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Being Raised by Villains RAW novel - Chapter 75
“무사했구나…, 에노쉬.”
“이 몸이 누군데 쉽게 죽겠어? 당연히 무사하지. 뭐… 네가 쓰러진 뒤로 에탐 놈들에게 암살 위협을 좀 받긴 했지만.”
뒤에 덧붙이는 말은 살짝 모른 척한 채 나는 에노쉬를 한참이나 보았다.
나는 가만히 그를 품에 끌어안은 채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다행이다….”
무사해서 다행이었다.
내가 어쭙잖게 나선 일이 단순한 희망 고문으로 끝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야, 우냐?”
“안 울어.”
훌쩍.
나는 에노쉬의 가슴팍에 얼굴을 좀 더 묻었다.
“우는데?”
“콧물이야.”
“이 반죽이 감히 황족을 코 푸는 손수건으로 쓰네.”
그러면서도 에노쉬는 나를 끌어안은 팔을 쉽게 풀어 주진 않았다.
내가 한참을 얼굴을 묻은 채 훌쩍이다가 고개를 들자 에노쉬가 풉, 웃음을 터뜨리곤 키득거렸다.
“뭐…!”
“야, 너 진짜 못생긴 반죽이다.”
“……너는…!”
나는 에노쉬를 노려보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잘생기긴 겁나 잘생겼네….’
에이씨.
지적할 부분이 딱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날카로운 눈매가 둥글게 휘어졌다.
“인사가 다 끝났으면 제게도 기회를 주지 않겠어요, 전하?”
“아, 그렇지.”
에노쉬가 나를 덜렁 안아 들더니 옆자리에 앉혔다. 고개를 들자 눈에 익은 소녀가 눈앞에 앉아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에이린.”
“…릴리 언니?”
한층 화려하게 피어난 그녀를 보며 나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언니가 아깝다….”
내가 반사적으로 중얼거리자 릴리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맑은 방울이 울려 퍼지는 듯한 웃음소리에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악녀여도 멋있겠는데….’
화려한 붉은 머리카락의 릴리안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한층 밝은 얼굴이었다.
“보고 싶었어요, 에이린.”
릴리안이 두 팔을 뻗어 나를 냉큼 제 품에 끌어안았다.
“에이린.”
“네?”
그녀가 나를 품에 끌어안은 채 입을 열었다.
“황자 전하를 살려 줘서 고마워요.”
“…….”
“나랑 같이 머리를 맞대고 끊임없이 고민해 줘서 고마워요.”
“언니?”
“이렇게 돌아와 줘서 고마워요.”
그 진심 어린 다정한 목소리에 나는 그저 조금 넋을 잃은 채 그녀의 품에 안겨 있었다.
“에이린이 피워 준 꽃 덕분에 전하께서 무사히 눈을 뜨셨습니다.”
“응, 다행이에요.”
내가 활짝 웃자 릴리안이 물끄러미 날 보다가 한숨을 푹 쉬곤 고개를 들었다.
“전하, 역시 첫째는 에이린 같은 딸이 좋겠어요.”
“그대는 이 반죽이 뭐가 예쁘다고….”
에노쉬가 릴리안의 품에 안긴 내 뒷덜미를 덜렁 들어 올리며 말했다.
“…….”
“아니, 예뻐. 예쁘네. 나도 영애가 좋다는 아이면 다 좋아. 아예 반죽을 입양해서 키워도 좋겠지.”
릴리안의 매서운 시선에 대번에 꼬리를 만 에노쉬가 나를 둥개둥개 어르는 척하며 말했다.
“저기 나 열 살이거든?”
“그래그래, 꼬마 반죽아.”
에노쉬가 픽 웃으며 내 머리를 슥슥 문질렀다.
“야.”
“왜?”
“사랑한다.”
“……네?”
에노쉬는 제가 말해 놓고도 멋쩍은 듯 냉큼 나를 릴리안의 품으로 돌려주었다.
“에이린, 저도 사랑해요.”
“…네?”
둘 다 왜 이래.
내가 당황해서 떨떠름한 기색을 보이자 릴리안도 약간 민망한 듯 손바닥으로 제 뺨을 쓸었다.
“…에이린은 사랑을 많이 줘야 쑥쑥 큰다고 하더라고요.”
“아….”
“귀여운 에이린도 좋지만, 역시 제 또래의 에이린이 더 좋으니까요. 그래야 다과회도 초대할 수 있고요.”
내가 기억하는 에노쉬의 마지막 나이는 열두 살이었고 릴리안의 나이가 열 살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에노쉬가 열일곱 살이고 릴리안이 열다섯 살이 되었을 것이다.
‘에노쉬는 또래라고 하기엔 좀….’
나는 힐긋 에노쉬를 보았다.
응, 쟤는 이제 좀 어른이지.
“너 눈이 좀 불손하다?”
“아닌데?”
“아니, 맞는데.”
“아닌데?”
“맞다고, 이 멍청한 반…죽은 귀엽기도 하지.”
유치하게 굴던 에노쉬가 냉큼 말을 바꾸었다. 릴리안의 표정이 아주 매서웠던 모양이다.
“아, 그러고 보니 아바마마랑 어마마마께서 네게 선물을 줄 게 있다고 하셨는데.”
“황제 폐하가?”
“응, 공작가로 돌아가기 전에 들러 봐.”
“알겠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그제야 내 뒤를 흘긋 보았다.
“샤르네 영애도 오랜만이군.”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자 전하. 데이지 영애.”
“그래, 오늘은 보호자 역할로 그대가 왔군? 에르노 에탐이 올 줄 알았더니.”
“제비뽑기에서 제가 이겼거든요.”
뒤늦은 관심에도 샤르네가 사르르 웃으며 말했다.
“허, 지원자가 많았던 모양이지?”
“네, 공작 각하…. 아니, 전전 공작 각하께서도 지원하셨거든요.”
“…전전? 에탐 공작이 정말로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실행했군.”
에노쉬가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아니, 나만 모르는 소문이 대체 어디까지 퍼져 있는 거야.
‘나만 내가 가주되는 줄 몰랐어?’
몰랐겠지.
잠이나 질펀하게 자고 있었으니까. 도대체 잠을 이렇게까지 오래 잔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
‘성장기의 드래곤….’
내가?
여전히 황당한 것도 사실이었다.
우리는 앉은 채 예전과 같이 다과를 함께 하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세상이 바뀌었다든가, 내후년쯤, 릴리안이 성년식을 치르면 결혼을 할 거라는 둥 시시콜콜한 이야기였다.
“그나저나 반죽, 너 아직 루실리온은 못 만난 거냐?”
“아, 루실리온….”
그러게, 돌아와서 정신이 없어서 눈치를 못 챘는데 루실리온도 있었다.
‘집으로 돌아갔나?’
신전이 그의 집이고 미래의 대신관이니 이미 돌아갔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응.”
늘 졸졸 쫓아다니던 그가 없다는 사실이 조금 신기하긴 했지만, 평생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집에 간 게 아닐까?”
“집? 신전 말인가? 별로 거길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는데…. 나도 못 본 지 1, 2년 된 거 같군.”
에노쉬가 팔짱을 끼곤 말했다.
‘그래도 루실리온이라니….’
그사이 정말 친구라도 된 모양이었다. 어쩐지 흐뭇한 기분에 고개를 끄덕이자 에노쉬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야, 너 또 무슨 생각했어?”
“음, 루실리온이랑 에노쉬가 친구가 됐다는 생각?”
“허, 그 예의 밥 말아 먹은 게 친구는 무슨….”
“저렇게 말하지만, 루실리온 경이 필요로 하는 건 전부 구해다 줬어요.”
“아하.”
하여튼 이 입만 걸걸한 황자, 츤데레처럼 군다니까.
나는 음흉한 눈으로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릴리안!”
“왜요?”
“아니, 내가 언제 그랬다고….”
“제 말이 틀렸나요, 전하?”
“그건 아닌데…….”
근데 못 본 새에 굉장히 우위가 바뀌었네. 릴리안이 에노쉬의 위에 앉아 있는 것이 훤히 보였다.
에노쉬가 나와 릴리안을 번갈아 보더니 짧게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생각해 보니 마지막으로 가져다준 성물이 거물급이었던 걸 보면…, 신전으로 다시 들어가는 게 거래였을지도 모르겠네.”
“성물?”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서 반문하자 에노쉬가 의아한 낯을 했다.
“너 잠들어 있는 동안 네가 성물(聖物)이나 성석(聖石)을 몇 개나 흡수했는지 알아?”
“성석?”
성석이면, 성직자들이 만드는 마력과 상반되는 기운이 담긴 돌이 아니었나?
자연에서도 나는 마석과는 다르게 성석은 성직자가 만들거나 성직자의 시체 위에서나 자라는 성력을 머금은 돌이었다.
“그래, 네가 그렇게 긴 시간 아무것도 먹지 않고 버틴 게 신기하지 않았어?”
“…….”
그건 생각지도 못했다.
그냥 판타지 세계 속이라서 당연하게도 배가 고프지 않은 줄만 알았다.
내가 가만히 입을 벌리고 있으니 에노쉬가 허탈한 듯 웃었다.
“에탐 가문에서 아직 아무것도 얘기를 안 해 준 모양이군.”
에노쉬가 조금 난감한 듯 입술 끝을 가볍게 사리물었다.
“황성 내의 고대 문헌까지 뒤져서 알아낸 사실이지만, 성장기의 드래곤이 자라는 덴 마력이나 성력 등이 필요해.”
“…응.”
“문헌에 의하면 성력이 가장 좋은 먹잇감이지만, 사실 성직자가 많은 것도 아니고 성직자라고 해서 성력이 남아도는 이는 그다지 많지 않아.”
에노쉬가 단어를 고민하듯 아주 느릿느릿 설명했다.
“그러니 성력을 지속적으로 공급해 주는 건 어려운 일이지. 마력은 그 대체재야.”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곁에 있던 릴리안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루실리온 경이 성석을 만들었어요.”
“하지만 성석은….”
성직자의 몸에서 자라나는 게 아닌 이상, 아무 돌에나 성력을 쑤셔 박는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공석(空石)’이라는 특수한 돌이 필요했는데, 이 돌은 나오는 곳이 한정된 데다가 내가 알기로 그 광산을 소유한 사람은 현 대신관이었다.
“처음엔 아무것도 몰라서 너 위험했었어.”
“…….”
“에탐 가주와 에르노 에탐이 와서 아바마마에게 황실 도서관을 열라고 협박하곤 며칠을 틀어박혔거든.”
에노쉬가 재밌는 얘기를 말하듯 어깨를 으쓱였다.
“고대 문헌을 해독하느라 지방에 있는 고고학자까지 다 불러들였어.”
“…….”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나는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