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7
그리고 그것이 미르엘 공작의 분노를 한층 더 크게 불러일으켰다.
“네놈은 대체 무엇이 불만이냐!”
우레 같은 음성에 나도 모르게 몸이 흠칫 떨렸다. 내 움찔거림을 본 듯 에르노 에탐이 익숙하게 나를 품에 안았다.
“내 따님 무서워하잖습니까, 목소리 좀 낮춰 주시죠.”
헉, 안 돼.
여기서 미움 사게 하지 말라고!
나는 황급히 고개를 휙휙 저으며 허리를 한껏 비틀어 뒤를 향해 두 팔을 뻗었다.
“안예여! 에이린, 하라부지 안 무서여! 하라부지 머쪄여!”
“……뭐라?”
“하라부지, 안 무셔…….”
아니다, 사실 아주 무섭다.
살기를 풀풀 풍기는 근육질의 백전노장의 앞에서 미친 사이코패스 품에 안겨 있어 봐라.
땀이 삐질삐질 흐르고 손끝부터 차게 식는 기분이다.
그러나 내가 누군가, 감정을 숨기는 데엔 이골이 난 ‘네’, ‘넵넵’, ‘네!’ ‘넵!’의 비즈니스 민족, 한국인이다.
나는 그의 기백에 파들파들 떨리는 뺨에 힘을 주며 활짝 웃었다.
보통 사회생활은 이렇게 마음에도 없는 소리 꺼내 가면서 하는 거지.
“하라부지……, 하내지 마세여…….”
내 표정을 본 미르엘 공작의 입매가 미묘하게 떨리더니 이내 말을 삼키곤 짧게 숨을 뱉었다.
“……더는 못 해 먹겠군. 신년 회의는 여기까지로 하지. 나머지는 전부 보고서로 만들어 직접 제출해라. 해산이다. 너는 나중에 보자.”
미르엘 공작이 에르노 에탐에게 말하곤 잠시 나와 시선을 맞췄다.
애써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고 있으려니 그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나는 차마 눈도 피하지 못하고 삐질삐질 흐르는 땀도 어쩌지 못했다.
‘왜, 안 피하지?’
내가 먼저 피해도 되나?
곰은 눈을 피하는 순간 때려잡으러 온다던데…….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 때였다. 시야가 갑자기 캄캄해지더니 무언가가 눈 위를 덮었다.
“보지 마십시오, 가주님. 내 따님 닳겠습니다.”
“……뭐라고?”
“노안이 오신 건 알았지만, 귀도 나빠지셨는지요?”
내 눈을 덮은 것은 에르노 에탐의 손바닥이었던 모양이다.
에르노 에탐은 그 한 마디만을 내뱉고 가주인 미르엘 공작조차 떠나지 않은 대회의장을 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가자꾸나, 따님.”
“앗, 네, 안뇽히 개세여! 하라부지.”
나는 앞이 보이지 않아 허우적대다가 그가 있을 법한 곳에 엉거주춤 상체를 숙였다.
물론 내가 인사를 하는 와중에도 에르노 에탐은 움직이고 있었지만.
에르노 에탐은 매년 하는 ‘신년 기행’이 성공해서 그런지 상쾌한 낯으로 다정히 말하며 경쾌하게 걸음을 옮겼다.
나, 뭔가 안 들키고 잘 살아남은 건가……?
그 순간 문득 내게 경고를 하듯 소설 속 한 구절이 떠올랐다.
어?
아니, 정정한다.
X된 것 같다.
* * *
“안녕, 따님. 좋은 아침이야.”
“안뇽하세여…….”
눈을 뜨자마자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흠칫 놀라 반사적으로 꾸벅 고개를 숙이자 그가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었다.
‘이 사람은 왜 맨날 여기에 오는 걸까……?’
에르노 에탐의 파격적인 기행 이후, 일주일이 지났다.
나와 그는 말을 하지 않아도 이 상황이 역할극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나를 실제로 호적에 올리지 않았고 나는 그에게 왜 나를 딸로 삼겠느냐는 말을 했는지 묻지도 않았다.
이건 그냥 연극이었다.
그는 가정적이고 다정하게 딸 바보인 아버지를 연기하며 최선을 다하고 나 역시 말 잘 듣는 귀여운 딸을 연기하면 그만인 연극.
당연하지만, 나는 별채에서 본 저택으로 자리를 옮겼다.
침대는 한층 더 고급스럽고 푹신푹신했고 이불은 보드라웠으며 식사도 만족스러웠다.
“아침 식사할 시간이란다.”
그가 다정히 웃으며 말했다.
얼굴 하나는 정말 눈이 부실 정도라서 나는 홀릴 것 같은 기분을 애써 지우며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네!”
그는 매일 아침, 식사 전에 반드시 나를 데리러 왔다.
그게 얼마나 귀찮은지 아는 나로서는 그의 정성에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사람을 홀리는 게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다.
왜 그 ‘애인 대행’이었던 사람이 무너졌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누구야? 절대 낚이지 않겠어.’
눈칫밥만 23년, 남들에게 어떻게 하면 잘 보일지, 동정심을 잘 살 수 있을지 몸소 깨우친 사람이다.
그야말로 이런 연극엔 내성 만렙이라는 얘기다.
그러니까 이 반년만 수인인 걸 들키지 않고 무사히 보낸다면 나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될 수 있다.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처럼 굴어야지.’
미움받지 않고 누구에게나 편한 사람이 되는 방법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았다.
요구하지 않는다.
부정하지 않는다.
기대하지 않는다.
세 가지만 지킨다면 나는 누구에게나 편하고 쉬운 사람이 될 거다.
‘아, 매달리지 않는 것도 포함인가?’
내가 얌전히 시녀의 손에 들려 옷을 다 갈아입고 나오자 에르노 에탐은 나를 덜렁 들어 올려선 가볍게 품에 안았다.
나는 최대한 그의 맨살에 닿지 않기 위해서 바짝 긴장한 채 안긴 척을 했다.
나와 그의 식사는 항상 에르노 에탐의 온실에서 하곤 했다.
계절을 무시한 꽃이 사방에 흐드러지게 핀 따뜻하고 아름다운 온실이었다.
“따님, 오늘도 가지고 싶은 건 없니?”
에르노 에탐이 나를 식탁 의자에 앉히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 가지고 싶은 거라면 돈밖에 없는데, 그건 어차피 에르노 에탐이 내게 질리면 주어질 것이 아닌가.
즉, 딱히 원하는 건 없다.
괜히 뭔가를 요구해서 귀찮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
“흐음……, 그래?”
그의 목소리가 퍽 의미심장했다.
약간 심드렁함까지 느껴지는 음색에 나는 흠칫 놀라 그를 보았다.
‘아, 벌써 질리면 안 되는데.’
반년까지는 못 가도 석 달은 가야지 한 푼이라도 주지 않겠는가!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지 좋으니 말해 볼래?”
“네, 저는 사실 돈이 아주 많이 필요해요!”
“역시 너도 다른 놈들이랑 똑같구 나.”
솔직히 이런 클리셰 같은 패턴으로 갈 것 같아서 말을 못 한 건데!
저러다 심기를 거슬러서 목이 뎅겅 잘리면 어떡해.
하지만, 뭔가를 해주고 싶은 딸 바보 아버지의 욕구를 채우지 못해서 불만인 것일 수도 있다.
‘돈 말고… 나한테 뭐가 필요하지?’
머리를 쥐어짠 결과 다행히 두어 개가 떠올랐다.
너무 속물적이지 않은 것으로 얘기해 볼까?
“저어, 사시른여…….”
“그래, 편히 말하렴.”
“마이라가 있으면 조케써여. 아, 마이라는 쩌기 살 때 저 돌바 준 칭구에여.”
“……마이라? 네 전담 하녀니?”
“네!”
“흠, 그래? 내가 거기까진 신경을 못 썼구나. 조치를 취해 주마. 조만간 다시 널 돌보게 될 거다. 더 없니?”
“있써여……!”
내 대답에 에르노 에탐의 표정이 한층 더 화사해졌다. 그는 상냥하게 웃으며 내 뺨을 엄지로 가볍게 쓸었다.
“말해 보렴.”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다.
“저 개자가 가지구 시퍼여….”
“개자?”
“네! 으냉에서 만드러여…….”
“으냉? 아, 은행 계좌.”
나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돈을 받더라도 계좌가 없으면 현금을 고스란히 들고 다녀야 한다.
다섯 살짜리가 돈을 짊어지고 길거리를 걸어 다닌다?
나는 그 순간 툭 치면 현금이 나오는 걸어 다니는 현금 인출기가 되는 것이다.
돈만 뺏기면 다행이지만, 자칫 질 나쁜 놈들에게 걸리면 죽거나 내 외모에 눈독 들인 놈들에게 인신매매를 당할 수도 있다.
뭣보다 내가 그만한 담력이 없었다.
“부탁이 겨우 계좌를 만들어 달라는 거야?”
그는 의아한 듯 드물게도 설핏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계좌는 왜?”
“어…, 도, 돈 마니 모으구 시퍼서여……?”
“내가 주면 되잖아?”
넌 곧 나한테 질릴 거잖아.
차마 그렇게 말은 못 하고 나는 그저 어설프게 웃었다.
“혹씨 모르니까여……!”
내 변명 같은 말에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 따님은 벗어날 궁리만 하는구나. 신기하네.”
그가 뭐라고 중얼거렸다.
얼마나 작게 말했는지, 아쉽게도 제대로 알아듣진 못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