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64
“본래라면 죽일 예정이었지만, 그게 따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수 있다면 아무래도 사지 불구 쪽이 더 낫겠지.”
아니, 아니, 대체 이렇게 무서운 얘기를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거야.
“아, 아빠……?”
그런 무서운 얘기는 안 하면 안 되는 걸까?
그는 나를 달래려는 듯 뺨을 살살 쓰다듬어 주었지만, 그게 안심이 되진 않았다.
“그러고 보니 따님.”
“네?”
“따님은 낳아준 부모에 대해 기억하는 게 있니?”
기억?
그런 게 있을 리가.
잠시 고민해 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애초에 내 몸도 아니고…….’
에 딱히 나 같은 조연 엑스트라의 설명도 나오지 않았었으니 말이다.
내가 고개를 젓자 에르노 에탐은 어쩐지 조금 안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가볍게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곤 내가 잠이 들 때까지 한참을 기다려 주었다.
* * *
춥고 싸늘하며 때때로 따뜻한, 변덕스러운 봄이 지나고 지독한 더위와 함께 여름이 찾아왔다.
태양이 내리쬐는 여름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숨이 턱턱 막혔다.
우리가 함께한 시간은 석 달이었지만, 우리는 누구보다 빠르게 가까워졌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모두가 알고 있다는 듯, 우리는 최선을 다해 친해졌다.
그래야만 했다.
그리고 우리의 예상보다도 빠르게 꿈에서 깰 시간이 다가왔다.
나는 오늘도 언제나처럼 사나흘에 한 번씩 있는 에노쉬와 릴리안과의 작은 다과회에 가는 길이었다.
“루시, 이거 언냐랑 에노시가 조아할까?”
“좋아할 겁니다.”
그렇게 말한 루실리온이 보란 듯이 커프스 링크를 내게 내보였다.
오는 내내 그는 평소와는 다르게 헤픈 웃음을 입가에 매달고 있었다.
최근 쇼핑을 갔다가 사 온 선물을 전달해 줬을 뿐인데 저렇게나 좋아하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좀 더 자주 사 줄 걸 그랬나?’
사실 맨날 날 쫓아 온갖 수발을 다 드는데도 루실리온은 정식으로 고용된 것이 아니라 월급도 받지 않고 있었다.
너무 자연스럽게 곁에 있어서 내가 준 선물을 이렇게까지 마음에 들어 할 줄은 몰랐다.
‘누군가의 선물을 골라 보는 게 얼마 만이었는지.’
그 옛날 눈앞에서 갈기갈기 찢기고 쓰레기통에 들어간 선물을 본 이후로 선물을 살 생각은 하지도 않았는데.
“정말 기쁩니다.”
그의 눈동자를 닮은 새파란 커프스 링크가 루실리온의 손목께에서 반짝 빛났다.
“응, 조아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부디 우리의 관계가 조금 더 단단하고 길게 지속되도록.
“의사! 의사를 부르세요! 당장! 황자 전하! 금방 의사가 올 겁니다. 조금만…….”
“흐아아악!”
에노쉬의 억눌린 비명에 급히 달려 그의 방앞에 가자 활짝 열린 방 밖에서 굳어 있는 릴리안 데이지가 보였다.
“언니!”
내 목소리를 들은 릴리안 데이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은 믿기지 않은 것을 본 사람처럼 벌벌 떨리고 있었다.
“에, 에이린…….”
“언니 갠차나여?”
“2황자, 전하가…….”
고개를 돌리자 침대 위에서 발작하며 온몸을 비틀고 비명을 지르는 에노쉬가 있었다.
“끄흑…… 아아악!!”
그가 주변에 있는 물건을 마구잡이로 던지기 시작했다.
문득 고통에 일그러진 에노쉬의 시선이 우리가 있는 쪽에 닿았다. 그의 눈이 확 커지더니 이윽고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꺼져……!”
그가 근처에 있던 화병을 내던졌다.
화병이 날아와 문 옆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그 격렬한 적의와 거부에 당황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다 꺼져! 다 꺼지라고! 보지 말고. 다 꺼지란 말이야!! 꼴도 보기 싫으니까……. 끅…….”
에노쉬가 가슴을 부여잡으며 몸을 바짝 웅크렸다.
“꺼져…….”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읊조리는 목소리엔 명백한 거부감이 실려 있었다.
이불보엔 그가 토한 듯한 피가 한 움큼 있었고 그의 발버둥과 거친 행동에 시종 시녀들은 감히 다가가지도 못했다.
“…….”
앞으로 나선 것은 무표정한 얼굴로 에노쉬를 지켜보던 루실리온이었다.
“주인님.”
“어…….”
“근처에 가서 데이지 영애와 차라도 한잔하고 계세요, 금방 가겠습니다.”
“너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루실리온이 성큼성큼 에노쉬의 방으로 들어갔다.
에노쉬가 무언가를 잡으려고 하자 그가 가볍게 에노쉬의 손목을 붙잡아 침대에 처박으며 그를 제압했다.
“이거 놔…! 당장……! 흐윽…….”
“다들 나가서 문 닫아 주시겠습니까?”
루실리온의 말에 시종 시녀들이 주춤했다.
“아무리 전하의 친우분이라고 하셔도…….”
“어서요.”
루실리온의 새파란 눈동자에 새하얀 빛의 고리가 걸리는가 싶더니 시종 시녀들이 입을 꾹 다물며 밖으로 우르르 몰려나와 문을 꽉 닫았다.
“어……?”
“갑자기 왜…….”
“왜 나오고 싶었더라…….”
시종 시녀들은 의아하게 읊조리면서도 다시 안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진 않았다.
루실리온이 뭔가 수를 쓴 게 분명했다.
“…저렇게 아프신 줄은, 몰랐어…….”
벌벌 떨리는 목소리에 나도 정신을 차리고 릴리안을 보았다.
‘일단…….’
루실리온이 문을 닫고 들어갔으니 어찌할 수도 없었다. 내 담당은 릴리안이었다.
“언냐, 가자.”
나는 릴리안의 손을 붙잡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손을 작은 손으로 꼬옥 부여잡으며 나는 그녀를 살살 끌어당겼다.
“의원을 데리고 왔습니다!”
“황자는 어떤가.”
“당장 문을 열게!”
시종과 의원의 뒤로 다급한 기색의 황제가 보였다. 굳은 시선이 나와 릴리안에게 닿았지만, 그는 말없이 시선을 옮겼다.
나도 지금 그를 상대할 마음이 없었기에 릴리안과 함께 빈 응접실을 찾아 자리를 옮기려 했다.
“아, 그게…….”
뒤에서 누군가가 루실리온이 안에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듯했다.
“당장 강제로라도 열지 못할까!”
분노한 황제의 목소리에 나는 꿀꺽 침을 삼키며 후다닥 도망갔다.
그렇지 않으면, 잔뜩 분노한 황제에게 이나 루실리온의 정체에 대해서 줄줄 불어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게 거의 질질 끌리듯 걸어오던 릴리안이 응접실 소파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나는…… 전하가 이렇게까지 아프신 줄은 몰랐어.”
“응.”
“어떡해…. 정말, 돌아가시면 어떡하지?”
어른스러운 척, 강한 척을 하던 어린 소녀가 손바닥에 얼굴을 묻으며 웅얼거렸다.
“지금까지도 여러 번 고비를 넘겼다고 들었는데 어쩐지…….”
“…….”
“오늘의 황자 전하는, 멀리 떠나실 것 같았어.”
릴리안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나는 그 표정을 보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우리가, 살릴 수 있을지도 몰라.”
“어떻게……? 수많은 약초를 써도 어떤 의원이 와도 병명조차 알아내지 못했대!”
꾹꾹 울음을 참던 소녀가 일찍이 철든 후 처음으로 소리를 내지르듯 비명처럼 소리쳤다.
“나는…, 나는…….”
릴리안의 숙인 고개 아래로 눈물이 후두둑 떨어져 붉은 러그를 한층 더 짙게 물들였다.
“전하를 사랑해…….”
전하지 못했던 고백이 기어코 터져 나왔다.
나는 잠시 그녀를 보다가 릴리안의 팔을 붙잡았다.
“언냐, 내가 책을 봤는데 만병통치약이 있대.”
“만병……통치약?”
“응, ‘드라고니아’라는 약초가 있는데 이거를 먹으면 무슨 병이든 다 낫는대.”
“……그런 풀 이름은 처음 듣는데.”
“사전에 있었써.”
판타지 세계관이니까 만병통치약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 식물도감을 첫 장부터 끝까지 정독한 끝에 알아낸 것이었다.
‘키우는 방법 부분이 조금 찢어져 있기는 했지만…….’
사전에 있을 정도면 거짓말은 아닐 거다.
그 약초는 씨앗을 구하기가 무척 어렵지만, 키워 내기만 하면 무슨 병이든 치료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 약초가 있을 리가…….”
그렇게 말하면서도 릴리안의 눈동자는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래도 해 보자!”
어차피 에노쉬는 죽을 운명이 확정됐다. 저대로 둔다면 무력하게 죽는 걸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무엇이든 도전해 보지 않는 것보단 도전하는 것이 후회하지 않는 길이었다.
그것이 꿈만 같은 이야기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릴리안은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짙은 보랏빛 드레스가 오늘따라 유독 그녀에게 잘 어울렸다.
나는 활짝 웃으며 릴리안에게 준비해 온 선물을 내밀었다. 그녀의 눈동자를 닮은 주황색 브로치였다.
“선물이야.”
“선물……?”
“응, 에노시랑 루시랑 언냐 거랑 내 거! 넷이 세트야.”
선물 포장을 풀어 내용물을 본 릴리안이 서툴게 웃었다.
“……예쁘네.”
“응.”
“이거 차고 계속 같이 다과회를 하면 좋겠다.”
릴리안이 자그마한 소망을 뱉었다. 본래라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을 작은 소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