거주춤 손을 뻗자 그가 내 손을 붙잡곤 내 보폭에 맞춰 천천히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우리는 에노쉬의 몸을 생각해서 온실을 짧게 거닐다가 온실 한편의 테이블에 앉았다.
“와아, 언니는 그러케 어려운 걸 공부하시는구나!”
“……흠흠, 별거 아니에요. 전하의 약혼녀로선 기본 소양이죠. 근데 언니라니….”
“그래. 그녀는 너와 입장이 다르다는 거다, 반죽. 릴리안 영애에게 저 정도는 기본이지.”
“…….”
칭찬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이 멍청아!
당연하다고 하면 어떡해! 날 위해서 열심히 해 주고 있다거나, 어? 귀족 영애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다거나 뭔가 조금 더 다르게 치켜세워 줄 수 있는 말이 있잖아!
“하하, 기보니가 세상에 어디 써여. 그럼 저는 기보니도 업나여?”
“응, 넌 없잖아?”
그러는 너는 눈치도 없냐?
“……이 멍충이 가튼….”
“뭐? 내가 오냐오냐해 주니 너나 네 심복이나 내게 너무 기어오르는구나.”
에노쉬가 으름장을 놓았다.
물론 무섭지는 않았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딱히 악의가 느껴지진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내게 악의가 있는 사람과 악의가 없는 사람을 누구보다 빠르게 구분할 자신이 있었다.
“그나저나 이쪽은 누구신가요?”
“주인님의 애완동물입니다.”
“……예?”
루실리온이 스스로를 낮춰 표현하는 말에 우아하게 찻잔을 기울이던 릴리안 데이지가 멈칫했다.
“애완동물이요……?”
“네.”
릴리안 데이지의 표정이 살짝 경악에 물들더니 내게 시선을 돌렸다.
“아니에여, 제 집에서 잠깐 머무는 칭구에여.”
“……아.”
“어느 집안의 영식인지….”
“저는 귀족이 아닙니다.”
“……귀족이 아니라고요?”
릴리안 데이지는 루실리온을 가만히 보았다. 다과를 먹는 루실리온의 예법은 거의 완벽한 수준이었다.
귀족보다도 더 귀족다웠다는 말이다. 훨씬 더 어린 시절부터 교육을 받지 않았다면 불가능할 정도였다.
“네.”
그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오랜만에 나와서 차를 마시니 좋구나. 반죽도 가끔은 쓸 만한 말을 하는 모양이야.”
“……반죽 아니라니까여.”
“못생긴 반죽.”
주먹을 꽉 움켜쥐며 그를 휙 노려보자 에노쉬는 내가 웃겼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소년의 시원스러운 웃음소리에 릴리안 영애의 무릎 위에 살포시 놓여 있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세 분은 언제 그렇게 친해졌는지요.”
“아, 그게…….”
“그런 일이 있었어, 영애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이다.”
내가 변명하기도 전에 에노쉬가 단숨에 잘라 냈다.
그러더니 여상하게 찻잔을 기울이는 것이 아닌가.
‘황자가 납치된 건이라 극비라도 되는 건가?’
하긴, 황제가 아끼는 황자가 납치되었다고 하기엔 황성이 무척 조용했었다.
황제가 가만히 있을 사람도 아닌데.
그 말은 즉, 누군가 의도적으로 얘기가 새어 나가는 것을 막은 것이 분명했다.
‘왜?’
딱히 이유가 없다.
사라진 황자를 찾는 것이 그다지 흠이 되는 일은 아니지 않은가.
물론 2황자가 또 2황자 했다는 소리는 들을 수 있겠지만…….
‘설마…….’
에노쉬 저거 납치됐던 일을 알리는 건 멋없어서 그러는 건 아니겠지……?
“크흠.”
에노쉬가 눈치를 주듯 나를 힐끗거리며 헛기침을 했다.
“……아, 그렇군요.”
릴리안 영애가 실망한 듯 고개를 푹 숙였다.
황자인 그가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입을 잘못 열었다간 그의 불신을 살 수 있는 일이었다.
‘괜히 미움받고 싶진 않으니까.’
나중에 릴리안 영애에게 따로 얘기해 주자 싶어서 결국 입을 다문 찰나였다.
“2황자 전하께서 납치됐었는데, 그때 주인님도 같이 납치되었었습니다. 아, 극비사항이니까 누구에게도 말하진 마십시오, 영애.”
루실리온이 쿠키를 오독 씹으며 산뜻하게 말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기함을 토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