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65
나는 물끄러미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나 역시도 바라는 소망이었다.
똑똑.
그녀가 손수건으로 막 눈물을 꾹꾹 눌러 닦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
짤막하게 대답하자 문고리가 돌아가며 루실리온이 안으로 들어왔다.
“주인님.”
“……루시?”
“네.”
루실리온은 에노쉬와 몇 차례 몸싸움이라도 있었는지 옷 몇 군데가 조금 구겨져 있기는 했지만 크게 달라진 곳 없이 멀끔했다.
“황자 전하는 괜찮나요?”
릴리안이 급히 물었다.
루실리온은 발갛게 물든 그녀의 눈을 본체만체하며 묵묵히 입을 열었다.
“네, 당장은 괜찮아졌지만, 오늘은 별로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럼 다음엔…….”
루실리온은 잠시 침묵한 끝에 빙긋 웃었다.
“사흘 뒤에 다시 보자고 하더군요.”
그 대답에 릴리안이 안도의 숨을 뱉었다.
“에노시는 정말 갠차나……?”
“네, ‘오늘은’ 괜찮습니다. 하지만…… 위험하긴 하군요.”
루실리안의 말에 릴리안 영애의 얼굴이 다시 새파래졌다. 나는 더 묻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오늘은, 이만 갈게요. 에이린, 조만간 따로 연락할게요.”
“……응.”
그녀는 입술을 꾹 깨물었지만, 방 밖을 나갈 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어깨와 허리를 곧게 폈다.
그리고 그날부터, 나와 릴리안의 ‘드라고니아’ 약초 키우기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 * *
드라고니아 약초는 말 그대로 환상처럼 여겨지는 약초였다.
씨앗을 얻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꽃을 먼저 키워 내서 인공수정을 시켜야 했는데, 그 세 가지의 꽃을 키우는 것이 그야말로 지옥 같다고 했다.
첫 번째 꽃은 설빙화였다.
설빙화는 이름 그대로 눈이 내리는 빙하 위에서 자라는 꽃이었다.
몹시 추운 곳에서 싹이 트는 특수한 꽃이었던 터라 나는 칼란 에탐에게 매달려 이런저런 부탁을 해야 했다.
“뭐, 크흠. 여동생이 원한다면 못 해 줄 것도 없지.”
“정말?”
“응, 대신 나랑 일주일 동안 같이 손 꼭 붙잡고 자기! 어때?”
“어…….”
사실 대가라고 하기엔 너무 쉬웠다.
나는 외로움을 많이 탔고 누구랑 같이 자는 건 좋아해서 당연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조아!”
“정말이지! 약속했다! 너랑 나랑 단둘이서만 자는 거야! 불청객 없이! 알았지?”
“응……!”
“오라버니가 멋지게 키워다 줄게!”
그렇게 설빙화는 칼란 에탐이 키우게 되었다.
두 번째 꽃은 염옥화.
이름부터 알겠지만, 이번에는 불지옥보다도 더 뜨거운 열기에서만 자라는 꽃이었다.
그러니까 즉, 활화산 근처에서나 드물게 볼 수 있는 꽃이라는 얘기다.
“아휴…….”
솔직히 이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설빙화와 염옥화를 수정해서 맺힌 열매를 심어서 새로운 꽃을 만들면 그게 바로 ‘설옥화’라는 꽃이 된다고 한다.
그 꽃을 또 세 번째 꽃인 ‘심해화’와 수정해서 나온 열매의 씨앗을 심어 나온 꽃을 불에 태우면 웬 씨앗이 하나 나온다고 한다.
그게 바로 ‘드라고니아’의 씨앗이라고 한다.
‘그 씨앗을 키우는 방법을 모르겠지만…….’
드라고니아 씨앗을 많이 만들어서 이런저런 실험을 해 보면 하나쯤은 싹을 틔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아, 심해화는 이름 그대로 심해에서 자라는 꽃이다.
‘나는 솔직히 능력이 안 되고…….’
키울 자신도 없고 그 꽃을 무사히 가져올 자신도 없다.
칼란 에탐에게 꽃 한 송이를 떠넘겼다고 한들, 나에겐 두 개의 커다란 난제가 남았다.
‘음…….’
이 꽃을 누구한테 떠넘기지?
나는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내가 키우는 건 애초에 포기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평범한 도마뱀이고 평범한 도마뱀은 염옥화를 구하러 갔다가 도마뱀 구이가 될 거고 심해화 키우러 갔다가 상어 먹잇감이나 될 거다.
“푸후…….”
한숨을 푹 내쉬자 뒤에서 그림자가 짙게 졌다.
“솜털아, 어린 것이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느냐.”
“어……? 하라부지.”
“오냐, 아주 황성이나 오고 가더니 나는 쏙 잊었더구나. 고얀 것, 즐거웠느냐?”
어, 왜 토라진 것 같지?
아쉬울 게 많았던 나는 그에게 두 팔을 뻗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녜여, 보고 시퍼써여…….”
“하지 않던 애교를 피우는 걸 보니 바라는 것이 있는 모양이구나.”
뜨끔.
정확히 정곡을 찔렸다.
내가 허허실실 웃자 그가 코웃음을 치며 나를 자연스럽게 품에 안았다.
“네 덕분에 그 망나니 자식이 조금은 사람처럼 굴더구나.”
“망나니여?”
“네 아비 말이다. 순 뺀질거리며 후계자 자리를 물려받을 생각도 없이 방탕하게 되는 대로 놀더니 드디어 생각이 들었는지 후계자 자리를 넘겨받았다.”
그건 좀 의외네, 전혀 생각 없어 보였는데.
“와아, 추카해여.”
어쩐지 그래서 표정이 좀 밝아 보였나?
그는 내 엉덩이를 팔로 받쳐 자연스럽게 날 안은 채 집무실로 들어갔다.
‘……어?’
집무실이 이렇게 어지러웠나?
사방에 조각상 같은 것이 많았다. 그것도 도마뱀 조각상.
뭔가 도마뱀 인형도 보였다.
내가 입을 벌리고 집무실을 보자 그가 조금 우악스럽게 내 뒤통수를 눌러 제 가슴팍에 묻게 했다.
“하, 하라부지?!”
“빨리……!”
속닥거리듯 아주아주 작은 목소리로 미르엘 공작이 누군가에게 지시했다.
바스락거리며 사람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귀에 다 들리는데, 그는 태연하게 집무실 책상 앞 소파에 나를 내려놓았다.
시야가 되돌아왔을 땐 언제 그랬냐는 듯 집무실은 아주 깨끗하고 깔끔했다.
‘……어.’
이걸 순식간에 치워 버렸네.
제법 양이 되는 것 같았는데 말이다.
‘아아, 혹시 덕질이라도 하는 건가?’
하긴, 취미 생활이 도마뱀 같은 파충류의 조각상을 모으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덕질을 들키는 건 체통에 좋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이런 내용은 에도 없었던 것 같은데.’
역시 소설에는 생략된 게 많은 모양이다.
‘수인은 싫은데 파충류는 좋다니…….’
아주 약간 마음이 상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사치야, 사치.’
지금도 충분히 복에 겨운데, 더 욕심을 내진 말자. 욕심을 내는 순간 균형은 깨어지기 마련이었다.
“크흠, 방이 좀 지저분했지. 평소엔 정리를 잘 안 해서 말이다.”
“갠차나여.”
나는 눈치 빠르니까 모른 척해 줄게요. 아무래도 취향은 존중해야 하니까.
나도 말린 약초나 독초 책갈피처럼 만들어 두는 게 취미였던 시절이 있었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가정교사와 학습하는 건 어떻지? 선생은 네가 아주 뛰어나다고 하는구나.”
“재미써여!”
내가 활짝 웃으며 대답하자 눈을 동그랗게 뜬 미르엘 공작이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재밌다고?”
“네!”
“그 제왕학이니 예법이니 하는 뭔가가?”
“네!”
사실 그냥저냥이었지만, 기껏 사교육을 붙여 준 거니까 싫다곤 할 수 없었다.
그리고 힐 로즈먼트는 처음에 내게 무례하게 굴었던 것만 제외하면 그 이후엔 착실히 교사 노릇을 해 주었다.
끝나고 차를 한잔하자느니 좋아하는 건 뭐냐느니 이상하게 건네 오는 시시콜콜한 대화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허어…, 그게 재밌다니 너는 정말… 타고났을지도 모르겠구나.”
작게 중얼거리는 미르엘 공작은 뭐가 그리 기특한지 껄껄 웃으며 내 머리를 엉망으로 헝클였다.
“허참, 네 아비가 네 반만 닮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꼬!”
미르엘 공작이 허탈한 듯 소리쳤다.
‘그럼 소설은 재미가 없었겠죠…….’
예의 바르고 공붓벌레인 후계자가 능력 좋은 딸까지 얻어 승승장구하는 얘기가 펼쳐졌을 테니까…….
나는 그냥 빙긋 웃어 보였다.
“그래서, 너같이 쪼끄만 것이 뭐 때문에 그렇게 한숨을 쉬었느냐.”
“아…, 꽃이 피료해서여.”
“꽃? 말만 하면 화원까지도 가져다줄 것을. 무슨 꽃이냐?”
“염옥화랑…… 심해화여.”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꼬리는 주인의 의사를 반영하듯 축 처지고 미르엘 공작의 미간은 한층 좁아졌다.
“염옥화랑 심해화? 그 까탈스러운 꽃들을 네가 어디에 쓰려고 하느냐?”
키우기 어려운 만큼이나 모르는 사람이 없는 꽃이었다.
“그냥 피료해서여…….”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기로 했다.
‘괜히 허튼 일을 한다고 도와주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그런 건 싫었다.
설령 에노쉬가 살아나지 못하더라도 나는 마지막 희망을 걸고 싶은 거다.
“흠……, 그래?”
그러나 미르엘 공작은 자세한 얘기를 캐묻지도 않고 그저 턱을 문지를 뿐이었다.
“알겠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뭐가 알겠는데……?
“소식을 전해 줄 테니 며칠 기다리거라. 그리고 2황자의 몸이 좋지 않아서 한동안 방문은 삼가 달라더구나.”
“…네?”
“황제의 직인이 찍힌 연락이 왔단다.”
에노쉬가 결국 만나는 것을 고사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한동안은 나도 드라고니아를 만드느라 바쁠 테니까.
‘릴리안에게 편지를 써야겠다.’
분명히 그쪽도 충격받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이만 가 보거라.”
“네. 안뇽히 개세여!”
나는 꾸벅 고개를 숙이곤 타박타박 걸어가 집무실을 벗어났다.
“아가씨, 대화는 잘 나누셨나요?”
불쑥 튀어나온 얼굴에 나는 그저 입을 꾹 다물며 어색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