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74
“…….”
감동적인 말엔 나도 조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가주직은 너무한 게 아닌가 싶은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 애정이 좋아서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뭔지는 모르지만, 열심히 해 보면 되겠지. 아빠의 커다란 손이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나는 그의 품에 안겨 가만히 잠에 빠졌다.
* * *
“에이리인, 좋은 아침.”
“언니, 안뇽!”
“으응, 우리 에이린 여전히 작고 소중하고 귀여워…”
못 본 새 훌쩍 큰 샤르네가 나를 품에 끌어안았다.
겨우 열셋밖에 되지 않았을 텐데 이미 훌륭한 사교계의 레이디가 된 것처럼 그녀에게선 기품이 흘렀다.
‘역시 여주인공 버프.’
나는 픽 웃으며 샤르네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샤르네가 내 뺨에 입을 맞췄다.
“오늘도 놀자!”
“으응. 언니 내 방에 계속 와도 돼?”
벌써 일주일째라고.
샤르네는 내가 눈을 떴다는 소식을 들은 다음 날부터 일주일째 맨날 아침에 왔다가 자기 전에야 간신히 헤어지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에르노 에탐이 샤르네를 강제로 쫓아내기도 할 정도였다.
물론 그때마다 훌륭하게 성장한 여주인공은 어느새 각성한 제 능력을 이용해 흐물흐물해진 경비를 뚫고 내 옆으로 돌아왔지만.
“하지만, 5년 치를 채우려면 24시간 365일을 붙어 있어도 부족해.”
“으응….”
하지만 내게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단다.
“게다가 오늘은 어차피 같이 황성에 가는 날이잖아.”
“언니도 가?”
“응, 난 오늘 네 보호자로 가게 됐어.”
샤르네가 콧김을 훅 뿜으며 가슴을 쭉 내밀었다.
제비뽑기에서 승리했다며 당당하게 말하는 목소리가 꽤 자신만만했다.
‘제비뽑기라니….’
겨우 황성에 가는 일인데 무슨 그런 거창한 일까지 필요할까 싶어서 나는 그저 웃었다.
“준비는 다 한 거야?”
“응.”
“역시 예쁘다.”
내가 보기에는 여전히 작은데 말이다.
쑥쑥 자란 샤르네에 비해서 나는 아직 꼬꼬마 시절 그대로였다.
내가 살짝 주눅 든 기색을 보였는지 샤르네가 나를 품에 안은 채 다정하게 입을 열었다.
“드래곤은 사랑을 아주 많이 받아야 쑥쑥 큰대. 잠들어 있는 동안 성장하지 않은 것뿐이니까 걱정하지 마.”
“응….”
“우리가 이렇게 사랑해 주는데 아마 금세 키가 3미터가 될지도 몰라.”
그건 좀 징그럽고.
내 표정이 썩어 들어가는 것을 본 건지 샤르네가 모른 척 웃으며 내 손을 잡아당겼다.
“가자!”
내가 1층으로 내려가자 에르노 에탐이 와 있었다.
“아빠!”
샤르네의 손을 놓고 내가 도도도 달려가자 그가 나를 단번에 품에 안았다.
“그래, 에이린.”
“아빠도 가요?”
“아니, 아쉽지만 오늘은 일이 있단다.”
“그래요…?”
이유는 모르지만 어쩐지 실망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아빠한테 사랑받아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문득 든 생각에 입술을 툭 내밀자 에르노 에탐이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댔다.
“대신 저녁쯤에 데리러 가마.”
“정말요?”
“물론.”
“네.”
허락을 받고 나니 또 기분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상하네….’
원래 이렇게까지 아빠의 행동 하나하나에 예민했던가? 그러진 않았던 것 같은데.
“얼른 가자, 에이린.”
샤르네가 발을 동동 굴렀다.
내가 픽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가자 기사가 내게 고개를 숙여 왔다.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오늘 아가씨의 호위를 맡게 된 질 하이먼츠입니다.”
“아, 응.”
무뚝뚝한 인상의 남자였다. 단단한 근육과 커다란 떡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를 지켜 줄 것처럼 든든하긴 했다.
“잘 부탁해, 질!”
“……저야말로 호위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렇게 대답하곤 나를 조심스럽게 마차 위에 태워 주는 그의 귓불이 설핏 붉었다.
날 붙잡은 손아귀에 힘이 조금도 들어가지 않아서 자칫 미끄러지면 어쩌나 싶기도 했다.
질은 밖에서 말을 타고 온다고 했다. 이윽고 나와 샤르네를 실은 마차가 출발했다.
‘황성이라니….’
누군가 나를 찾는다고 해서 가고는 있지만 마음은 좋지 않았다.
‘에노쉬는 무사할까?’
에르노 에탐에게 물었을 때, 그는 네가 직접 가서 확인하는 게 좋겠다며 말을 아꼈다.
그래서 황성으로 가는 길이 두려우면서도 옅은 기대감을 숨길 순 없었다.
싹이 튼 화분이 있었으니까 릴리안이 그것을 잘 키워서 에노쉬를 낫게 하지 않았을까?
‘잘못됐으면 어쩌지?’
가서 맞이한 소식이 그리 좋지 않은 것이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황성으로 가는 길목에 살짝 창문을 열어 보자 거리의 분위기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보다 한층 더 침울하게 가라앉은 느낌이었다.
골목길 안에는 쓰러진 사람도 보였다.
“언냐, 요즘 무슨 일 있어?”
“응? 무슨 일? 없는데?”
샤르네의 대답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다면 괜찮지만….’
어쩐지 느낌이 싸했다.
‘5년…. 여주인공이 열세 살….’
소설에 무슨 내용이 있었던가?
‘그러고 보니 신기하네, 소설에서도 한 5년이 그냥 생략됐던 것 같은데.’
육아물 소설의 특성상 모든 시기를 글로 옮겨적을 수 없는 터라 때때로 시간을 뛰어넘는 경우가 있었다.
공교롭게 여주인공이 시간을 뛰어넘는 시기와 내가 잠든 시기가 미묘하게 일치했다.
‘우연이겠지?’
설마 그런 것까지 소설을 따라가기야 하겠어.
‘열세 살이 된 여주인공이 맞이하게 되는 첫 사건이 뭐더라….’
내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자 샤르네가 환하게 웃으며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뭐가 그렇게 심각해, 에이린?”
“아냐.”
나는 물끄러미 살짝 열린 창문 틈새로 바깥을 보았다.
그 순간, 거리에 있는 여자가 무언가를 마시더니 히죽히죽 웃으며 벽에 기대어 앉았다.
“아….”
생각났다.
이맘때쯤 ‘하타르’라고 하는 음료로 인해 중독 사건이 일어난다.
하타르는 마치 물처럼 무색투명한데 달콤한 꿀이나 수액과 같은 맛이 나서 남녀노소 누구나 할 것 없이 홀린다는 것이다.
하타르는 신경계를 마비시켜 진정제 역할을 대신하는 음료였다.
처음에는 이게 중독성 있는 독약인 줄 모른 채 음료수라고 생각하고 접하게 되는데, 그러다 순식간에 제국 전역으로 퍼지게 된다.
이걸 여주인공도 마시게 됐다가 힐 로즈먼트와 엮이게 되는 내용이었다.
이 사건의 범인이 힐 로즈먼트는 아닌데, 힐 로즈먼트는 일찍이 이것에 대한 범인을 알고도 모른 척했다.
황제 역시 자식이 죽은 충격에 이 하타르 사건을 알면서도 모른 척을 했고 한동안 제국 전역이 엉망이 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이 아마 위태위태하던 황제에게 반감을 품은 이들이 반역을 마음먹은 시초가 되었던 것 같다.
‘그러면 안 되는데.’
힐 로즈먼트라면 이 일을 막을 수 있을 거다.
그러려면 일단….
‘힐 로즈먼트의 호감을 사야 하는데.’
음, 그 미친놈 호감을 어떻게 사지?
‘모르겠다.’
일단 지금 급한 것은 에노쉬였다.
“에이린? 무슨 생각해?”
“응? 아, 그냥…, 떨려서.”
“괜찮을 거야.”
황성에 도착한 우리는 곧장 황성 사용인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로 향했다.
응접실 문 앞에 서자 심장이 쿵쿵 빨리 뛰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샤르네가 내 손을 꽉 잡아 주었다. 살짝 그녀를 보곤 고개를 끄덕이자 시종이 문을 열어 주었다.
문이 활짝 열리자 정면에서 쏟아지는 햇빛에 눈이 부셔 눈을 잠깐 감았다가 떴다.
천천히 돌아오는 시야에 나는 그저 멍하니 숨을 멈췄다. 역광에 비쳐 윤곽이 조금 흐릿하긴 했지만, 목소리는 익숙했다.
“5년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쪼끄만 반죽이구나, 너는.”
오만불손하면서도 그리운 말투에 나는 그저 잠시 넋을 잃은 채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왜 거기에 있어? 오랜만에 본 친구를 안아 줄 마음도 없나 보지?”
훤칠한 키와 자잘하게 붙은 듯한 근육, 그리고 단단해 보이는 어깨에 잠시 넋을 놓은 나는 그가 벌린 품을 가만히 보았다.
“언제까지 이 몸이 팔을 벌리고 있게 할 거야? 황족 모독죄로 갇히고 싶어?”
오만한 말투지만 그 안에 악의는 없었다. 짓궂은 장난기라면 느껴졌지만 말이다.
“야, 슬슬 진짜 팔 아프다. 반주…….”
나는 후다닥 달려가 앉아 있는 그의 품에 덥석 매달렸다.
“어이구, 참나….”
그는 살짝 놀란 듯 보였지만 이내 웃으면서 나를 품에 꽉 끌어안았다.
“오랜만이야, 반죽.”
에노쉬는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건강해진 모습으로 여전히 오만한 낯을 한 채 인사를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