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69
‘뭐지?’
키울 수 없다고 했던 거 아니었나?
루실리온과 함께 마차에 앉아 있으면서도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그건 무슨 씨앗인가요, 주인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루실리온이 바싹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드라고니아래.”
“드라고니아…? 아…….”
루실리온이 작은 목소리로 읊조리더니 이내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근데 아빠는 이건 더 키울 수 없는 거래.”
에르노 에탐이 망나니인 것에 반해 똑똑하다는 설정을 생각하면 그가 틀릴 일은 극히 드문데 이상한 일이었다.
“역시….”
루실리온이 가만히 아주 작게 난 싹을 들여다보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응?”
“어쩌면 세상에서 주인님만 유일하게 키울 수 있는 걸지도요.”
“무슨 마리야?”
“아무것도 아니에요.”
루실리온이 해사하게 웃으며 내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에노시는 갠차나…?”
“음…, 오래는 못 버틸 것 같아요.”
“…이 꽃이 빨리 자라야 하는데….”
루실리온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입을 다문 채 내 손을 조용히 잡아 올 뿐이었다.
그것이 마치, 상냥한 위로 같아서 나는 애써 그를 보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다.
빠르게 움직인 마차는 머지않아 황성에 도착했다.
나는 루실리온의 뒤를 졸졸 따라 움직이면서도 터져 나오는 한숨을 참지 못했다. 모든 것이 불확실했다.
“주인님, 아까도 말했지만, 황자 전하는 여러모로 예민한 상태라서 당신을 반기지 않으실 수도 있어요.”
“…괜찮아.”
화분을 전해 주고 싶었다. 꽃이 다 자랄 때까지만, 버텨 달라고 하고 싶었다.
바라는 것은 단지 그것뿐이었다.
“황자 전하, 들어가겠습니다.”
루실리온은 답지 않게 제법 정중한 어투로 말하며 노크했다. 안에서 답이 들려오지 않았으나 그는 개의치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퍽-!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베개가 날아와 그의 가슴팍을 때리고 주르륵 미끄러졌다.
“내가 허락하지 않았잖아!”
들려온 것은 날카롭지만, 바스러진 사막의 모래만큼이나 메마른 목소리였다.
루실리온의 어깨 너머로 뼈가 보일 정도로 빼빼 말라서 우울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에노쉬가 보였다.
눈 아래는 움푹 팼고 마지막으로 봤던 때보다 손목은 가느다래져 있었으며, 절망이 서린 눈동자엔 생기보다는 그저 울분만이 가득 내재해 있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죽음을 견딜 수 없는 듯 소년은 온몸으로 살고 싶다 외치고 있었다.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나와 릴리안이 열심히 씨앗을 찾는 동안 에노쉬는 죽음과 싸웠을 것이 분명했다.
“왜 들어왔어, 왜! 내가 허락하지 않았는데 대체 왜!”
에노쉬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주변에는 손수건이 늘어져 있었고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 손수건마다 피가 묻어 있었다.
날카로운 물건이나 위험한 물건은 방 안에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던질 수 있는 것이라곤 베개 외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젠장…….”
낮게 읊조린 에노쉬가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이불을 덮은 채 침대에 앉아 있는 소년은 곧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안 오면 안 온다고 불만을 터뜨릴 거면서.”
루실리온이 귀찮다는 듯 낮게 혀를 차며 베개를 줍고는 에노쉬에게 가볍게 던졌다.
깃털 베개가 에노쉬의 얼굴을 맞고 주르륵 떨어졌다.
“무엄한 놈…. 너는 언제까지 황족을 공경하지 않고 오만하게 굴 것이냐?”
“먼저 던지질 말든가요.”
루실리온이 나를 흘긋 보고는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에노쉬가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움푹 들어간 뺨은 그간의 고생을 보여 주었고 말라비틀어진 목과 바싹 마른 나뭇가지 같은 손은 내가 알던 에노쉬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뭐야, 너.”
루실리온에게 닿던 에노쉬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안뇽, 에노시….”
“…반죽.”
나는 멋쩍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 순간 에노쉬의 낯이 새하얗게 질려 가더니 이내 이를 악물었다.
“너! 이 몸의 허락도 없이 누가 들어오래?! 연락할 때까지 오지 말라고 했잖아! 누구 멋대로 들어와서…….”
나는 화분을 든 채 입술만 뻐끔거리다가 그냥 성큼성큼 그에게 걸어가 화분을 한쪽에 올려 두곤 에노쉬를 끌어안았다.
“그냥… 보구 시퍼써.”
에노쉬가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뜨더니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더니 내 어깨를 밀어냈다.
“동정 따윈 필요 없으니까…….”
“아냐, 그냥…….”
나는 그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이마를 문질렀다.
“네가 보고 시퍼써.”
몸에서 풍기는 약품 특유의 알싸한 냄새와 약물 냄새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팔뚝에는 주사 자국이 가득했고 마른 입술은 물어뜯은 흔적뿐이었다.
“날 비웃기라도 하러 왔어?”
“아니.”
“그럼 뭐 하러 왔는데.”
“보고 시퍼서.”
담담하게 대답하자 에노쉬가 이를 악물었다. 뒤에서 손이 뻗어와 나를 품에 끌어안았다.
안겼던 몸이 훅 떨어지게 되자 당황스러웠다. 눈을 끔뻑이며 고개를 돌려보니 루실리온이 나를 안고 있었다.
“루시….”
“네, 언제까지 끌어안고 있을 거예요?”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얘는 분위기를 못 잡게 하네.
“…그래, 다 죽어 가는 꼴 보니까 만족해?”
에노쉬가 벌게진 눈으로 물었다.
“아니…. 하지만….”
이대로 영영 만나지 못한 채 잃어버리곤 어쩔 수 없었다고 여기는 것이 더 싫다.
“칭구자나. 계속 곁에 잇구 시퍼.”
“난 싫어, 꺼져.”
“…릴리 언냐가 마니 우러써.”
그 말에 에노쉬의 어깨가 크게 떨렸다. 일그러진 얼굴로 그가 나를 노려봤다.
“…잊으라고 해.”
“너 살리려고 힘내써. 나도, 언니도.”
“살려? 제국의 모든 의원이 나를 봤는데도 안 된대! 이번 겨울을 넘기기가 어려울 거래. 넘겨도 봄이 최대래.”
내 말이 그의 역린을 건드리기라도 했는지 그가 울분을 터뜨렸다.
그러나 이내 울분 사이로 울음이 뒤섞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저 멍하니 그를 보았다.
“네가 어떻게 날 살릴 건데?”
“이거….”
나는 화분을 조심스레 내밀었다.
“뭐야? 이게.”
“만병통치약이래. 꽃만 자라면 대. 그러면… 살 쑤 이쓸 거야.”
“하…….”
그가 허탈하게 웃었다.
멍청한 어린애를 보는 시선엔 경멸마저 담겨 있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들리는 건 알지만….’
미르엘 공작이나 에르노 에탐이나 이 꽃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진 않았다. 다만 세상엔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을 뿐이다.
그 말은 즉, 효능은 진짜배기라는 뜻이다.
“야, 나는…….”
에노쉬가 손바닥에 제 얼굴을 묻었다.
“더는, 싫어. 기대하고 싶지도 않고 실망하고 싶지도 않아. 제발…… 내게 헛된 희망을 심는 건 관둬.”
몇 번이고 꺾이고 꺾여 이제 그 단단한 척 세워 두었던 줄기마저 흔들거리기 시작한 소년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상체를 숙였다.
“날 그냥, 조용히 죽게 내버려 둬.”
에노쉬가 기어코 무너졌다.
단단하게 심지를 쌓아 올리며 버티고 있던 아이는 찾아올 죽음 앞에서 결국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입술을 뻐끔거리다가 고개를 떨구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할 수는 없다.
싹이 자랐다는 건 언젠가 꽃이 핀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린가요…?”
또각.
단정한 걸음 소리에 에노쉬의 어깨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나도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릴리 언니?”
“지금 본인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알고는 계신가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온 릴리안의 눈은 발갛게 부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릴리안 영애? 여긴 어떻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지금 전하께서 하신 발언은 당신을 살리기 위해서 애쓰는 모든 사람의 노력을 무시하는 발언이에요.”
“…시끄러워. 그대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그는 릴리안의 눈을 피한 채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더니 이불을 끌어당겨 홱 돌아누워 버렸다.
“나 잘 거야, 전부 돌아가. 다시는 멋대로 쳐들어오지 마.”
“전하.”
“시끄러워, 시끄럽다고! 입바른 소리 좀 그만해! 그래서 내가 지금 낫고 있어?! 아니잖아! 제발, 제발! 날 그냥 둬. 나는…….”
후두둑.
돌아누운 에노쉬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지더니 이내 그의 뺨에 눈물이 떨어졌다.
“…….”
에노쉬의 눈이 커졌다. 그가 당황한 듯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그가 고개 돌린 침대 건너편엔 릴리안이 서 있었다.
“…왜, 영애가 울어?”
“저는, 전하와 계속 만나고 싶습니다.”
“…….”
“전하와 대화를 나누고 다과를 먹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몇 년 뒤에는 제 데뷔탕트에 함께 파트너로서 가 주셨으면 해요.”
“릴리안 영애.”
“그냥 그렇게 나중에는…….”
릴리안이 진심을 드러낸 만큼 그녀의 뺨도 축축하게 젖어 갔다.
“설령 그게 안 되더라도 추억을 쌓아도 쌓아도 모자란데, 왜… 왜 자꾸 전하께선…….”
늘 강하고 의연하게만 보였던 릴리안의 약한 모습에 에노쉬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곤 천천히 그녀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미안.”
메마른 나뭇가지 같은 가느다란 손가락이 어린 소녀의 머리를 단단하게 끌어안았다.
“내가 잘못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